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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먼저 원했으면서! (38/102)

38. 먼저 원했으면서!2021.08.10.

겉으론 부드럽게 웃고 있어도 속으론 냉철하게 사람들을 분석 중일 줄 알았건만……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에드가 내 귓가에 속삭인 것은 뜬금없게도 ‘그 스킨십’에 대한 것이었다. 덕분에 황당해진 나는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16567319443325.jpg“안 해요. 키스는 결혼식 때만 할 거예요.”

16567319443332.jpg“역시 내가 부끄러운 거구나…….”

16567319443325.jpg“그렇게 말씀하셔도 이젠 안 통해요. 안 하기로 이미 마음 굳혔으니까.”

아깐 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쩔쩔맸지만, 생각해 보니 거절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진 않을 듯했다. 그 또한 진짜로 스킨십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일 테니까. 그때 선물을 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차례로 목소리를 냈다.

16567319443342.jpg“이번엔 제 성의도 한번 봐 주시지요.”

16567319443342.jpg“저……. 두 분께 드리려고 2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번 봐 주시면 안 될까요?”

16567319443342.jpg“제 것도 봐 주세요! 제가 뭘 준비했는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내 쪽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릴 것처럼 점점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16567319443325.jpg‘으으, 이 많은 선물을 다 어떻게 거절하지……? 그보다 왜 전부 이쪽으로만 오는지 모르겠네. 싹이 튼 걸 축하하는 파티랬으니까 한두 명은 공작한테 갈 만도 한데…….’

내 ‘결혼’이 아니라 ‘씨앗’이 싹튼 것을 축하하는 파티라고, 공작은 말했었다. 그럼 응당 파티 주제에 따라서 공작에게 가야 할 게 아닌가. 꽃피운 걸 축하한다고 인사하려면 말이다. 한데 사람들은 파티 주제를 착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죄다 내 결혼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을 슬쩍 봤더니, 그는 어딘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16567319443325.jpg“……?”

퍽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6567319443325.jpg‘무슨 핑계를 대야 여기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대로면 선물을 거절하느라 탈진해 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매의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를 부축해 준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불행히도 아직 파티 초반이라 취한 이는 없었다. 대신 나는 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16567319443325.jpg“잠깐만요. 닉 오빠가 없는 것 같지 않아요……?”

내 물음을 들은 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67319443332.jpg“그러게? 나도 들어올 때부터 못 본 것 같아.”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더 멀리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닉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닉 오빠도 거기 있나 했는데, 잘 보니 루카스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잘생긴 신성 기사와의 금지된 사랑을 꿈꾸는 어린 영애들이 그를 바글바글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여하간 오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안 보여서,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16567319443325.jpg‘설마…… 방에서 또 일하고 있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오늘 같은 날마저 집무실에 박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작은 섬 따위가 뭐라고.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그 섬보다는 차라리 그의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나는 더 듣고 싶었다.

16567319443325.jpg“저 잠깐 오빠한테 다녀올게요. 오빠가 또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없는 동안 사람들 좀…….”

16567319443332.jpg“싫어.”

사람들 좀 상대해 달라고, 에드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기도 전에 그는 웃는 낯으로 단호히 내 부탁을 거절했다. 당황해서 굳어 있는데, 그사이 그가 힘이 들어간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얽어맸다.

16567319443332.jpg“저번에도 그렇게 부탁해서 믿고 보내 줬지. 그런데 넌 영영 못 돌아올 뻔했고.”

그는 섬세한 손길로 내 잔머리를 쓸어 넘겨 주곤, 그 아래에 있던 귀에 속삭였다.

16567319443332.jpg“그때 그 기분 또 느끼기 싫어. 오늘은 얌전히 내 옆에만 붙어 있어 줘.”

어느샌가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들어와 있었다. 곱고 섬세한 손가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잡혀 보니 도저히 내 힘으로 풀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 그가 싫다기보단…… 조금 가엾다고 생각했다.

16567319443325.jpg‘이시스가 그렇게 돼서 충격이 컸나 보네. 이런 투정을 다 부리고.’

나를 향한 이 집착은 제 사람을 다시 잃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일 것이었다.

16567319443325.jpg‘안심시켜 줘야 하나?’

