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지금 하고 싶은 거지?2021.08.06.
급하게 준비된 연회인 만큼, 몬트가에 충성하는 세 가문만이 그곳 연회에 초대받았다. 첫 번째 가문은 공작령의 남부에 위치하는 ‘셰인츠 후작가’였고, 두 번째 가문은 그 옆에 위치하는 ‘페오르트 백작가’였으며, 마지막 가문은 공작령 서쪽에 위치하는 ‘헤를리 자작가’였다. 다만 각 가문의 가주뿐 아니라 그에 소속된 인원들이 죄다 딸려 온 까닭에, 가문 수에 상관없이 연회장 내부는 인파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목적은 모두 같았다.
‘레냐 아가씨가 결혼을 한다고? 거기에 신랑감이 에이드리언 황자 전하라고?!’
공작으로부터 받은 연회 초대장에 적혀 있던 그 이름, ‘에이드리언 폰 베르크’를 똑똑히 보고도 그들은 제 눈을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직접 진위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연줄도 만들고자 연회장까지 열심히 달려온 것이었다. 물론 잘 안 핀다던 꽃이 피었다는 얘기도 초대장 구석에 작게 적혀 있긴 했지만…… 그보단 결혼 얘기가 더 흥미로운 주제임은 분명했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그토록 다 같은 마음으로 오늘의 주인공 레냐를 기다리던 때. 세 가주들 중 한 명인 페오르트 백작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작았던 레냐 아가씨께서 결혼이라…….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군요. 게다가 상대가 에이드리언 황자 전하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헤를리 자작이 이어서 맞장구쳤다.
“정말로 놀랐습니다. 처음엔 제 눈이 노안으로 흐려져서 글을 잘못 읽은 줄 알았지요, 허허. 어찌하다가 그렇게 연이 닿은 것입니까?”
공작은 그에 심드렁히 대답했다.
“연이랄 것도 없소. 죽어도 결혼만은 안 하겠다고 버티던 아이가 갑자기 황자 전하와 혼인하고 싶다고 하니, 그냥 아비로서 그 뜻에 따라 준 것이지.”
공작의 대답을 들은 페오르트 백작과 헤를리 자작은 차례로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다.
“오오, 아가씨께서 전하를 운명의 짝으로 느끼셨나 봅니다.”
“운명이라, 이것 참 가슴 뛰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백작과 자작, 그 두 중년은 호탕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함께 앉아 있던 셰인츠 후작만은 그리 기뻐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루아침 만에 덜컥 결혼을 해? 내 아들들한텐 눈길도 안 주던 것이…….’
대략 10년 전쯤부터였다. 그가 자신의 세 아들들 중 하나를 레냐와 이어 주는 꿈을 꿔 온 것은. 하지만 아들들이 그녀에게 아무리 값진 선물을 가져다 바쳐도, 아름다운 시를 써서 줘도, 그녀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을 안 줬었다. 게다가 구애를 거절하면서 댄 핑계조차도 퍽 황당했다.
“저는 제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분께서 곧 저를 데리러 오실 테니까, 다른 분은 만날 수 없어요.”
그런 황당한 소릴 하길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덜컥 정략결혼을 한다고 알려 온 것이다. 덕분에 셰인츠 후작과 그 아들들의 자존심은 회복 불가능으로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공작성 밖으론 나오지도 않는 음침한 성향에, 정령 소환도 남들 다 할 때 못 한 주제에 쓸데없이 눈만 높아서는……. 쯧, 보나 마나 황자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서 한 결혼이겠지.’
2황자가 잘났다는 소문은 그들의 터전인 북부까지 퍼져 있었다. 듣기론 얼굴도 잘나고, 영리하고, 거기에 무예에도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해 레냐는 어떠한가. 후작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레냐는 사랑을 못 받아서 소심하고 음침한 기운을 풍기던 어린애였다. 물론 얼굴은 그때에도 꽤 예쁘장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후작은 확신했다. 이 결혼은 에이드리언 황자에게 반한 레냐가 비굴하게 매달려서 추진한 결혼일 것이라고.
