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빼앗길 것 같아서 초조해2021.08.13.
알렉시스를 부르는 에드의 목소리가 얼음을 깎아 만든 송곳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덕분에 알렉시스는 곧장 상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하게 된 현실에선-
“……!!”
에드가 살의나 다름없는 기운을 드러내며, 알렉시스 자신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한순간이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잊은 채 검을 뽑을 뻔했다. 기사로서 단련된 감과 본능이 지금 순간에도 그에게 강력히 경고하는 중이었다. 네 눈앞의 이것은 지독히도 위험한 마족이며, 살아남으려면 당장 베거나 도망쳐야만 한다고. 알렉시스의 속이 그토록 싸늘하게 얼어붙어 갈 즘. 반대로 에드의 속에선 뜨거운 분노가 지글거리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으로, 저런 목소리로 레냐의 이름을 부르지? 왜……?’
레냐의 이름을 부르는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퍽 부드러웠다. 눈빛은 또 어떤가. 당장 그녀를 안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짙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눈치가 둔한 자라도 그가 레냐에게 품은 감정을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에드는 그렇지도 않았다. 덕분에 제 부하가 감히 본인의 약혼녀에게 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불유쾌한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간신히 억눌렀던 ‘그 감정’이 더욱 강렬하게 솟아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번엔 이시스가 노리더니, 이번엔 이 녀석이……. 주위에 내 것을 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
간신히 얻어 낸 약혼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에, 심장의 박동이 차츰 빨라졌다. 물론 이 지독한 소유욕이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았다. 몸에 흐르는 마족의 피가 자신을 충동질하고 있을 뿐임을 알지만, 별 도리는 없었다. 어디에서 기인했든 이미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감정이었다.
‘빼앗기기 전에 더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나……?’
단순히 계약 결혼으로 묶인 관계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녀의 몸과 마음마저도 확실하게 복속시켜야만 그녀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그는 아끼던 카나리아를 잃었던 그때보다도 더욱 힘껏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전, 전하?! 고정하십시오!”
에드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진 것을 느끼고서 알렉시스가 그리 외쳤다. 그가 마족 혼혈인 것을 아는 킬리안과 달리 알렉시스는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고, 갑자기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 에드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에드는 제 속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며 알렉시스를 향해 일렀다.
“그래, 네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어. 저번 일은 어디까지나 이시스의 죄니까.”
“감사합…….”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라는 것도 알아 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겠지?”
“…….”
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제 입술을 한껏 짓이겨 물었다. 에드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레냐의 이야기를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깨달은 까닭에.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레냐가 아무리 좋더라도 감히 마음을 품을 순 없었다. 그녀의 상대는 이미 정해졌고, 그런 그녀에게 마음을 품는 건 그의 기사도가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 부정한 짓거리였다.
“…….”
알렉시스가 그리 대답한 이상 허튼짓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에드도 말없이 몸을 돌렸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을 해결하러 가야 할 때였다.
‘서둘러야지……. 서둘러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테라스를 나서는 그의 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급했다. 통제력을 잃어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충고도, 이미 그 순간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채였다.
* * *
‘역시 집무실에 있었네.’
나는 예상대로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닉 오빠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몸 좀 그만 혹사하라고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충고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그의 책상을 쾅! 칠 수는…… 당연히 없었다. 나는 그저 그와 마주 본 채, 조곤조곤 부탁했다.
“오빠……. 전에도 말했지만 난 오빠가 나 때문에 무리하는 게 정말로 싫어. 특히나 오늘은…… 오늘만은 오빠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쉬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단 말이야.”
말을 마친 뒤, 올 때 가져온 팔라레온 꽃을 그의 책상 화병에 살며시 꽂아주었다. 그는 깊어진 눈길로 어머니가 남긴 그 분홍색 꽃을 보다가 한참 뒤에야 눈을 뗐다. 그러곤 비로소 어머니가 남긴 또 다른 분홍색을…… 즉,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냐, 나는 반드시…….”