나는 이시스처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16567319443325.jpg“전하, 제가 이 성안에서 저번처럼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제 의지로 전하를 떠날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요.”

16567319443332.jpg“그걸 어떻게 증명…….”

장난스러운 어투로 이어지던 그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내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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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세계에서 부부간에 이 정도 가벼운 접촉은 너무도 흔했기에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에드는―

16567319443332.jpg“…….”

본인이 먼저 입 맞춰 달라고 그렇게나 졸랐으면서, 정작 진짜로 해 주니 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을 뿐. 덕분에 나는 조금 멋쩍게 웃게 되었다.

16567319443325.jpg“증명받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증명해 드렸어요.”

16567319443332.jpg“…….”

16567319443325.jpg“……괜찮죠?”

16567319443332.jpg“응…….”

어느새 나를 붙들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풀려 있었다.

16567319443325.jpg‘역시 통할 줄 알았어.’

입을 맞춰도 코웃음이나 흘리면 어쩌나 살짝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는 온순해졌다.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결혼식 때도 해야 하는 거,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이렇게 먼저 해 버리면 그에게 더 큰 신뢰를 줄 수 있으니 결국엔 손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닉 오빠가 걱정돼서 가봐야겠다고 양해를 구하며 일어났다. 동시에 허리를 굽혀서 에드에게 속삭였다.

16567319443325.jpg“만약 혼자서 사람들 상대하기 힘들면 알렉시스에게 가 보세요. 자책하느라 파티에도 안 나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16567319443332.jpg“알렉시스가?”

16567319443325.jpg“네, 전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괜찮다고 말해 주면 더 금방 회복될 거예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였다.

16567319443325.jpg“괜히 너무 몰아붙이거나 하지는 마세요. 알렉시스는 그냥…….”

16567319443332.jpg“알아. 이시스에게 조종당했을 뿐이라는 거. 나도 심하게 굴 생각은 없었어. 좀 말이 많아서 귀찮긴 해도 나름 정이 가는 녀석이라.”

그는 거기에 더해서 나를 안심시켰다.

16567319443332.jpg“내가 잘할게. 걱정하지 마.”

에드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알렉시스에게 못되게 굴 일은 없을 터.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 * * 레냐가 자리를 뜨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 또한 테라스로 나갔다. 시끄러운 소리도, 사람들의 관심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생애 첫 입맞춤의 감촉이 아직도 그 위에 선명했다.

16567319443332.jpg“…….”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저 붉은빛을 띠는 살덩이에 불과한 것이 이런 감각을 새겨 주리라는 건. 열기를 품은 채 부드럽게 뭉그러지던 입술의 감촉은 그에게 퍽 새로운 자극이었다. 까닭에, 하마터면 마음 기저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일깨워질 뻔했다.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짙다고 알려진, 마족의 소유욕과 육욕이……. 그가 레냐 앞에서 간신히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던 건, 먼 과거에 어머니가 남긴 말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16567319443342.jpg“명심하렴. 마족들의 욕망은 인간의 그것과 달라. 더 강력하고, 그래서 더 위험하단다. 너도 마족의 피를 이었으니 그 감정을 누를 줄 알아야 해.”

  어머니가 아직 살아서 황제의 새장 안에 갇혀 있을 적에 에드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 당시 어렸던 에드는 인간과는 다른, 마족 특유의 거친 감정들을 다루는 데 서툴렀었다. 또한, 그로 인해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었다. 그날도 그랬다. 쭉 길러 오던 연노란색 카나리아 ‘레몬’의 노랫소리를 듣다가 그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그 감정이 격해져서 한순간 마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 연약한 레몬은 그에게서 나온 강력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16567319443332.jpg“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젠 안 그럴게요…… 제발 레몬을 다시 살려 주세요…….”

16567319443342.jpg“한 번 죽은 것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처음부터 조심하는 수밖엔 없지.”

  황제에게 구속된 상태에서도 에드에게만은 항상 다정했던 어머니였는데, 그날만은 몹시도 엄했다. 다른 부모들이 애완동물의 죽음을 목격한 자식들에게 하는 거짓말…… 예컨대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 거라든가, 더 좋은 곳에서 환생할 거라든가 하는, 그런 하얀 거짓말조차 해 주지 않았다. 한 번 죽은 것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차가운 진실만을 알려 주었을 뿐. 다만,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16567319443342.jpg“지금은 괜찮아. 천천히, 차근차근 그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렴. 두 번 다신 통제력을 잃지 않도록.”