‘황자는 황실에서 입지가 약하니 뒷배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승낙했을 테고……. 쯧쯧, 남편한테 냉대받으며 서럽게 살아가는 꼬라지가 안 봐도 훤하구먼. 그러게 그냥 우리 아들 중 하나랑 결혼했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을…….’
후작은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물론 어디까지나 ‘속으로’였다. 그는 공작의 시선이 제게 닿자마자 제 시커먼 속내를 환한 미소로 감췄다.
“두 분 다 워낙에 미남, 미녀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한 쌍이 될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다른 두 가주들이 “그렇지요!” 하고 껄껄대는 걸 보고서야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공작가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감히 제 비틀린 속내를 드러낼 순 없는 일이었다. 그저 속으로만 실컷 욕을 하며, 레냐가 부디 전보다 못생겨졌길 기도할 뿐. 셰인츠 후작이 그리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때, 마침 문이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들이 연회장에 들어섰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고, 셰인츠 후작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럴 수가!”
레냐를 본 순간, 낭패감을 느낀 후작은 속내를 감춰야 한다는 것조차 까먹고서 그리 외쳐 버렸다.
‘저게…… 저게 그때 그 음침한 꼬마라고……? 못생겨지기는커녕 오히려…….’
오히려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 즉시 질투, 후회, 아쉬움 등의 온갖 감정들이 후작의 속에서 휘몰아쳤다. 애타게 노력했어도 손에 넣지 못한 보석이 끝내 타인의 것이 됐을 때 느껴질 법한 감정들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며느리로 들였어야 했는데……!!’
몬트 공작가의 아가씨라는 점도 그렇지만, 저런 아름다운 외모라면 어디 가서 내세우기도 좋았다. 물론 그녀에게서 태어날 손주의 얼굴도 기대해 볼 만했을 것이고. 그러나 이미 늦은 듯했다.
‘설마 옆에 서 있는 저 훤칠한 은발 남자가 그 에이드리언 황자인가? 오늘 나온다는 얘긴 못 들었지만 생긴 걸 보니 맞는 것 같군, 망할…….’
연인이 없어도 될까 말까 한데, 레냐는 연인을 넘어서 저렇게 훤칠한 약혼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약혼자의 반대편엔 또 다른 훤칠한 남자가 그녀를 에스코트하듯 서 있었다. 옷차림만 대강 보아도 꽤 고위급의 신성 기사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한 자였다. 아비 된 자로서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아들들은 저 남자들과는 상대가 안 될 듯했다.
‘망할…….’
그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후작은 절망하기 바빴다. 그 탓에 모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턴지 그의 주위가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해져 있다는 것을.
“…….”
그제야 정신이 든 후작은 천천히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 그의 옆에서는 역시나, 어느 짐승이 당장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살기를 풍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공, 공작…… 공작 각하…….”
그레이트홀에 내려앉은 숨 막히는 침묵의 원인은 공작이었다. 그가 후작을 향해 드러내는 살기에, 다른 두 가주들은 물론이고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살기의 표적이 자신이라는 걸 안 후작은……. ―쨍그랑! 들고 있던 물잔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고요 속에서 홀로 울려 퍼지는 그 소음이 퍽 소름 끼쳤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곧 이어진 공작의 음성에 비교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네, 썩 기뻐 보이는 얼굴은 아니군. 내 딸아이에게 어떤 유감이라도 있나?”
“……그, 그것이…….”
머리가 굳으니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공작이 20여 년 전 마족들을 상대로 드러냈던 것에 버금가는 이 살기는, 감히 한 명의 인간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수준의 것이었다. 대답을 잘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도 말이 안 나와서 곤혹스럽던 차―
“아버지.”
어느새 다가온 레냐가 공작의 앞으로 반짝이는 꽃 한 송이를 불쑥 내밀었다. 얼결에 꽃을 받아 든 공작에게 그녀는 자신이 건넨 그 꽃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즐거워야 할 날이잖아요.”
즐거워야 할 날이니 분위기 망치지 말라는 타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은 숨을 헉, 들이쉬었다. 저토록 분노한 공작에게 성질 죽이라는 식의 말을 하고도 무사할 만한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러나 상황은 그들이 걱정했던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렇지. 네 말이 옳다.”
