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런 거 나한테만 보여줘2021.07.30.
내가 드레스를 입는 동안 우리 사이엔 침묵만 감돌았다. 그래서일까? 살갗 위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좀 어색하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최대한 빨리 갈아입고자 서둘렀다. 다행히, 새 드레스가 입기에 어려운 디자인은 아니었다. 등과 어깨가 드러나는 형태라 옷 자체에 패드가 붙어 있어서, 다른 속옷을 덧대어 입을 필요도 없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역시 손이 안 닿아…….’
끈이 등 뒤에 붙어 있는 바람에 직접 묶을 수가 없었다. 뒤로 손을 뻗으며 낑낑대다가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 죄송한데 좀 도와주실래요?”
“음?”
“등에 있는 끈을 묶어야 하는데, 손이 안 닿아서요.”
많이 민망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녀도 없고, 등 뒤로 손도 안 닿고……. 다행히 에드는 군말 없이 내 뒤로 다가왔다. 물론 군말 안 했다고 해도 민망스러운 건 변함 없었지만.
‘왜 이렇게 떨리지. 별것도 아닌데.’
그냥 잠깐 도움을 받는 것일 뿐이건만. 내 드러난 등허리 쪽으로 그의 기척이 느껴지자 괜히 입 안이 말랐다. 내 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끈을 붙잡고자 천천히 다가오는 두 손- 그리고, 마침내 끈을 붙잡아서 꽉 당겨 올 때의 압력……. 그 모든 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다시 드리워진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너무 세게 조인다 싶으면 말해.”
“네…….”
나를 배려한 듯, 끈을 당기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압박감 때문에 숨 쉬는 게 힘들진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로 숨이 막혔을 뿐.
‘되게 어색하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아니면 에드도……?’
그가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내 생각은 쭉 이어졌다.
‘역시 그냥 시녀를 부를 걸 그랬나? 하필 뒤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골라서……. 게다가 자세도 좀 묘하고.’
그때 실수인 듯 그의 손가락이 내 맨살 위로 가볍게 스쳤다.
“……!”
긴장한 상태였던 나는 덕분에 움찔, 놀라서 몸을 떨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들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이런 일 한 번도 안 해 보셨을 텐데.”
“죄송할 건 없지. 나 때문에 시녀를 못 부른 거잖아. 그보단…….”
“네?”
“원래는 항상 시녀들에게만 부탁하는 거지?”
시중드는 걸 말하는 걸까?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걸까? 이런저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어쨌든 대답했다.
“네, 보통은요. 아주 가끔, 급한데 시녀들이 주위에 하나도 없을 땐 어쩔 수 없이 하녀나 하인을 불러서 부탁……!! 숨, 숨 막혀요! 살짝 풀어 주세요!”
“……미안. 잠깐 손이 미끄러졌어.”
뭘 어떻게 손이 미끄러져야 사람 허릴 끊어 놓을 기세로 그렇게 세게 당길 수 있느냐고 따지려다 꾹 눌러 참았다. 부탁하는 처지에 짜증까지 부릴 순 없었으니까. 그런 중에도 그는 퍽 무덤덤한 어투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옷 입을 때 남자 도움을 받은 적도 있구나. 난 미래에 결혼할 사람을 위해서 다른 여자한테 함부로 속살 보여 준 적 없는데, 좀 섭섭하네.”
“……네?! 아뇨, 옷 갈아입을 땐 저도 당연히 시녀들에게만 부탁하죠. 제가 말한 건 신발 끈이나 머리 끈이 풀렸는데 시녀가 근처에 없을 때 이야기예요.”
“아아, 난 또……. 다 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고 물을 틈도 없이 그가 거울을 건네주었다. 그것으로 등 뒤를 비춰보니, 정 대칭으로 반듯하게 묶인 리본이 보였다.
‘와……. 손끝 야무진 거 봐. 역시 에드에게 부탁하길 잘했어.’
