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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피어난 사랑이 저물기까지 (33/102)

33. 피어난 사랑이 저물기까지2021.07.23.

공작의 금고에서 나온 그것은 겉보기엔 특별한 점이 없는, 평범한 상자였다. 그 상자까지 열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공작의 ‘진짜 보물’을.

16567318257599.jpg‘기억의 구슬……?’

상자에 보관돼 있던 그 기억의 구슬이란 것은, 그 이름 대로 기억을 저장해둘 때 쓰는 마법 도구였다. 마탑에서도 쉽게 못 구할 만큼 귀해서 마법사들조차 본인 유족들에게 기억을 남길 때나 쓴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런 귀한 걸 어디서 구했는지 물으려던 차, 공작이 먼저 덧붙여 말했다.

16567318257603.jpg“이 안에 내 기억을 담아 놨다. 사랑에 빠졌던 날의 기억, 릴리아가 니콜라스를 임신하고 있던 날의 기억, 그리고…… 릴리아가 떠났던 날의 기억. 이렇게 세 개의 기억을.”

16567318257599.jpg“여기에…….”

16567318257603.jpg“그래, 그런데 정말로 이게 네 소원이냐? 다른 건 더 없고?”

어머니에 대해 알게 해달라는 내 소원이 너무 소박해 보였던지, 그가 아까 내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금 던졌다. 물론 나도 아까 했던 대답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것 말고 더 바라는 건 없었으니까.

16567318257599.jpg“네, 정말로 이게 제 유일한 소원이에요. 어머니에 대해 알려 주신 적, 지금껏 없었잖아요. 그래서 매번 궁금했어요. 어떤 분이셨는지.”

16567318257603.jpg“…….”

16567318257599.jpg“소중히 보고서 돌려드릴게요.”

공작은 내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길로 곧장 구슬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16567318257599.jpg‘이거면 나도 어머니를 볼 수 있어.’

정말로 궁금했었다. 대체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모두가 그토록 그리워하는지가. 그러나 공작은 어머니에 관해 깊게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공작, 닉 오빠, 심지어는 루드비히까지 알지만, 오직 나만은 알 수가 없는 ‘금지된 과거’인 셈이었다.

16567318257599.jpg‘나도…… 나도 이제 가족들이랑 같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거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이내 환한 빛을 발하며, 까맣게 가려져 있던 과거를 내게 보여 주었다. * * * 맨 처음 보게 된 것은 젊은 시절의 루드비히였다. 구슬은 제삼자의 시선으로 루드비히를 비추어, 그가 말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16567318257638.jpg“각하,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더니, 이번엔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루드비히와 마찬가지로 지금보다 훨씬 젊은…… 아마 스물을 갓 넘겼을 듯한 모습의 그가 곧 대답했다.

16567318257603.jpg“관심 없다. 신부라 해도 얼굴조차 모르는 여자니까. 오든 말든, 그냥 성의 귀퉁이나 대충 내어 주고 조용히 숨죽여 지내라 하면 그만이야.”

16567318257638.jpg“……폐하께서 지어 주신 짝이라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마중 정도는 해 주셔야지요.”

그에 공작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창문 너머의 흐린 하늘만 바라보았다.

16567318257603.jpg“그쪽 가문 사람들은 다 가지고 태어난다던 성력도 혼자 못 가진 ‘불량품’을 떠맡아 주는 건데, 성의씩이나 보여야 하나? 쯧…….”

불량품. 어머니를 칭하는 공작의 호칭이 퍽 차가웠다. 덕분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랑에 빠졌던 날의 기억’을 담아 놨다기에 로맨틱한 장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이랬을 줄이야.

16567318257599.jpg‘서로 반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어……? 얼굴도 모르고 결혼한 거였구나……. 그것도 황제가 강제로 짝지어 주는 바람에…….’

공작이 싫어하는 황제가 점지해 준 짝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짝이 신성국인 예르타의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성력조차 못 쓰는 아가씨라는 점. 이 두 가지가 그의 기분을 긁어 놓은 듯했다. 그래서 마중도 안 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투덜대던 것과 달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67318257599.jpg‘뭐야, 결국 나갈 거면서.’

그의 언행 불일치가 황당했지만, 어쨌든 이제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을 듯하여 쭉 지켜보았다. 그사이 공작은 밖으로 나갔고, 예르타 신성국에서부터 온 마차에 다가갔다. 그러곤…….

