32. 악당도 혼자 기다리는 건 싫어요2021.07.20.
레냐 때문이냐는 킬리안의 물음에, 에드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뭐가?”
“실수 말입니다. 평소엔 실수하시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던 전하께서 이런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신 횟수가 벌써 다섯 번째에 들어서니…… 저로서도 이유를 알아야 할 듯해서 여쭸습니다.”
“…….”
“제 말대로 레냐 아가씨 때문인지요?”
에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던 탓에.
‘누굴 기다리는 게 원래 이렇게 짜증 나는 일이던가?’
처음에 레냐가 간식을 준비했다면서 그를 정원으로 끌고 나갔을 땐, 내심 귀찮았었다. 그냥 안에서 적당히 먹고 치우면 될 것을 굳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혼자 실내에서 차를 마시는 게 오히려 갑갑하고 허전했다. 계약으로 맺어진 약혼녀의 빈자리가 이토록 크게 표시 날 줄은 몰랐건만……. 차 마실 시간만 되면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리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전부 그때의 그 이상한 꿈 때문이겠지.’
레냐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오열하는 꿈을 꿨을 즘부터였다. 그녀가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 꿈에서 느꼈던 온갖 질척이는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여전히 그의 심장 기저에 잔류해 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한낱 꿈 따위에 휩쓸렸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약혼녀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건 사실이니까. 상당히 걱정되거든.”
킬리안의 얼굴이 곧장 환해졌다. 에드가 레냐를 단지 도구로만 여기는 걸 안타까이 여기던 차에 ‘걱정된다’는 말을 들었으니, 드디어 에드도 진심이 되었구나 싶어서 기대를 품었다. 곧 이어질 에드의 말에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질 줄도 모른 채.
“이대로 제 아비 품에 쏙 숨어들어 안 돌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정말로 걱정된단 말이지?”
“…….”
굳어 가는 킬리안을 향해서 에드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환한 미소와는 정반대로 싸늘했다.
“생각해 봐. 갑자기 결혼하기 싫어졌다고, 광산이고 결혼이고 전부 없었던 걸로 해 달라고, 그 인상 더러운 공작한테 울고불고 매달리기라도 하면?”
“아뇨, 레냐 아가씨께서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순 없잖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겼다가는 결혼을 위해서 들였던 내 시간과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될 텐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
거기까지 들은 킬리안이 긴장한 낯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씀대로 정말 레냐 아가씨께서 돌아오지 않을 경우,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든 도로 데려온 다음, 두 번 다신 나를 배신하고 도망칠 생각 따윈 못 하게끔 철저하게 관리해야지.”
다른 말들은 심술이 돋아서 조금 과장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방금 꺼낸 말만은 확실히 진심이었다. 이미 황성에도 결혼 소식을 알린 상황. 체면을 위해서라도 파혼은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심각한 이변이 없는 한은 결혼을 쭉 사수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결혼 계약서를 들이밀며 이혼을 부르짖더라도, 그냥 놓아줄 순 없었다.
‘애초에 내가 너무 허술했던 거야. 공들여서 얻어 낸 것일수록 당연히 더 꽉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건데.’
누군가를 얻고자 그토록 애써 본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데려온 약혼녀임에도 지나치게 방임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뒤늦은 후회를 삼켰다.
‘앞으론 웬만하면 시야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야지. 아니면…… 뭘 하든 전적으로 내게 의지하게 만들거나.’
레냐의 부재로 인해 자꾸만 치솟는 불안감과 짜증 속에서 그는 그런 결심을 다졌다.
“그러니까 레냐가 돌아오면 그런 불상사가 안 생기게끔 잘 감시하도록 해. 레냐를 위해서라도.”
“……예, 명심하겠습니다.”
킬리안에게도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에드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무렇게나 놓인 서류들을 멍하니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뭐든 제 말 하면 온댔는데, 그럼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레냐가 말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처음 듣고 퍽 황당한 얘기라고 생각했다가, 정말로 그녀의 말이 끝난 직후 공작의 서신이 와서 얼마나 놀랐던가. 물론 그냥 우연일 뿐이었겠지만, 그래도 속는 셈 치고서 그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
하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편지를 들고 오는 전서구나 정령 같은 것은 없었다. ‘역시 거짓말이잖아’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창문을 닫아 버리려던 때였다.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오고 있는 것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
처음엔 작은 점처럼 보이던 물체다. 그러나 그것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고, 이내 눈으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에드가 반쯤 닫았던 창문을 도로 열자 그곳으로 마침내 익숙한 분홍색 새가 날아 들어왔다.
―삐!!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삐약이의 힘찬 울음소리였다. 그 직후 지친 삐약이가 툭 떨어트린 서신을 보고, 킬리안의 시선에 놀라움이 번졌다.
“레냐 아가씨의 정령?!”
“정말로 제 말 하면 오는 거였나…….”
“……?”
레냐는 물론, 그 누구에게서도 호랑이 속담을 들어 본 적 없는 킬리안은 아리송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사이 에드는 자신의 약혼녀처럼 분홍빛을 띠는 새를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곤, 서신을 열어 보았다.
“…….”