그는 레냐의 한마디에 살기를 거두고서 진정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건넨 꽃을 보란 듯 제 외투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모두가 멍해질 만한 모습이었다. 다만 아까부터 살아날 구멍만을 애타게 찾고 있었던 후작만이 그 상황에서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레냐는 그 인사에 그저 말없이 웃어 주곤 본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휴…….”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무심결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무겁게 침묵이 가라앉았던 홀에 다시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차올랐다. * * * 지정석에 앉으며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왜 내 주변엔 폭발 1초 전인 시한폭탄 같은 인간들만 있지……?’
에드랑 루카스가 충돌하지 않도록 간신히 중재해서 데려온 게 조금 전이다. 그런데 그레이트홀에 들어오니, 이번엔 공작이 살기를 풀풀 풍겨 대는 것이다. 그냥 뒀으면 그는 또 폭주 상태에 들어섰을 터…….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꽃 덕분에 그가 쉽게 진정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공작 탓만 하기가 좀 그러네. 내 생각대로 저 사람이 셰인츠 후작이라면 분명 먼저 말실수를 했을 테니까.’
원작에 나온 셰인츠 후작은 제 아들들 중 하나를 레냐와 결혼시키려고 집요하게 시도했다가 실패한 자였다. 그래서 겉으론 공작가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속으론 이를 갈았다는 서술을 읽은 기억이 났다. 자식들끼리 결혼시키자는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공작을 원망하고, 아들들의 청혼을 직접적으로 거절한 레냐를 증오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에드와 함께 연회장에 입장했을 때 그가 보였을 반응이야 뻔했다.
‘쯧, 어쨌든 공작이 그렇게 째려봤으니까 저 인간도 생각이란 게 있으면 마음 고쳐먹겠지. 애초에 청혼을 거절했다고 앙심 품는 게 말이나 되냐고……. 싫다고 하면 당연히 수긍하고 물러나야지.’
내가 그렇게 속으로 혀를 ‘쯔쯔’ 차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에이드리언 전하와 몬트 공작 영애를 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곤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건 약소한 물건이지만…….”
그리 말을 줄이면서 다들 뭔가를 내밀었는데, 정작 내민 물건은 전혀 약소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페오르트 백작가의 장녀라는 여자가 내민 선물을 즉시 거절했다. 물론 선물을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 선물이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면? 절대로 냉큼 받아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부담스러운 선물도 정도가 있지……!’
상대방이 무리해서 준비했을 게 뻔한 선물을 받아먹을 만큼, 내 양심은 그렇게 털이 수북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했는데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이런……. 아가씨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딱 어울리는 목걸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다른 보석을 원하시면…….”
“아뇨! 보석은 괜찮아요. 그냥 약간의 정성이 들어간…… 아니지, 그냥 아무것도 안 주셔도 돼요. 진심 어린 축하의 말씀을 해 주셨잖아요.”
약간의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지금 그녀의 태도를 봐서는 그 ‘정성’ 어린 선물을 준비한답시고 또 무리를 할 것 같았으니까. 결국 알겠다고 말하고서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실과 연을 이어 보려고 다들 노력하는구나.’
그들의 선물이 일종의 뇌물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았다. 순수한 호의로써 주는 선물이라기엔 지나친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니 무언가를 바라며 건네는 것일 텐데, 그들이 내게서 바랄만한 건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에드는 이 사람들이 이만큼 애쓰는 게 자기 때문이란 거…… 당연히 알려나? 눈치가 빠른 편이니까. 지금쯤 저 중에서 누가 쓸 만한지 가늠해 보고 있을지도…….’
비록 사생아라고는 해도 고귀한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상, 이곳 사람들에겐 최고의 연줄로 보일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속내를 감추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그의 시선도 내게로 향해 왔다. 내 시선을 느낀 듯했다.
“…….”
에드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나를 보더니, 무언가 알아낸 것처럼 ‘아-’하는 소릴 냈다. 부드러운 미소로 젖은 그의 입술이 이윽고 내 귓가로 다가왔다.
“날 그렇게 애타게 쳐다보는 거 보니까…….”
“……?”
“지금 하고 싶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