16567318257603.jpg“뭘 그리 꾸물거리십니까. 도착했으면 어서 나오시지요, 부인.”

휙, 배려 따윈 전혀 없는 거친 손길로 마차의 문을 열어 버렸다.

16567318257603.jpg“…….”

마침내 마주하게 된 신부의 얼굴을 보고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마차 안에 있던 그녀, 릴리아는 다른 새 신부들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지 않았다.

16567318257638.jpg“흑……. 흐윽…….”

그녀는 물에 젖은 새처럼 작게 웅크린 채, 그렇게 흐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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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새 신부가 우는 얼굴로 집에 도착한다면? 아마 어떤 남자든 딱딱하게 굳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퉁명스럽고 차갑던 공작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16567318257603.jpg“…….”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기만 했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이 먼 타국까지 오게 된 그 가여운 여자를 보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결혼을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걸. ―툭, 투두둑. 안 그래도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16567318257603.jpg“……일단 나오시죠. 남편감이 마음에 안 들어도 한평생 거기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죄책감 때문인지, 아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태도로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퉁명스러운 인상의 남편이 슬쩍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16567318257638.jpg“감사해요…….”

어머니가 눈물을 닦고서 내리자, 곧 공작이 겉옷을 벗어서 그녀의 머리에 씌웠다. 한껏 예쁘게 꾸민 아내의 머리가 빗물에 젖지 않도록 한 작은 배려인 듯했다. 그렇게, 서로를 썩 내켜 하지 않았던 둘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서 함께 성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위이잉……. 거기까지 보았을 즘 구슬이 기묘한 소릴 내더니, 장면을 바꿔서 보여 주었다. 이번엔 침실로 보이는 장소였다. 어머니는 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공작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자세가 익숙하다는 걸 곧 알아챘다.

16567318257599.jpg‘저거, 내가 자주 하는 명상 방법인데? 성력을 키우려는 건가?’

그때 그녀 곁에 서 있던 공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16567318257603.jpg“언제까지 할 겁니까? 이제 홑몸도 아니니까 무리하지 말래도…….”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있어서 언뜻 봤을 땐 몰랐는데, 잘 보니 어머니의 배가 볼록했다. 어머니는 그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16567318257638.jpg“아뇨, 홑몸이 아닐수록 더욱 열심히 해야죠. 이렇게 열심히 명상하다 보면, 저는 아니더라도 우리 아이는 성력을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르잖아요.”

16567318257603.jpg“성력이 없으면 뭐 어때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나면 되지.”

공작이 저런 말을 하다니. 내가 충격에 굳어 있는 사이 어머니가 대답했다.

16567318257638.jpg“제가 그거 말했던가요? 제 어머니께서 저를 임신하셨을 때, 너무너무 행복하셨었대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성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신탁이 내려왔었으니까요.”

어머니는 무덤덤한, 그래서 더욱 서글프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16567318257638.jpg“그래서 어머니는 본인께서 곧 교황감을 낳을 거라고, 그리 믿으셨던 모양이에요. 임신 기간 동안 이런 노력도 안 하고, 사람들의 아부만 받으면서 방탕하게 지냈다고 하셨어요.”

16567318257603.jpg“…….”

16567318257638.jpg“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태어났죠. 성력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테레니아 가문의 불량품’으로 불리는…….”

16567318257603.jpg“부인.”

공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더니,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16567318257603.jpg“옛날 생각은 그만합시다. 이제 부인에게 그런 몹쓸 말을 하는 놈들은 없을 거예요. 그 나쁜 놈들이 입을 뻥긋하기도 전에 내가 흠씬 패 줄 거니까.”

공작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당당하게 그리 말했다. 본인이 그런 말을 했던 놈 중 하나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어머니는 미소 지었다.

16567318257638.jpg“어쨌든, 신께서는 노력하는 이에게만 행운을 주시나 봐요. 그래서 전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고 싶어요. 제 아이가 건강하고, 아름답고, 강한 성력을 지닐 수 있도록.”

16567318257603.jpg“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나랑 같이 합시다.”

16567318257638.jpg“……?”