“알아. 나를 잘 돌봐 줘야만 하겠지. 떠나시는 어머니 앞에서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아버지께서 보여 주셨어.”
그는 멍하니 있다가,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봤구나, 그 기억…….”
그는 공작이 기억의 구슬 속에 그때의 순간들을 담아 놨단 걸 이미 알았던 것 같았다. 무엇을 봤는지 더 묻는 대신 내게 이해를 요구했다.
“그럼 이제 너도 내 마음을 알겠지. 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첫째로서 책임을 다해야 해.”
“정말로 어머니를 위해서야?”
“……?”
“어머니가 하신 말씀 잘 떠올려 봐. 쓰러질 때까지 일해서 비싼 선물을 사 주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기억을 봤다. 그래서 그녀가 닉 오빠에게 한 말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닉 오빠는 본인이 20년 전에 들은 말을 떠올릴 수 있을까? ―라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머니의 유언을 정확히 말해 주었다.
“……아니. 항상 웃을 수 있게끔 잘 돌봐 주라고 하셨지.”
“그럼 이제 내 얼굴 똑바로 봐봐. 내가 웃고 있는지.”
나는 손끝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웃음은커녕, 그를 향한 걱정으로 잔뜩 구겨져 있을 내 얼굴을.
“오빠가 계속 무리하면 웃고 싶어도 웃을 수가 없잖아. 결국 오빤 어머니 부탁을 정반대로 실천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잠깐 멈추고서 숨을 진정시켰다. 문득 슬픔이 치민 것이다.
“정말로 어머니를, 그리고 나를 위한다면 이러지 마.”
왜인지 말을 마치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나는 급히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젖은 눈가를 가렸다. 그래도 목소리에 묻어 나온 슬픔까지는 가릴 수가 없어서, 닉 오빠도 금방 내 상태를 알게 되었다.
“레냐? 이런…….”
그가 곧장 내게로 와서 나를 끌어안고 달랬다. 그 품에 안긴 채, 나는 잠깐 고민했다.
‘울 생각까진 없었는데, 내가 자꾸 왜 이러지……?’
기억의 구슬을 봤을 때부터 의아했던 점이다. 나는 분명 레냐가 아니고, 레냐의 몸에 빙의한 제삼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꼭 내 자신이 레냐가 된 것처럼 가족들을 향한 애정과 서글픔 등의 감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몸속에 레냐의 영혼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사이 닉 오빠가 부드러이 내 등을 토닥였다.
“그만 울어. 이런 좋은 날에 울면…….”
“어떻게 안 울어! 어머니도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는데, 오빠까지도 나 때문에 쓰러질 만큼 고생하고 있잖아……! 전부 나 때문에…….”
나를 토닥여 주던 그의 손이 한순간 멈췄다. 그는 당혹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침묵을 흘렸고, 곧 단호한 목소리로써 스스로 그 침묵을 깨트렸다.
“이미 수백 번 말했지만, 원한다면 수천 번 더 말해 줄게.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기억을 봤다면 알잖아, 어머니께서 어떤 모습이셨는지. 이미 병색이 짙으셨어.”
“…….”
“그리고 내가 무리하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야. 그냥 내 미련 때문이었지.”
그가 나를 품에서 살짝 떼어 내는가 싶더니 이윽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네 말이 다 맞아. 어머니 말씀대로 널 웃게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반대로 했나 봐. 어머니와 네게 못 해 준 게 너무 많아서……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좀 더 가벼워질 것 같았던 거겠지.”
“…….”
“결국은 전부 나를 위해서였던 거야. 내 미련을 지우려고, 내가 만족하려고…….”
마주하고 있는 그의 시선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미안해, 레냐. 그런 생각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정말로…… 이젠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무리도 안 하고, 연회장에도 같이 내려가자.”
“……그럼 그 섬인지 뭔지 하는 것도 안 살 거지?”
내 예상과 달리 알겠다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난감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그건 좀 곤란해. 왜냐면…….”
“……?”
“사실 벌써 매입했거든.”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가, 뒤늦게 소리쳤다.
