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내 약혼자의 형이 미친놈이라니2021.08.31.
자신도 동생의 여자를 빼앗으리라. 동생이 먼저 그러했듯이……. 닐스가 그런 불건전한 결심을 다지던 중이었다. 여태껏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레냐가 재차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제 방에서 뭘 하고 계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멍하니 침묵하고만 있던 닐스를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살피고 있었다. 닐스는 그 앞에서 입가를 미소로 물들였다. 에드만큼은 아니어도 닐스 또한 화사한 금발과 자색 눈동자를 지닌, 호감형 인상의 사내이기에 이리 웃어 주면 웬만한 여자들은 마음을 열어 줬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이 영애처럼 좀 더 콧대가 높을 법한 여자들을 꾀어내려면 거기에 노력을 더해야 했지만.
“그대가 내 동생의 혼약 상대인……?”
“레냐 폰 몬트입니다, 전하.”
“……역시 그렇군. 초면에 실례가 많았네.”
“조금 그렇긴 하죠. 초면에 제 방에 들어와 계시니까요.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대놓고 가시를 세운 대답이었다. 닐스는 그런 레냐가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화를 억눌렀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야. 실은 어머니 아버지께서 이번 결혼을 두고 생각이 많으시거든. 영애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 점은 저로서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보니…….”
“뭐, 괜찮아. 이제라도 찾아뵈면 되지.”
“……?”
레냐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에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다고 서신에 적어 보냈으니 그걸 떠올리고 있겠구나― 하는, 닐스의 추측대로 역시나 그녀는 그 부분을 짚어 물었다.
“하지만 찾아뵙기에는…… 폐하께서 현재 편찮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대면하지 않으시고 오직 서신으로만 의논하셨던 것도 그래서였고요.”
“흐음. 뭐, 아버지께서 조금 불편하시긴 하지. 가문 대 가문으로서 거창하게 식사 자리에 참석하시긴 힘드실 거야. 하지만―”
닐스는 레냐를 향해 반걸음 정도 더 다가가선, 뒷말을 이었다.
“며느리 될 아이 한 명과 독대하는 것쯤은 아버지께도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겠지.”
“그 말씀은…….”
“지금 나랑 같이 가 주겠어? 아버지께서 영애를 몹시 궁금해하시니까.”
그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무해한 분위기를 내고자 노력했다. 그런데도 레냐는 쉽게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데다가 신중하기까지 한 것을 보니 머리도 좋은 듯해서 점점 더 그녀가 마음에 들어 갈 즘-
“……곧 에드 전하께서 오실 테니, 제 남편 되실 그분과 함께 찾아뵙고 싶습니다.”
“흠……?”
감히 거절을……? 닐스는 다시금 그녀를 괘씸하게 느꼈고, 아까보다 좀 더 강한 어투로써 말했다.
“아버지께선 영애를 최대한 빨리 만나 보고 싶어 하셨어.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게 하겠다고?”
“…….”
“굳이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되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아. 안 그래도 지금 결혼에 관해 걱정이 많으신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지. 남편이 없으면 혼자 나서지도 못하는 여자를 어느 시아버지가 좋게 보겠어. 안 그래?”
기본적으로 어리숙한 닐스라고 하더라도 아랫사람 다루는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배자로서 태어났고, 지배자로서 살아왔기에. 역시나 항상 하던 대로 황족의 권위로 압박을 주자 건방진 공작 영애의 얼굴 위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하지만 뜻대로 움직이게끔 하려면 마냥 채찍을 휘둘러서도 안 되는 법. 그는 그쯤에서 반걸음 정도 다시 뒤로 물러났다.
“아아, 내가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어. 방금 말은 그냥 흘려듣도록 하고, 나중에 에이드리언이 집에 오면 둘이 함께…….”
“아니요. 지금 가죠.”
닐스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럴래?”
“네, 그 전에 옷을 일단 갈아입어야 할 거 같은데…….”
“그럼 응접실에 있을 테니까 준비 끝나면 말하도록 해.”
“……네.”