공작은 이내 어머니의 손을 놓고는 그녀와 똑같은 자세를 한 채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하는 건 줄도 모르면서 자세만 비슷하게 흉내 내는 남편의 모습에 어머니는―

16567318257638.jpg“고마워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위이잉……. 구슬이 아까처럼 기묘한 소릴 내며 다시 장면을 바꿔서 보여 주었다. 새로 바뀐 장면 속에서 둘은 좀 더 나이 든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전 장면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16567318257599.jpg‘이건…… 어머니가 떠났던 날의 기억이겠지……? 동시에 레냐가 태어난 날의 기억이기도 할 테고…….’

과연, 어머니는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엔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그녀를 지키듯 서 있었다. 입을 열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공작이 먼저 말했다.

16567318257638.jpg“니콜라스. 그리고 막시밀리안. 어머니가 너희에게 차례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불렀다. 소란 피우지 말고 들어라.”

그것이 어쩌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두 아들은 안 듯했다. 아직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둘째 오빠, 막시밀리안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닉 오빠 또한 울 듯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마침내 어머니가 힘겹게 움직여서 닉 오빠의 손을 먼저 붙잡았다.

16567318257638.jpg“니콜라스……. 우리 첫째 아들……. 엄마가 더 많이 챙겨 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너무 빨리…… 너무 빨리 철이 들어 버렸어……. 정말…… 정말로 미안해…….”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한데도 닉 오빠는 끝끝내 울지 않았다. 치미는 흐느낌을 끝까지 꾹 참고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16567318318851.jpg“아니요, 어머니는 언제나 제게…… 최고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사과도 하실 필요 없어요.”

16567318257638.jpg“착한 아이……. 내가 없어도 네 동생들…… 막심과 곧 태어날 아이가 항상 웃을 수 있도록…… 잘 챙겨 주렴…….”

16567318318851.jpg“……예, 안심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 되도록, 제가 첫째로서 노력할 테니까요.”

닉 오빠의 대답을 듣고서야 어머니의 얼굴에 안도감이 드리워졌다. 미래를 전부 아는 나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16567318257599.jpg‘본인이 저 때 건넨 부탁 때문에 닉 오빠가 지금도 쓰러질 때까지 노력한다는 걸 알면 하늘에서 엄청 슬퍼하시겠네…….’

닉 오빠가 날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애쓴 건 분명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의 저 짧은 유언이 무거운 사슬이 되어 그를 20년간 얽어맨 셈이었다. 그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면 그녀는 결코 저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을 터.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게 된 그 안타까운 과거를, 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 이번엔 어머니가 둘째 오빠, 막시밀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16567318257638.jpg“막심…….”

16567318257638.jpg“흑……. 히끅! 저 때문이에요? 제가…… 매일 투정 부려서 이렇게 아프신 거예요?”

닉 오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막심 오빠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16567318257638.jpg“잘못…… 흐아아앙……!! 잘못했어요!! 이제 두 번 다신 머리 색 때문에 투정하지 않을게요! 제발…… 제발 가지 마세요!!”

어머니는 슬픔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막심을 보다가, 자신처럼 새빨간 빛을 띠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16567318257638.jpg“아니야…… 막심 탓이 아니야……. 다 엄마의 잘못이야. 다른 아이들처럼 더 투정 부리고 싶었을 텐데, 미안해…….”

그 말을 들은 막심 오빠는 당연하게도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공작이 두 아들을 내보내고, 홀로 아내를 돌보았다. 둘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긴 이별을 앞두고 서로의 모습을 눈에 영원토록 담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16567318257599.jpg“…….”

말없이 기억의 구슬을 천으로 덮었다. 저 뒤에 어머니가 나를 낳고 떠나는 모습까지는 차마 볼 수 없었다.

16567318257599.jpg‘레냐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까?’

지금껏 수도 없이 떠올려 본 물음이다. 그리고 나는 여태껏 그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었다. 레냐가 있었대도 어머니는 결국 병 때문에 떠나셨을 거라고 믿으며. 내가 아무리 레냐의 몸에 빙의한 이방인일 뿐이더라도, 나는 레냐 때문에 어머니가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었다. 그러나 공작의 옛 기억을 보고 난 지금은…… 모르겠다. 레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당연히 알지만, 저런 모습을 본 이상 마음속에 스멀스멀 밀려드는 죄책감까지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을 부분을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16567318257599.jpg“…….”

마침 나 혼자뿐이니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대로 조금만 흐느끼고자 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에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필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16567318359267.jpg“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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