에드는 그것을 읽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킬리안은 그 서신에 썩 좋은 이야기가 쓰여 있지 않다는 걸 알 듯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점점 차가워지는 에드의 눈빛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전하? 심각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요?”
“이시스가…….”
에드는 까슬하게 마른 목소리로 뒤이어 말했다.
“이시스가, 레냐를 죽이려 했다.”
“……!!”
한 줄로 간추린 서신의 내용을 듣고서 킬리안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사이 에드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전하? 전하! 갑자기 어딜 가시는…….”
“쫓아서 가 봐야겠어.”
“예?!”
킬리안은 최소한 목적지만이라도 듣길 원했으나, 에드의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망토를 걸친 뒤 곧바로 블랙을 소환하여 올라탔다. ―휘이잉! 블랙의 날갯짓이 실내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킬리안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
에드와 블랙은 이미 테라스 창문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 * * 나는 어느새 커다란 꽃나무로 성장해 있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렇게나 크고, 이렇게나…… 반짝일 수 있지?’
온실 천장을 뚫을 기세로 자라난 나무엔 수십만 개에 달하는 꽃송이가 달려 있었다. 그것도 내 머리 색깔처럼 은은한 분홍빛을 발하는 꽃송이가.
‘앗, 꽃잎 떨어진다…….’
싹이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것은 이내 기쁨에 흐느끼듯이 꽃잎을 떨구었다. 그 옅게 빛나는 꽃잎들은 곧 눈송이처럼 살포시 우리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는 넋을 잃은 채로 바라보았고, 공작은―
“…….”
서글픈 얼굴로 침묵하며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공작과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그가 지금 슬퍼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것 같았다. 울고 있진 않다지만 꼭 당장 눈물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눈빛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한참이고 기다렸다가 그가 조금 진정됐겠다 싶을 즘 입을 열었다.
“예쁜 꽃이네요. 아버지가 왜 그렇게 그 씨앗에 정성을 쏟았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쁘게 피어날 줄 아셨던 거죠?”
“아니.”
“……?”
“핀 모습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야. 그래서 더 집착했던 거지. 릴리아가 그토록 노력해도 피우지 못했던 꽃이니까.”
릴리아. 공작성에선 거의 금기어처럼 여겨지던 그 이름이 공작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가요?”
“그래. 말했던가? 이 씨앗, 릴리아가 나랑 결혼할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씨앗이다.”
“아뇨, 못 들었던 거 같아요.”
“이것만이 아니야. 여기 있는 식물 종자 대부분이…….”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엔, 옅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릴리아가 가져온 것들이지. 꽃을 좋아해서 직접 온실을 꾸미고 식물을 돌봤어.”
어쩐지 공작의 취미가 그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원예인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내가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이란 건가? 그래서 그렇게 애지중지 돌봤던 거구나.’
그런 거라면 이 온실의 꽃들이 죄다 예르타 산인 이유도 설명이 됐다. 예르타, 그곳은 레냐의 어머니인 릴리아의 고향인 것이다. 공작은 꽃잎이 흩날리는 광경을 여전히 눈에 멍하니 담은 채로, 과거를 되짚었다.
“손길이 섬세해서 무슨 식물이든 잘 키웠었다, 릴리아는. 그래서 다른 꽃은 다 피웠는데 마지막까지 피워 내지 못한 게 저 씨앗이었어. 항상 아쉬워했었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 피는 씨앗인데, 왜인지 제국에 오고 나서 싹트질 않는다고.”
“…….”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아쉬워만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중요한 씨앗이었을 줄이야. 문득, 딸인 나보다 씨앗 따위를 더 신경 쓴다고 공작에게 짜증 부렸던 게 떠올랐다. 덕분에 미미한 죄책감이 심장 구석을 찔러 왔다.
“……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그렇게 중요한 씨앗이란 거.”
“뭐 하러 말해, 그걸. 떠난 지 20년이나 지난 아내도 못 잊어서 집착하는 게 뭐 자랑거리라고.”
그가 이내 고개를 무겁게 숙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 놔줬어야 했어. 그런데 저 씨앗 하나…… 저거 하나가 싹트지 않는 바람에 릴리아가 끝까지 아쉬워했던 게 자꾸 생각나서…….”
그는 그 뒤로 더 말하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꽃잎이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 * * 대충 진정이 됐을 즘에야 나는 공작에게 내가 바랐던 소원이 뭔지 말했다. 내 조언대로 해서 싹이 트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가 전에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말했는데, 그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고작 그런 게 소원이었다고? 혹시 눈치 보여서 아무 소원이나 말한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갖고 싶은 건 다 말해도 된다.”
갖고 싶은 건 다 말하라니. 과거의 공작이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이라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변했네. 묘하게 태도가 부드러워졌어.’
20년간 씨앗처럼 웅크리고만 있었던 가족의 정이 비로소 그 싹을 틔우려는 걸까? 어쨌든, 나 또한 옅은 미소로써 그의 변화에 화답했다.
“전 그거면 충분해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알겠다. 따라와라.”
공작은 이윽고 나를 본인의 창고로 데려갔다. 그의 온갖 값지고 소중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창고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가장 튼튼한 금고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