16567319443332.jpg“만약…… 만약 제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요……?”

16567319443342.jpg“배우지 못하면…….”

  여태껏 보여 준 적 없는 어두운 얼굴로, 그녀는 에드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다음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보여 주었다. 그때까지도 에드는 몰랐었다. 자신이 죽은 카나리아를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어머니가 손가락을 펴 주고 나서야 보게 된 죽은 새는, 이미 형태를 알기 어려울 만큼 뭉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보여 주며 어머니는 속삭였다.

16567319443342.jpg“자제하는 걸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꽉 움켜쥔 네 손 안에서 부서지고 말 거란다.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물건이든, 혹은 사람이든 간에…….”

  워낙 오래전 일이기도 했고, 또 그때 이후로는 마력 통제에 실패한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아까 위험하던 차에 마침 그 얘기가 떠오른 것이었다. 덕분에 진정할 수 있었다.

16567319443332.jpg‘통제력을 잃어선 안 돼. 그것도 그런 별것 아닌 자극에는…….’

고작 새 한 마리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던 철부지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그런데도 어린애처럼 통제를 잃을 뻔한 게 그는 조금, 수치스러웠다. 그 수치심에 애꿎은 입술만 잘근 씹어 대던 때였다.

16567319512611.jpg“전하……!”

테라스의 문이 열리더니, 알렉시스가 불쑥 나타났다. 에드가 파티장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급히 달려온 듯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 불쑥 들어온 게 무례하긴 했어도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마침 에드 또한 그 사건에 관해 얘기하고자 알렉시스를 찾아가려던 차였으니까.

16567319443332.jpg“들어와. 소리 새나가니까 문은 닫고서.”

16567319512611.jpg“……예.”

알렉시스가 테라스에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소란하던 연회장의 소음이 차단되고, 그들이 선 테라스는 싸늘하리만큼 고요해졌다. 그 틈에 에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16567319443332.jpg“레냐한테서 대충 들었어. 이시스의 저주에 걸렸었다고.”

16567319512611.jpg“……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명백한 제 실수이니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부 달게 듣겠…….”

16567319443332.jpg“됐어. 따져 보면 그 자식의 수작을 빨리 눈치 못 챈 내 잘못도 있으니까.”

16567319512611.jpg“……?!”

알렉시스는 충격받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곤 에드를 살폈다. 꼭 환청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조금 기분 나빠진 에드는 난간에 기댄 채로 삐뚜름하게 물었다.

16567319443332.jpg“왜.”

16567319512611.jpg“놀랐……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은…….”

알렉시스는 에드가 부하의 실수에 관대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크게 깨질 걸 예상했고, 그렇다 하더라도 감내하겠다는 결심도 했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너그러운 말을 듣게 되니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드로서는 ‘내가 그만큼 악독해 보였던 건가-’라고, 새삼 자신의 이미지를 되돌아볼 만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16567319443332.jpg“내 약혼녀가 그러던데. 네 잘못 아니니까 너무 심하게 굴지 말라고.”

16567319512611.jpg“……레냐 아가씨께서요?”

알렉시스는 한순간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레냐는 알렉시스 자신이 한심하게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한 당사자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에드에게 용서를 직접 부탁했다니…….

16567319512611.jpg“그분께서는 어찌 그리-.”

감정이 북받쳤던 까닭에 알렉시스는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16567319443325.jpg“알렉시스가 죽어도 제겐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살아서 계속 저를 도와주시는 게 저로서도 훨씬 더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일은 알렉시스가 잘못한 게 ‘절대!’ 아니니까요.”

  자신이 폭주했을 때 레냐가 건넸던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16567319512611.jpg‘어찌 그리 강하시고, 아름다우시고, 그리고…… 내게 따뜻하신지…….’

레냐를 떠올리며 그는 손톱이 손바닥을 아리게 파고들 때까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정신이 돌아온 건 상상 속 레냐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싸늘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을 때였다.

16567319443332.jpg“알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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