마치 기계로 묶은 듯 똑바른 리본을 보자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마침 갈 시간도 다 된 듯해서 가자고 말하려던 차, 그가 먼저 내게 자신의 팔뚝을 내밀었다.
“갈까?”
나는 내 쪽으로 내밀어진 그의 팔뚝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굳이 침실에서부터 팔짱 끼고 갈 필요는 없긴 한데…… 그렇다고 거절할 필요도 또 없겠지. 이혼하고 나면 이만한 미남한테 에스코트 받을 일도 별로 없을 테고.’
나는 기꺼이 그의 팔뚝에 손을 올리곤, 옷감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팔근육의 감촉을 마음껏 음미했다. * * * 나는 에드를 곧장 그레이트홀로 데려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파티를 즐기기 전에 먼저 그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그래서 함께 온실에 도착했는데-
‘공작가 사람들 죄다 여기 모여 있었네.’
그곳 온실에선 이미 가문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공작이 꽃을 따다가 파티장을 장식하라고 명령한 듯, 다들 꽃송이를 수백 개씩 나르고 있었다. 다행히 피어난 꽃이 워낙 많아서 그렇게 열심히 따도 나무는 여전히 은하수처럼 반짝이고 있었지만.
“……설마 저거야? 아까 네가 말했던 그거…….”
에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게 제가 키웠다는 그 나무예요. 되게 크고 예쁘죠?”
“…….”
그는 한동안 나무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움직이질 않아서 결국 내가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전하?”
“응, 예뻐. 그보다 어떻게 한 거야?”
“별로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아니었어요. 그냥 성력을 마구마구 불어넣었더니 저렇게 자라더라고요.”
“아아……. 대단하네, 정말로…….”
그는 나무에서 시선을 떼곤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넌 항상 놀라운 것만 보여 주는 것 같아.”
“제가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감탄하시면 안 돼요. 저 나무, 가까이에서 볼 때가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어서 가요.”
그에게 나무를 더 자세히 보여 주고 싶어진 나는 서둘러 그를 그 앞으로 데려갔다. 나무 바로 앞에 서자, 마침 그곳에서 사용인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던 공작이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에드가 나타나니 놀란 듯, 그는 이내 짧은 물음을 흘렸다.
“……뭐지?”
공작이 에드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환영해 줄 거라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그렇다지만 첫마디가 ‘뭐지?’라니……. 그걸로도 퍽 무례한 행동인데, 거기에 더해서 공작은 에드에게 따져 물었다.
“들어오는 걸 못 뵌 것 같습니다만?”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정문 말고, 곧장 레냐 방 창문으로 방문했거든.”
“…….”
“워낙 빠르게 움직여서 성 경비병들도 못 봤을 거야.”
거기까지 설명해도 공작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평소에도 저 주름이 펴지는 모습은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공작은 그리 인상을 팍팍 쓰면서 에드를 타박하려 했다.
“아직 혼인식을 올리기도 전입니다. 물론 혼인식을 올리고 난 후에도 공작가에 방문하실 땐 응당…….”
“저기, 아버지?”
내 부름에 공작이 하던 말을 멈췄다. 그 틈에 나는 에드의 예비 아내 된 사람으로서, 그를 조금 두둔해 주었다.
“전하께선 제가 오는 길에 위험해질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셔서 어쩔 수 없이 그러신 거예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
“부탁드릴게요, 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에드에게 뭐라도 한소리 하고파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네가 그렇다면, 뭐…….”
예전처럼 투덜대지 않고 그는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에드를 향한 미미한 짜증은 남아 있었던 듯, 그가 슬쩍 덧붙였다.
“오늘은 사정이 있었으니 별말씀 안 드리겠습니다만, 다음부턴 꼭 정문을 이용해 주십시오, 전하.”
그때, 짓궂은 미소가 에드의 입가에 번져 갔다. 에드를 그간 쭉 지켜봐 온 바, 저건 분명 장난기가 솟았을 때의 미소였다. 역시나 그는 퍽 불길한 소릴 내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지요, 예비 장…….”