황자궁의 시종들이 수백 번도 더 건넸어도 무시했던 퇴실 요청.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까와 달리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압박해 올 줄이야…….’
방금 전 닐스의 태도를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는 단순히 권유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느냐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압박을 가했었다. 그뿐일까? ‘남편이 없으면 혼자 나서지도 못하는 여자를 어느 시아버지가 좋게 보겠어.’ -라고, 어처구니없는 도발까지 덤으로 걸었었다.
‘원작에서 봤을 때도 답 없는 캐릭터였는데 직접 보니까 더 심하네. 여튼 이렇게 된 이상 만나 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그냥 잠깐 탐색이나 해 보려는 걸 텐데 괜히 거절해서 심기 긁어 놓을 필요도 없고.’
아직 에드와 나는 정식 부부가 아니었다. 그러니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진 황실에 책잡힐 짓을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나와 킬리안이 급히 들어오며 차례로 외쳤다.
“레냐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냥 황태자를 만났을 뿐이건만, 둘 다 무슨 죽다 살아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진정해. 별일 없었어. 그냥 좀 뜬금없이 황성에 가게 됐을 뿐이야.”
달래려고 한 말인데도 둘의 낯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특히 한나는 내 손까지 꽉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가씨 혼자서요?! 세상에, 너무 위험해요! 이런 말 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아시다시피 각하를 향한 폐하의 감정이 썩…… 으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한나를 대신해서 내가 대답했다.
“알아.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폐하께서 공작가의 일원인 내게 합당한 명분도 없이 해를 끼치진 못하실 거야. 나라를 두 쪽으로 쪼개 버릴 생각인 게 아니고서야.”
내 말을 듣고 한나가 주춤하자, 이번엔 킬리안이 나섰다.
“그렇대도 저는 불안해서 아가씨를 혼자 보내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 연락은 일단 넣어 두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어떨지요?”
“이미 혼자서 가겠다고 말해 놔서 그건 힘들 거야.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전하께서 오시면 물론 함께 갈 수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빨리 오실 수 있을까?”
물론 킬리안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에드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축 늘어진 그들을 달랬다.
“둘 다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무엇보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 싫거든.”
내가 끝까지 혼자 나서지 못하고 에드의 뒤에 숨는다면? 그들이 날 어떻게 여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이가 찼음에도 어린애처럼 의존하기만 하는, 한심하고도 부족한 여자로 여기며 얕잡아 볼 것이었다. 특히나 황제는 공작…… 내 아버지를 향해 악감정을 품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만나 보고 싶다면 까짓것, 만나 주지 뭐.”
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안 듯 둘 다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곧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가씨께선 한다면 꼭 해내고야 마는 분이니까요……. 걱정되지만, 저로서는 이번에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겠네요.”
“응. 지금 당장 채비 좀 도와줘. 가서도 기죽지 않을 만큼 꾸며야 해. 그리고 킬리안은 황제와 황후에 대해서 아는 걸 최대한 적어 줬으면 좋겠어. 기본적인 건 알고 가야 당황해서 실수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려 주자 안절부절못하던 그들도 비로소 정신을 차리곤,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가씨!”
둘이 발 빠르게 움직여 준 덕분에 준비 과정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나는 킬리안이 적어 준 정보를 머릿속에 곧장 새겨 넣었다. 거기에 한나가 준비해 준 고급 드레스까지 걸치곤, 1층에 위치하는 응접실에 들어섰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서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던 닐스가 비로소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보기만 했다. 화장이 더해진 내 얼굴을, 그리고 새 드레스를 걸친 내 몸을……. 어쩐지 집요하고 기분 나쁜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 즘, 그가 대답했다.
“아니, 전혀.”
“…….”
“갈까?”
“……네.”
그는 먼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서 제 정령을 소환했다. 정령은 가족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의 정령은 왜인지 에드의 그것처럼 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에드의 블랙과 달리 하얀색이었고, 날개도 없었지만. 에드와 비슷한 정령인데도 본인의 정령은 날개가 없으니 조금 열등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줄게.”
