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결혼식 전이니까 뽀뽀까지만2021.08.20.
“…….”
나는 에드의 침묵이 끝나길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미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꿋꿋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엔 전부 헛수고였다.
“…….”
그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노라고- 그렇게 한마디만 해줘도 충분했건만……. 그 쉬운 대답조차 그는 꺼내지 못했다. 역시, 내 눈을 똑바로 보며 거짓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나 보다.
‘됐어. 이걸로 된 거야.’
만약 그가 이대로 거짓 사랑을 속삭였다면 나로서는 아마 더 버티지 못했을 터. 그러니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나는 쓰게 웃었다.
“이것 봐, 말 못 하잖아요.”
그가 정말로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하니 다소 서글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내 그런 마음을 들키기 전에 서둘러서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그러곤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 다신 제게 진심인 척하면서 저를 안으려고 하지 마세요.”
“…….”
“제가 이시스처럼 전하께 실망감 안겨 드릴까 봐 불안하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이런 건 안 돼요.”
일부러 등을 돌리고서 차갑게 건넨 경고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언젠가 또 선을 넘어와서 내 감정을 쥐고 흔들려고 할 것이고, 그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는 건 결국 나 혼자일 테니까. 그리고 내 그런 경고에 그는-
“미안해. 술기운에 조금 충동적으로 굴었어. 오늘 일은 잊어 줘.”
“…….”
사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다른 반응을 보여 주기를 잠깐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대로만 끝났다. 현실은 그보다 더 차갑고도 허무해서, 그는 그저 아무런 말 없이 그곳을 벗어났을 뿐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일을 잊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에드 또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나를 전과 똑같이 상냥하게 대했다. 물론 우리가 그토록 노력한다고 한들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예전처럼 회복될 순 없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엔 어색하고도 차가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고, 피차 필사적으로 그 사실을 모른 척할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 어색해진 상황에서, 황제로부터 서신이 왔다. ―2황자 에이드리언의 혼례식은 황실의 유구한 전통에 따라 황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니 ……(중략)…… 그대들은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로 준비를 마치고……(중략)…… 수도로 향하는 여정에 오르라. 현재 본인의 몸이 편치 않으니 결혼에 관해서는 서신으로만 상의하자거나- 도착하면 연락하라거나- 그런 기타 등등의 말들도 적혀 있었는데, 요는 식을 ‘황성에서’ 치르라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황성에서 식을 올리지 못한다는 말은, 에드가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필시 귀족들이 그의 출생에 대해 수군거리는 빌미가 됐을 터였다. 어쨌든 그 넓고 화려한 황성에서 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품위에 걸맞은 최고급 드레스와 보석, 결혼 마차 등등을 준비하고자 바빠졌다. 에드도 이시스를 찾아보겠다며 잠깐 북부를 떠났기에 그와 있었던 일은 차츰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내가 결정적으로 그때의 일에서 벗어나게 된 건, 공작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였다.
“아무래도 릴리아한테는 네가 직접 결혼 소식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는 그런 요상한 말을 하고는 나를 공작성의 지하로 데려갔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냥 무작정 그를 따라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넓게 트인, 어느 낯선 공간에 도착할 때까지.
‘가문의 묘지……인가?’
그곳 벽면을 따라 초상화가 죽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유골함으로 보이는 도자기 단지가 놓여 있었다. 공작은 그중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의 초상화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내가 예전에 말해 준 것도 같은데…… 몬트 가문의 사람이 죽으면 집안 전통에 따라 이곳에 안치된다. 나도 언젠가는 여기, 릴리아 옆에 자리하게 될 거고.”
“아아…….”
“그러니까 훗날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이곳에 와서 하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 갑작스레 그녀의 묘지에 인사하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쩐지 말문이 막혀 버려서, 나는 그냥 조용히 초상화 앞에 섰다.
‘부드러운 미소에 따뜻한 눈빛……. 지금도 하늘에서 이런 표정으로 공작가를 내려다보고 계시려나?’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모르는 것들도 다 알 듯했다. 왜 하필 내가 이 세계에 왔는지, 그리고 왜 하필 많은 사람들 중에서 레냐의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 전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저승에서 대답해 준다고 해도 이승에 있는 내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그냥 마음속으로 내 하고픈 말만을 건넸다.
‘저 곧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 레냐의 삶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할게요. 가족들도 잘 돌보고, 이 세계도 무너지지 않게끔 노력할게요. 그러니 부디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나는 머리카락 사이에 꽂고 다녔던 팔라레온 꽃에 성력을 불어넣어 싱싱해지게 만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그녀의 유골함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공작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인사 끝났으면 올라가자. 여긴 죽은 사람이 쉬기엔 아늑해도 산 사람에겐 좋지 않아. 공기가 탁하거든.”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밖으로 나가면 왠지 물어보기 어려울 거 같아서…… 지금 여쭐게요.”
“……? 말해 봐라.”
용기가 필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간신히 물었다.
“두 분께선 제가 태어나고 나서…… 혹시 후회하셨나요?”
“……너를 낳은 것을?”
“네.”
왜인지 그는 잠깐 멍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너 혹시 내 기억을 끝까지 안 본 거냐?”
“……? 네, 보다가 슬퍼서 중간에 멈췄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끝까지 다 봤으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리가 없거든.”
