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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내 약혼녀한테 들러붙지 마 (42/102)

42. 내 약혼녀한테 들러붙지 마2021.08.24.

나를 보는 루카스의 시선에 동정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꼭 며칠 굶은 길고양이라도 보는 것처럼.

16567320114275.jpg‘하긴, 정략혼인 데다가 남편 될 사람은 결혼 준비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상황으로 보이려나?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불쌍한 처지 같네.’

역시나 루카스도 그리 여겼던 모양이다. 계속 서 있기만 했던 그가 문득 의자를 끌어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16567320114284.jpg“도와드리죠. 뭐, 남편 될 사람이 도와주는 것보다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영애 혼자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16567320114275.jpg“네? 그럼 저야 감사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저 지금 손이 열 개여도 모자란 상황이거든요. 도와 달라고 하면서 정말 마구 부려 먹으려 들지도 몰라요?”

16567320114284.jpg“맘껏 부려 먹어요. 어차피 지금 당장은 할 일도 없으니까.”

그가 내 흉내를 내듯 책자 하나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꼭 본인이 입을 드레스라도 고르는 것처럼 진지한 태도라서 살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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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7320114275.jpg“참 좋은 사람 같아요, 루카스는. 그때 여관에서부터 저를 구하려고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잖아요.”

16567320114284.jpg“저도 매번 그러는 건 아닙니다. 영애를 보면 괜히 안 해도 될 일까지 하게 되네요. 영애가 제 앞에서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게 되는 것처럼.”

16567320114275.jpg“그래요? 그럼 앞으로도 많이 부려 먹어야겠…… 앗, 농담이니까 노려보지 마세요. 루카스는 눈매가 날카로워서 노려보면 진짜로 무서워요.”

그가 내 농담에 삐친 듯 고개를 휙 돌렸는데, 그 모습이 꼭 성난 시베리아 허스키 같았다.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나 삐쳤어’라는 표정을 지으니 되레 귀여웠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놀리고픈 충동이 더욱 강해졌지만 자제력을 발휘하여 꾹 눌러 참았다.

16567320114275.jpg“어쨌든 항상 고마워요. 그 보답으로, 결혼식 끝나고 나서 제가 진짜로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요. 맑고, 밝고, 씩씩하고, 강하고…… 꼭 이 세계를 구원할 여주인공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때요?”

16567320114284.jpg“…….”

16567320114275.jpg“루카스?”

16567320114284.jpg“나중에 말합시다. 지금은 영애가 입을 드레스 고르느라 바쁘니까.”

16567320114275.jpg“아…… 네…….”

왜인지는 몰라도 그는 내 드레스 고르는 일에 정말로 집중했다. 워낙 진지한 표정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경이라도 읽는 줄 알 듯했다. 다만 소개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16567320114275.jpg‘나중에 천천히 소개해 주면 되겠지. 괜히 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무리하게 애쓰지 않아도 이 세계의 주인공들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릴 터다. 나는 그의 성스러운(?) 옆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곤, 다시 산더미 같은 책자를 뒤적거렸다. 결혼식 날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북부를 떠나야 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 *

16567320139012.jpg“하…….”

에드의 입에서 피로감에 젖은 숨이 흘러나왔다. 요 며칠간 이시스가 숨어들었을 법한 곳은 전부 뒤져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모습마저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제국의 추적을 피해 살아온 그 흑마법사는 도망치는 데엔 이미 도가 터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흔적을 쫓고, 또 쫓다가 결국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다. 간판에 ‘골동품 판매’라고 적혀 있는 작은 가게. 사실 이미 뒤져 본 곳이긴 하지만, 이시스가 숨기 가장 좋은 장소인 만큼 에드는 재차 그곳에 발을 들였다.

16567320139012.jpg“…….”

간판에 적힌 것과 달리 정작 가게 내부엔 골동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잡동사니들만 가득 쌓여 있었다. 수상한 동물 박제, 지저분한 인형, 그리고 무언가의 뼛조각……. 그토록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지나며 에드의 눈가는 저절로 구겨졌다.

16567320139012.jpg‘취향 하고는. 입구를 꼭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했나?’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불쾌하고, 좁고, 지저분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자 일부러 이런 데에 입구를 만들었다는 걸 알지만, 올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건 별수 없었다. 그는 빠르게 지나가고자 걸음을 서둘렀고, 마침내 어느 낡은 전신 거울 앞에서 멈추었다. 그 뒤 먼지가 뿌옇게 쌓인 거울 표면에 손바닥을 댔다.

