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막장 시댁 엎으러 왔습니다2021.09.03.
‘아가’라니,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호칭이었다. 덕분에 한순간 멍해져서, 황후를 향해 고개 숙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감사합니다.”
간신히 그리 인사한 나는 일단 침착하게 그들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 머릿속으론 여전히 분주히 상황을 분석 중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저 부담스러운 호칭도 그렇고, 이런 장소로 불러온 것도 그렇고…….’
그들이 날 제대로 압박해 볼 생각이었다면 아마 개인 알현실이 아니라, 황성의 그레이트홀로 불렀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화려한 왕좌에 앉아 위엄을 과시해야 나를 더 쉽게 요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나를 개인 알현실로 불러서, 편안한 소파에 앉혔다.
‘처음부터 본성을 드러낼 생각은 없는 건가? 근데 눈빛은…… 역시나 나를 엄청나게 뜯어보고 있구나.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서.’
웃음을 가면처럼 얼굴에 씌워 두곤 있지만, 그들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카롭게 빛나며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사이 닐스도 자리에 앉았고, 시녀가 와서 차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진 가운데 오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 달그락거리며 들려왔다.
‘이 시녀, 다쳤는데도 일을 하네?’
찻잔 나르는 시녀를 별생각 없이 살피다가 그녀의 손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를 보게 되었다. 저렇게 다쳤으면 쉬게 해 줄 법도 하건만……. 황제와 황후는 아랫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잡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을 때, 황후의 목소리가 침묵을 가르고서 들려왔다.
“닐스에게서 이미 들었겠지만, 우리 둘 다 정말로 걱정이 많았단다. 어떤 아가씨가 에드의 짝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진작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니야. 사과하지 말렴.”
그녀는 퍽 인자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이런 인자한 중년 여성이 어린 에드를 암살하려 했다는 걸 못 믿었을 듯했다. 소름을 느낄 틈도 없이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불쾌하다고 느낀 적은 없네. 그냥 걱정되었을 뿐이지.”
“예, 충분히 이해합니다.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저를 전하의 반려로 허락해 주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테니까요. 전하를 걱정하시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아니.”
그가 내 말을 단칼에 끊어 내며 말했다.
“잘못 이해하고 있군. 에드를 걱정했다는 게 아닐세.”
“……?”
“내가 걱정한 건…….”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 손끝으로 슬쩍 나를 가리켰다.
“자네일세. 에드와 결혼하게 된, 자네.”
자기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의 아내 될 여자를 걱정한다니. 황제는 그렇게, 에드가 들으면 속상해할 듯한 말을 해 놓고는 되레 본인이 미간을 구겼다.
“짐은 에드의 아비 되는 자로서 그 애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속에 많은 증오를 감추고 있는 아이이지. 그리고 그 이유는……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
“아닌 척하지만 내심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밖에서 데려온 그 아이를 닐스와 똑같이 대우해 줄 순 없는 일이라 본의 아니게 많은 차별을 두었으니 말일세.”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안 됐는데 이런 무거운 얘길 꺼낸다고……?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야……?’
만약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면 대성공이다. 덕분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이 자리가 매우 불편해졌으니까. 심지어 내가 말을 안 했더니 꼭 찬물이라도 부은 듯 고요해져서, 뭐라도 지껄여야만 했다.
“……아닙니다. 에드 전하께서 폐하를 원망하다니요. 단언컨대 그건 결코 아닐 거예요.”
“정말로 단언할 수 있나?”
“…….”
“아마 못 하겠지. 그 아이가 속내를 감추는 데 소질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그는 차를 한 모금 삼키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 웃는 얼굴 밑에 어떤 표정을 감추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그래서 자네가 걱정인 거야. 그런 불안정한 면모가 있는 아이에게 잘 맞추어서 살아갈 수 있을지…….”
그쯤에서 나는 그의 속셈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결혼을 거부하길 바라는 눈치네. 본인이 지금까지 해 둔 말이 있으니 먼저 나서서 결혼을 깨지는 못하겠고, 내가 마음을 바꿔 주길 바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본인 아들을 내 앞에서 까 내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는 이유는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듯했다.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에드가, 자신이 줄곧 견제해 온 공작의 사위가 되게 생겼으니 내심 겁이 나는 것이다.
“에드 전하께서는…….”
“우리 앞에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단다.”
에드 전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라고, 멋지게 말하려던 차에 황후가 내 말의 허리를 불쑥 잘라냈다. 그러곤 어린애를 어르듯 달콤한 목소리로 제 말을 이어 붙였다.
“이곳에서 오간 이야기는 절대 밖에 새 나가지 않을 거니까. 정말로 괜찮은 거니? 집안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건 아니지? 혹시…… 그 아이가 폭력적으로 굴지는 않았고?”
“…….”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렴.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전부 도와줄게.”
그녀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에드의 목숨을 그토록 수도 없이 노리고, 이젠 그의 결혼마저 방해하려고 하면서, 그 행위를 나를 향한 선의로 포장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그 몰염치한 행위 덕에 초조함은 더 느껴지지 않았다. 혐오감과 분노만이 이글거릴 뿐.
“아니요. 전하께서 제게 폭력성을 드러내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아버지께서 결혼을 강요하신 것도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원해서 추진한 결혼입니다.”