“……같이 타고 가나요?”
“굳이 따로 갈 필요 없잖아? 혹시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
“…….”
곧 가족이 될 자신을 남자로 보고 부끄러워하느냐고 묻는 듯한 투였다. 한순간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대꾸했다.
“아뇨, 그냥 저 때문에 불편하실까 봐 여쭌 거예요.”
“전혀 안 불편하니까 어서 타.”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정령에 올라타되, 붙잡아 주고자 내 쪽으로 내민 그의 손은 정중히 사양했다. 곧이어 내 뒤에 올라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내 팔뚝 꽉 붙잡아. 흔들릴 수 있거든. 아니면 내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붙어 앉거나.”
“…….”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 정령의 목덜미만을 고집스레 끌어안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가깝게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가 거슬린다고 생각한 순간―
―히이이잉!!
한차례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그의 정령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 * * 레냐가 닐스의 정령을 타고 황성으로 향한 지 20분가량 지났을 즘. 커다란 검은색 그림자가 황자궁의 정문 위를 넘어서 들어왔다. 육안으로 보기도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그렇게 귀환한 에드는 정원에서 걱정스레 서성거리고 있던 킬리안의 앞에 곧장 착륙했다.
“황태자가 왔다고? 그것도…… 그것도 감히 내 약혼녀를 보러 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킬리안은 결연하게 대답했다.
“……예, 아까 오셨었습니다.”
“지금 어딨지? 레냐가 도착하기 전에 돌려보내야 해. 열등감에 푹 절은 그 자식이 레냐를 봤다가는…….”
에드는 이를 부서지도록 꽉 악물며 뒷말을 이었다.
“또 빼앗으려고 안달을 하겠지. 추잡한 자식…….”
닐스는 에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더욱 탐을 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레냐를 보면 응당 눈독을 들일 것이었다. 닐스가 욕망 그득한 눈빛으로 레냐를 쳐다보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심지어는 그가 레냐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도…… 에드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핏줄이 불거질 만큼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데 킬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그 뒤 킬리안으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는, 에드의 이성을 끊어 버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 * * 황성까지는 눈 깜짝할 새였다. 닐스는 황성의 정문까지 가서 본인의 정령을 멈춰 세우곤, 나를 내려 주었다.
“다 왔어. 여기가 황성이야.”
그는 내가 놀라기를 바랐던 듯 으스대는 말투로 그리 소개했다. 그럴 만도 했다. 정원부터 시작해서 건물까지, 황성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으니까. 기둥과 벽은 전부 최고급품 대리석이고, 그 벽 사이사이엔 제국인들의 고혈을 짜내어 만들어 낸 무수한 황금이 박혀 있었다. 닐스의 안내를 받으며 그 아름다운 황성에 들어가니 역시나, 단번에 시선 집중이었다. 황성의 시녀 시종들이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은근히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눈빛들로 보건대, 아마 조금 뒤에 저들끼리 모여서 황태자가 데려온 젊은 여자의 정체에 대해 수군거릴 듯했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래, 맘껏 보고 맘껏 소문내라. 내가 음침하고 못생겼다고 헛소문 퍼트리고 다니는 인간들이 주둥이 좀 다물게.’
그런 생각으로,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들 사이를 지나면서도 끝까지 당당하게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황제의 개인 알현실 앞이었고, 나는 닐스가 문을 열어 준 틈에 그곳에 들어섰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레냐 폰 몬트입니다.”
그리 인사하며 슬쩍 그들을 관찰해보았다.
‘황후는 역시나 빨간 드레스 차림이구나. 그런데 얼굴은…… 되게 평범하네? 머리카락도 그냥 다갈색이고.’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금발을 지닌 평범한 생김새의 중년이었는데, 꽤 건강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신으로는 아프다더니 그래 보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둘 다 원작에서 악역인데도 불구하고 평범한 생김새라 조금 놀라고 있을 때, 황후가 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지시했다.
“너무 딱딱하게 굴 필요 없단다. 여기 앉으렴,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