16567320139012.jpg“확인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거울 너머에서 반딧불이 같은 작은 빛이 움직이며 그의 손바닥을 스캔하듯 훑었다. 그렇게 탐색이 이어진 끝에― ―우우웅……. 기묘한 소리를 내며 거울의 표면 전체가 밝은 빛을 발했다. 신원이 확인되어 출입 허가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대로 거울을 통과하여 들어가자, 그 작은 골동품 가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호화로운 공간이 눈앞에 드러났다. 온 벽이 대리석과 자수정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사람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그 내부를 누비고 있었다. 그 이상한 것 중 하나가 곧 에드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16567320139032.jpg“마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오늘도 이시스를 찾고 계십니까?”

그렇게 물은 이는 ‘게나일’이라 불리는 마탑의 문지기로, 파충류와 인간을 뒤섞어 놓은 듯 기묘한 외형을 가진 자였다. 밖에서라면 필시 괴물이라 불릴 법한 모습……. 그러나 이곳 마탑은 마족들을 찬양하며, 그들의 힘인 흑마법을 이용한 인체 실험에도 아무런 윤리적 거리낌이 없는 자들이 모인 장소였다. 그런 마탑의 문지기라는 점에서 보면 게나일의 생김새도 정상 범주를 크게 넘어가는 건 아니었다. 다만-

16567320139012.jpg‘10년을 넘게 봐도 적응이 안 돼.’

에드가 고위급 마족의 계승자임을 인정받아 마탑의 주인으로 지내 온 세월은 고작 10년……. 그런 그에게는 여전히 썩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생김새였다. 그는 파충류처럼 허물이 들뜬 게나일의 피부를 노려보다가 일단 좀 물러서라는 듯 손짓했다.

16567320139012.jpg“그래. 혹시라도 본 적 있나? 이시스.”

16567320139032.jpg“예,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그자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서 말입죠. 주인께서 이곳에 오시면 전해 드리라며…….”

16567320139012.jpg“메시지?”

게나일이 곧 에드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기다리자 어린아이쯤은 충분히 삼킬 만한 크기의 뱀 한 마리가 꾸물거리며 기어 들어왔다. 이시스가 부리는 하급 마족으로 보이는 그것을 향해 에드는 싸늘히 물었다.

16567320139012.jpg“어디로 도망친 거냐.”

16567320139032.jpg―에이드리언 님……. 일단 제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그때의 그 일은 제가 에이드리언 님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행한…….

마족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에드가 마법을 써서 그것의 몸뚱이를 터트린 까닭이었다.

16567320139012.jpg‘어디서 구차한 변명을…….’

이시스가 어떤 변명을 대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의도야 어찌 됐든 ‘감히 허락도 없이’ 에드 자신의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는 게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조금 지나자 터진 살점이 꾸물거리며 모여들더니, 도로 멀쩡한 뱀의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16567320139032.jpg―알렉시스에게 저주를 걸어 둔 것은 어디까지나 걱정하는 마음으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자, 레냐 폰 몬트가 에이드리언 님께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만 했…….

에드가 두 번째로 뱀의 몸뚱이를 터트렸다. 그러나 뱀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다시 제 형상을 되찾았다.

16567320139032.jpg―제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여자에게 헛된 감정을 품으실 테니까요…….

세 번째로 그것을 터트리려는 순간, 이시스가 말했다.

16567320139032.jpg―네텔라 님께서 그러셨듯이…….

네텔라. 에드로서는 정말로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과거에 황제가 모든 힘을 잃은 어머니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며 품에 안았었다. 그래서 애써 기억 밑바닥에 묻어 둔 이름이건만, 이시스가 도로 끄집어냈다.

16567320139032.jpg―네텔라 님께서도 그 애정이라는 감정에 무너져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선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셨지요……. 그래서 마족으로서의 정체성마저도 저버리고 인간인 척, 그들의 편에서 함께 싸우셨는데도 돌아온 건…….