“흐음, 그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 순간 ‘덜그럭’ 하고 찻잔끼리 부딪히는,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다소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은 황후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지금까지는 잘 지내 왔구나. 하지만 앞으로도 괜찮겠니?”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단다. 속에 어둠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감추려고 노력해도 필시 언젠간 그 면모가 드러나게 되지.”
내가 에드를 싸고돌아서 초조해졌나 보다. 아깐 그래도 내숭이라도 좀 떨더니, 지금은 정말로 혐오하는 존재를 언급하듯 노골적으로 에드를 까 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내 대답이 변할 일은 없지만.
“괜찮습니다. 설령 그 말씀대로 전하께 다소 그런 면모가 있다 해도 저는 감내할 수 있어요.”
“…….”
“그리고, 속에 어둠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필시 언젠간 그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 대화를 한 번에 끝낼 결정타를 쏟아 냈다.
“필사적으로 어둠을 감춰 온 사람이 그걸 결국 드러냈다면…… 그건 주위에서 그를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몰아붙여서가 아닐까요?”
“……!”
“저는 에드 전하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말을 마치고서 속내를 감출 생각으로 웃어 주긴 했지만, 어쨌든 저들은 내 말속에 숨은 비난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구보다 교활한 이들이 이만큼 노골적인 돌려 까기도 못 알아들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 증거로, 에드가 악역이 될 때까지 열심히 몰아붙여 온 그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후 이어진 것은 토악질이 나올 만큼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그들의 적의를 산 것이 명백한 상황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저 추악한 인간들이 또다시 에드에게 해 끼치려 드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그냥저냥 넘겼다면 더 크게 후회했을 테니까. 더 있으면 침묵 속에서 질식할 수도 있겠다― 싶을 즘에 다행히 황후가 먼저 상황을 정리했다.
“씩씩한 아이구나. 아무래도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야. 너 정도 되는 아이라면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충분히 이겨 낼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렴. 혹시 나중에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내가 본인들 말을 안 들으니 일부러 내쫓듯이 곧장 내보낸 것이겠지만, 어쨌든 대화가 빨리 끝난 것 자체는 좋았다. 나는 알현실에서 나오자마자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휴……. 힘들었다……. 뭐 잘못 말한 건 없었겠지? 아니, 그보다…….’
나는 힐끔 시선을 뒤로 돌렸다.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역시나, 내 뒤로 닐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 인간은 왜 따라 나오지?’
그냥 우연히 가는 길이 겹친 건가 싶어서 물어보지 않고 쭉 걸어갔다. 그러나 우연히 길이 겹쳤다기에는 우리의 방향이 지나치게 일치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성 정문까지 나온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곤, 그를 마주 봤다.
“정원으로 나가시는 길인가요?”
“아니, 너 데려다주려고 따라가고 있던 건데.”
“…….”
호의를 베풀기 전에는 상대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결여된 대답이었다. 그 뻔뻔한 태도에 나는 말을 잃었다. 다만―
‘생각해 보니까 타고 갈 게 없네? 이러면 거절할 수가 없겠는데……?’
이런 늦은 시간에 혼자 황자궁까지 걸어가는 건 위험했다. 내가 살던 현대 사회와는 달리 치안이 썩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웃는 얼굴이 저렇게 짜증 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그 미소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왜 저래?’
의문은 곧이어 해소되었다. 닐스를 굳게 만든 ‘그 원인’이 마침내 우리 사이에 착륙한 것이었다.
“에드 전하?!”
블랙이 착륙하며 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자 에드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그를 따라온 듯 보이는 낯선 기사 두 명 또한 근처에 내려섰다. 굳어 있던 닐스도 그쯤 되니 정신이 든 듯했다.
“동생님이 직접 모시러 오셨군. 내가 어련히 데려다줄 텐데 못 미더웠나?”
가벼운 말투였고,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서만은…… 감출 수 없는 경멸이 드러나 보였다. 에드는 그런 닐스를 무시하고서 곧장 내게로 왔다.
“내 기사들하고 먼저 궁으로 돌아가.”
그러고는 나를 거의 들어다가 옮기듯이 기사들 쪽으로 데려갔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가면 전하께서는요?”
“난 나중에 따라갈게.”
“……?!”
굉장히 불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둘의 표정만 보면 꼭 서로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만 같은 기세였기에. 그래서 안 가려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더니, 에드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부탁이야……. 지금은 그냥 내 말대로 해 줘.”
버티던 내 두 다리에서 곧바로 힘이 풀려 버렸다. 에드의 기사 중 하나가 그렇게 비틀거리는 나를 번쩍 들어다가 본인 정령에 태웠다.
‘부탁…….’
당장 돌아가라고, 명령하듯이 강압적으로 굴었다면 나도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간절하고도 간절하여, 부탁보다는 차라리 애원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목소리로. 거절하면 당장 무너져 내릴 것처럼 그리 약해진 눈빛까지 보내니 나는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다.
‘에드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그런데 왜……? 난 그냥 무력하게 의지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황성에 왔을 뿐인데…….’
기사들이 나를 정령에 태운 뒤에도 눈으로는 계속 에드를 쫓았다. 그는 닐스에게 다가가서 무언가 속삭였고, 그 즉시 닐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협박이었을까? 아니면 욕설? 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사람 얼굴이 저리 새하얘지나 궁금했으나 알 길은 없었다.
“꽉 붙잡으십시오. 아가씨를 최대한 빨리 황자궁으로 모시라는 전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에드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그리 말한 뒤, 내가 상황을 더 지켜보지도 못하게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