“그 진주 섬을 벌써 샀다고?!”
“이젠 진주 섬이 아니야. 새 이름이 생겼으니까.”
그리 말하며 닉 오빠는 책상 서랍에서 어떤 서류 뭉치를 꺼냈다. 밤 시간대라 어두워서 글자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섬이 비로소 내 소유가 됐음을 명시한 서류일 터였다. 역시나 그것을 내게 건네주며 그가 말했다.
“결혼 축하해. ‘레냐’ 섬의 주인이 된 것도 축하하고…… 그리고, 그동안 서툰 오빠라서 미안했어. 앞으론 지금까지보다 몇 배로 더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평생 행복하게 지내 줘.”
기쁜 기색은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고혈을 짜내어 만든 이런 선물 따위는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그리 따지는 게 그를 위한 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따스한 미소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만큼 냉철한 사람은 못 되었다.
“웃게 해 준다면서 이렇게 자꾸 감동하게 만들면…… 흑…….”
“레냐?!”
그는 내 눈가에 다시 고이기 시작한 물기를 보고 당황한 듯, 얼결에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울 수밖에 없잖아…….”라고 변명하며, 맘껏 흐느꼈다. 빙의 전 내 유일한 가족이었던 외할머니를 떠난 보내고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가족의 선물. 그 선물을 품에 안은 나는 말로만 들었던 ‘눈물 날 만큼의 행복’이라는 게 뭔지,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 * * 펑펑 우느라 붉어진 눈가를 식힌 뒤, 닉 오빠와 함께 연회장에 내려갔다. 이미 자정이 넘어간 시점이라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제야 돌아오셨네요,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니콜라스 소공작 각하?! 지금껏 어디 계셨어요!”
“이쪽으로 오셔서 저희랑 같이 춤춰요!”
그들은 기다렸던 것처럼 우릴 보자마자 우르르 몰려들었고, 닉 오빠는 미혼 영애들의 손에 이끌려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같은 꼴이 되지 않고자 나는 급히 아는 사람들을 눈으로 찾아다녔다. 일단 루카스는 안 보였다. 아마도 닉 오빠와 비슷한 방식으로 끌려갔거나, 아니면 스스로 피했을 터였다. 알렉시스도 없었고, 공작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에드조차 없었다.
‘에드는 왜 없지? 알렉시스랑 아직도 대화 중인가? 설마…… 둘이 심각해진 거 아니야?’
물론 에드가 알아서 잘하겠다고 대답하긴 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오빠를 만나러 갔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방심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 앞에선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있어도 사실 속은 그렇지 않은 에드였으니까. 그때 마침 달가운 인물이 보였다.
“카롤라!”
아는 얼굴이 보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물리고서 그녀에게 다가갔는데, 그녀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했다.
“아가씨…….”
“……?”
평소 강아지의 그것처럼 동그랗고 또렷하던 카롤라의 눈이 지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몸도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넘어질 듯해서 일단 부축해 주었더니 역시나,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카롤라? 설마 술 마신 거예요? 미성년자잖아요!”
“그냥 주스랬는데…… 어지러워요…….”
그 말을 듣고 주위를 살펴보니 예상대로였다. 혈기 왕성할 나이의 영식 세 명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나와 눈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도망쳤다.
“혹시 저 영식들이 그랬어요?”
“네에…….”
“……남이 주는 건, 특히 남자가 주는 건 막 받아먹는 거 아니에요. 전에 이시스가 알렉시스 경인 척하면서 준 물도 덥석 받아마셨다가 큰일 날 뻔했잖아요.”
“맞아……요…….”
상태가 워낙 나빠 보이니 설교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혹시 에드 전하하고 알렉시스 경 봤어요?”
“앗, 둘 다 봤어요……. 아까 테라스에서 둘이 얘기하는 거 같던데…… 히끅! 조용히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그냥 따로 흩어졌어요…….”
언성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둘의 대화도 잘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문득 카롤라가 꼬부라진 혀로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알렉시스 경께서 레냐 아가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