더 들을 필요 없이 에드도 알고 있었다. 인간과 마족 간 전쟁이 발발했던 과거에, 네텔라는 정체를 숨긴 채로 당시 정령 기사였던 몬트 공작의 동료로서 활약했다고 들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녀는 마족 중에서는 돌연변이 급으로 드문, 평화주의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끝은 어떠했던가. 그녀가 마족임을 알아챈 황제가 그녀를 배신하고, 힘을 봉인하여 인형이나 다름없는 꼴로 만들어서, 자신만의 새장 속에 가둬 놓고 은밀하게 소유했다. 그렇게 자신을 배신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에드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주었을 만큼 자애로웠던 어머니……. 그녀는 에드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결했다.

16567320139032.jpg―네텔라 님과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이시스는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에드에게 당부했다. 국가 하나쯤은 지도 위에서 쉽게 지워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고결했음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네텔라를 기억하라고. 그리고, 절대 그녀와 같은 길을 걷지 말라고. 물론 이시스의 그 말 자체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16567320139012.jpg“잡소린 그만하고 어디 숨었는지나 말해. 500년이나 살아 놓고도 마계로 통하는 문 하나 못 열어서 나한테 손 빌리는 무능한 놈한테 설교 들을 시간 없으니까.”

16567320139032.jpg―…….

한순간 이시스가 부리는 마족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한순간일 뿐, 이시스의 마족은 다시 고분고분하게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16567320139032.jpg―저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시지요……. 저는 현재 에이드리언 님께 용서받고자…… 목숨을 걸고 황성에 잠입해 있습니다…….

16567320139012.jpg“황성이라고?”

16567320139032.jpg―예……. 계획이 잘 풀린다면 황태자를 이용해서 그 열쇠가 숨겨진 장소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요……. 제가 열쇠를 찾아내 바칠 때까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모든 과오를 되돌리는 데 필요한 그 열쇠를 이시스가 찾아온다면야 잘된 일이었다. 물론 이시스라면 그 열쇠를 독점한 뒤 그걸 미끼 삼아서 에드를 제 수족처럼 부리려들 가능성이 더 컸지만, 그거야 나중에 강제로라도 빼앗으면 될 일이었다. 열쇠의 행방을 알게 된다는 것 자체는 에드 본인이 바라는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감을 뜻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시스가 레냐의 목숨을 노린 것은 용납이 되질 않았다.

16567320139032.jpg―그때까지 부디 헛된 감정에 휩쓸리지 마시고…….

에드는 이번에야말로 힘을 끌어올려서 이시스의 마족을 깨끗하게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전해질지, 전해지지 못할지 장담할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넸다.

16567320139012.jpg“닥쳐, 나도 알아.”

이시스가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그가 레냐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레냐가 그에게 진심을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했던 것도, 그날의 감정이 그저 단순히 마족 특유의 강렬한 소유욕에 불과하단 걸 에드 스스로가 잘 알아서였다. 그게 진심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런 감정이 생겨날 일 따윈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전에 레냐를 떠나보내는 꿈을 꿨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릴 뿐.

16567320139012.jpg“…….”

또다시 그때의 그 창백하고도 가련한 얼굴이 떠오르려 했다. 다행히 그녀의 생각을 떨쳐 내려 어렵사리 애쓸 필요는 없었다. 불쑥, 게나일이 찾아와서 충격적인 새 소식을 전해 준 덕분에.

16567320139032.jpg“마탑주님, 킬리안이라는 자가 수정 구슬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다급한 목소리였는데…… 닐스 황태자가 레냐 님을 만나보고자 황자궁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 * * 에드가 마탑에 있을 시각. 킬리안은 황자궁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16567320201297.jpg‘전하께서 빨리 연락을 받으셔야 할 텐데…….’

자신이 마탑에 있을 때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며 에드가 준 마도구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긴 했다. 수정 구슬 형태의 마도구를 향해 무언가 말하면, 그 목소리가 마탑에 있는 똑같은 형태의 구슬에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킬리안의 다급한 목소리는 마탑에 전달됐을 테지만…… 그게 에드의 귀에 들어가려면 에드가 일단 마탑에 있어야 했다. 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킬리안으로서는 메시지를 전해 놓고도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초조한 기색으로 에드의 답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궁의 시녀들이 덜컥 알려 왔다.

16567320139032.jpg“킬리안 님! 황태자 전하께서 기어코 레냐 아가씨의 방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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