바보 같은 질문……. 진지한 마음이었던 나를 발끈하게 만들기 충분한 어휘 선택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뇨? 대체 이 질문의 어디가 바보 같…….”
“릴리아의 의식은 너를 낳고서도 잠깐 남아 있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그리고 릴리아는…… 그 최후의 세 시간이 본인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처럼 웃었지.”
공작의 시선이 잠깐 초상화로 향했다. 그가 다시 내 쪽을 봤을 땐, 그 눈빛 속에 깊은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를 대하듯이 너를 안아 보고, 쓰다듬어 보고…… 그렇게 행복해하며 떠났다. 그 모습을 네가 제대로 봤다면 ‘후회’했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안 던졌을 것이고.”
“…….”
“그리고 나도…… 네가 태어나기 전까진 릴리아에게 셋째를 품게 한 걸 후회하긴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태어나기 전까지의 얘기다. 갓 태어나서 내 팔뚝보다 작았던 너를 품에 안았을 땐, 그 후회도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니까.”
그는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리면서 이어 말했다.
“그나마 조금 후회되는 게 있다면 릴리아가 살아 있을 때 꽃을 보여 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뒤늦게 그에 집착하느라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을 못 했던 것…… 이 두 가지뿐이야.”
그는 그 밖에 다른 잡다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살아 있을 때 보여 주진 못했어도 결국엔 꽃을 피워 내서 바쳤으니 그에 대한 미련은 더 없겠지. 그럼 이제 공작에게 남은 후회는 하나뿐인 건가?’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후회하는 일일 터였다.
“거기서 평생 살 거냐? 어서 나와라. 건강 나빠진다.”
생각에 잠겨 가던 나를 그가 그리 퉁명스레 불렀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넨 뒤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 * * 묘지에 꽃을 바치고 온 뒤로 묘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엉킨 채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게 주어진 과제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결혼식 준비, 미래 계획, 그리고…… ‘루카스 달래기’라는 과제에.
“정말로 미안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제 정말로, 진짜로, 곧 출발할 수 있으니까요!”
“…….”
루카스가 말없이 의심 가득 담은 시선만을 보내왔다. 내 입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나온 횟수만 해도 벌써 열 번 이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으으, 노려본다……. 그래도 타라하고 만나게 해 주려면 이렇게라도 붙잡아 둬야만 하니까…….’
루카스를 혼자 보내면 그는 조용히 이시스를 추적하고 다닐 텐데, 그럼 나도 그의 행방을 제대로 모르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행방을 모르게 되면, 그를 타라와 만나게 해주기 어려워질 터였다. 즉, 내가 바쁜 루카스를 붙잡고서 이러는 건 결국 여주와 남주의 트루 러브를 위해서인 셈이었다.
‘결혼식 끝나고 곧바로 타라랑 소개팅시켜 줄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 이런 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루카스는 나를 쭉 노려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습니다. 그냥 천천히 하시죠. 어차피 빨리 가는 건 진작에 포기했으니까.”
“네에……. 미안해요…….”
그는 앵무새처럼 똑같이 사과하는 나를 아니꼽게 보면서도 다행히 더 타박하진 않았다. 대신 내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드레스 책자를 질린 눈으로 살폈다.
“그런데, 약혼자는 어디 갔길래 이 많은 걸 혼자 다 보는 겁니까? 이런 준비는 원래 남편 될 사람이랑 같이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전하께선 이시스를 잡으러…… 아니, 찾으러 갔어요. 제 목숨을 노린 게 용서가 안 된다나요……? 그래서 만나는 것도 그냥 나중에 황자궁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고요.”
사실 에드가 떠난 게 그저 이시스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냥 이시스를 추적하기만 할 생각이었다면 다른 부하를 시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직접 간 것은 아마-
‘나랑 연회 때 있었던 일 때문에 같이 있기 어색해서 도피하려는 목적으로 간 것도 같은데…… 굳이 그런 부분은 말할 필요 없겠지.’
사적인 부분을 슬쩍 감추고서 말해주었더니 역시나 루카스는 의아해했다.
“……음? 그거 괜찮은 겁니까? 상대는 사악한 술수를 부리는 마법사잖아요. 결혼을 앞둔 사람이 혼자 그렇게 찾으러 가면…… 걱정되진 않아요?”
“괜찮아요. 보기보다 튼튼한 사람이거든요.”
왜인지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툭 물었다.
“정략결혼인 거죠?”
“앗…….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실 줄은 몰랐는데…….”
‘날씨가 좋죠?’라고 묻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이만큼 사적인 질문을 던질 줄이야.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네, 그 말씀대로 정략결혼이에요. 서로 잘 모르고 지내다가 시기랑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아, 제가 또 너무 구구절절 말했네요.”
“괜찮습니다. 평민들은 조금 이상하게 볼지 몰라도 명망 높은 가문들은 다들 그렇게 결혼하니까요. 굳이 쉬쉬할 필요 없죠.”
“그렇긴 한데……. 루카스랑 같이 있으면 왜 이렇게 자꾸 말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안 해도 될 말까지 괜히 나온다니까요?”
그러고는 장난스레 내 주책맞은 입술을 ‘톡’ 두드리는 척하며 웃어 주었다. 괜히 분위기 가라앉기 전에 그런 가벼운 농담으로 대충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차라리…….
‘왠지 좀 불쌍하게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