다행히 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 전, 내가 더 먼저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텁! 막을 수 있었다.
“쉿. 아직 안 돼요. 벌써 예비 장인어른이라고 하면 아버지 충격받으신단 말이에요.”
“그래? 아쉽네. 분위기 좋길래 이참에 호칭을 바꿔 볼까 했는데.”
내 예상대로 그는 ‘예비 장인어른’이라고 공작을 부르려 했던 게 맞았다. 그러기 전에 내가 막아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에드에게 알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야 해요.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까.”
“참 섬세하구나, 공작은.”
본의 아니게 공작에게 섬세한 이미지가 생기게 됐지만…… 뭐 어떤가. 따지고 보면 공작에게 어느 정도 섬세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사이 공작이 에드를 향해 짧게 인사를 남겼다.
“그럼 저는 연회 주최자로서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전하께선 레냐와 함께 시간 맞춰서 오십시오.”
“그러지.”
“흠흠,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아직 혼인 전이라는 것을 ‘반드시’ 숙지하시어, 젊은 혈기에 부적절하게 사로잡히는 일 또한 없도록 ‘반드시’ 조심해 주시길…….”
“물론.”
“…….”
마지막까지 에드를 노려보다가 그레이트홀로 향하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연회 시작하려면 약 30분 정도 남았으려나? 그전까지 나무 앞에서 좀 노닥거리다가 들어가면 되겠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나무 아래의 벤치로 에드를 이끌었다. 그 후에 어떠한 불건전한 일이 발생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 * 온실에 있는 건 자신과 에드, 그리고 일하는 사용인들뿐이라고 레냐가 생각하고 있을 즘. 나무의 다른 쪽 반대편에서는 루카스가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이었을 줄이야…….’
공작의 온실에 이 나무, ‘팔라레온’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땐 믿지 않았었다. 그가 알기로 팔라레온은 오직 예르타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공작가 시종이 제게 파티 초대장을 건네주었을 때도 의심의 시선을 보냈었다.
“20년간 싹트지 않던 팔라레온 나무가 싹튼 걸 기념하는 파티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묻기 조심스럽지만…… 혹시 팔라레온 나무가 정확히 뭔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시종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요, 기사님. 팔라레온 나무가 ‘확실히’ 맞습니다. 레냐 아가씨께서 성력을 불어넣어서 씨앗이던 것을 하루아침 만에 엄청난 거목으로 키워 내셨다고 합니다.”
“그 가냘픈 영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기는요. 연회에 오시면 활짝 핀 팔라레온 꽃이 테이블마다 놓여 있을 테니 와서 직접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공작가의 시종은 연회 초대장을 주고 떠났다. 하지만 루카스는 궁금한 걸 참고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없었고, 결국 먼저 온실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의 편협함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실이었군.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가.’
사실 체격과 성력은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기는 했다. 그걸 루카스 또한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레냐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귀족 영애 특유의 그 가느다란 체구 속에 이만한 힘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퍽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루카스 자신이 한 손으로도 양 손목을 거뜬히 모아 쥘 수 있을 듯했던, 레냐의 그 가느다란 손목을 떠올려 보고 있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마침 그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그건 진짜로 안 돼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그런…….”
레냐의 목소리에 왜인지 난색이 서려 있었다. 곧 그녀의 대화 상대인 듯한 사내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아니면 혹시…… 나를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걸 부끄러워하는 거지?”
“네?! 아니, 왜 또 말이 그렇게 흘러가요?! 그리고 어느 누가 전하를 부끄러워하겠어요? 그건 정말 얼토당토않은…….”
“그럼 내 부탁대로 해 줘.”
“으으음…….”
앞뒤 내용을 못 들은 탓에 루카스가 대화의 전체를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웬 불량한 놈에게 난감한 부탁을 강요받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