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끝까지 모르길 바랐는데2021.09.17.
본인 동생이 필사적으로 감춰온 비밀이나 떠벌린 주제에 뭐가 그리 의기양양했던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닐스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진실을 알고 나니 어때? 이걸 알고도 그 녀석을 감당할 수 있겠어?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닌 존재와 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있겠냐고.”
그는 에드를 ‘인간도 아닌 존재’로 칭하고 있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만약 닐스와 에드 중에서 더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닐스를 꼽을 것이었다. 열등감에 절어서 제 동생의 비밀을 폭로하고 결혼을 깨트리려 드는 저 남자를.
“저는…….”
저는 제 남편이 어떤 존재이든 상관치 않습니다― 라고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랬는데, 말을 제대로 잇기도 전에 하늘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날아와서는 우리 사이에 불쑥 착륙했다. 덕분에 흙먼지가 잔뜩 일어나 앞을 보기 어려웠지만, 그 정체를 알긴 어렵지 않았다.
‘에드가 드디어 왔나? 하……. 이제 헛소리 그만 들어도 되겠다.’
이제부터 닐스는 에드가 알아서 상대할 테니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눈감고서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퍽!’ 하는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온 것은.
“……?!”
나는 곧바로 눈을 번쩍 뜨고서 상황을 살폈다.
‘뭐지? 방금 분명 사람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차츰 먼지가 가라앉고, 마침내 나는 닐스와 에드를 볼 수 있었다. 에드는 평소처럼 냉랭한 얼굴로 서 있었고, 닐스는―
‘때, 때렸어?! 황태자를?!’
닐스는 누가 봐도 얻어맞은 듯한 포즈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리 짜증 나는 인간이라지만 그는 황태자로서 장차 황제의 뒤를 이어 제국을 다스릴 자였다. 그런 닐스가 저리 엎어져 있으니 나는 이 상황이 아주 심각한 사태로 번질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정작 사고를 친 에드는 태연하게 닐스를 내버려 두곤 내게로 왔다. 그 뒤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듯 부드러이 붙들었다.
“……?”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저릿저릿해졌다. 내 기억상 이건 ‘마력을 피부로 접했을 때’의 감각이었다.
‘또 마력이……. 지금 통제력을 잃었나?’
아무래도 그는 이성이 흐려지면 마력을 이리 내보내게 되는 듯했다. 과거에 나를 안으려 들었을 때도 이랬던 걸 떠올려 보면. 여하간 그런 불안정한 상태로 에드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저 자식이…… 저 자식이 네게 무슨 소릴 지껄인 거야?”
그는 제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보였지만, 실패했다. 그의 마력은 지금도 마구 흘러나오는 중이었고, 내 양쪽 어깨를 부여잡은 그의 손끝 또한 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굉장히 동요하고 있어. 이러는 거 처음 봐.’
나는 우선 그가 본인의 혼란한 마음과 마력을 진정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그냥 결혼식 얘길……”
“거짓말하면 안 되지, 레냐.”
내 말을 자르며 그렇게 끼어들어 온 것은 닐스였다. 아까 한 대 맞고 엎어졌던 닐스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에드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자고. 방금까지 우리 사이좋게 저 녀석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잖아?”
“잠깐, 잠깐만요……!”
“저 새끼 어미가 마족이었다는 것까지 다 들어 놓고……. 벌써 잊었어?”
에드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 무작정 저질러 버렸던 걸까. 내가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닐스는 기어코 에드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찔러 왔다. 에드는 이제 나 대신 닐스를 보고 있었다. 물론 닐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얻어맞아 봤을 그는 광기에 가까운 분노로 눈을 번뜩이면서 에드를 마주하는 중이었다.
“왜 그렇게 봐? 틀린 말도 아닌데.”
“…….”
“마족의 배에서 나온 사생아…… 그게 너잖아? 출생이 그리 비천하니 감히 형한테 이렇게 주먹질이나 하지, 안 그래?”
에드를 향한 닐스의 상스러운 모욕을 고스란히 들은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넘었어…….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선을 완전히 넘었어…….’
에드가 닐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력이 험악해졌다는 건 금방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그가 지금 정말로 분노했다는 걸…… 닐스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분노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끔찍한 사태를 막으려면 당장 말려야만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아까부터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손가락도 안 움직여. 마력 때문에 공기가 무거워졌어.’
밀도 높은 마력 탓에 온몸이 사방에서 짓눌리는 듯한 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드는 닐스에게로 다가갔고, 닐스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왜, 또 고작 주먹질이나 하려고? 하려면 제대로 해라.”
다가오는 에드를 향해 닐스가 기어코 검을 뽑아 들었다. 오직 사람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려는 용도로써 만들어진 무거운 장검……. 그 검의 끄트머리를 제 동생에게 겨눈 채, 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전부터 네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어.”
“…….”
“주제도 모르고 나대고, 그거로도 모자라서 감히 내 여자들을 홀리고……. 내 뒤에서 찌그러져 있어야 할 사생아 놈이 말이야.”
“…….”
“오늘 그 반반한 머리통 잘라내 버리려니까 너도 검 들어, 버러지 같은 자식아.”
“…….”
“왜 안 들어. 이렇게 될 거 각오하고서 주먹질한 거잖아?”
“…….”
“검 들어!!”
에드가 끝까지 침묵하자 결국 먼저 이성을 잃고서 달려든 것은 닐스였다. 당연하지만 에드는 그가 접근하기도 전에 마법을 써서 그의 움직임을 봉했고, 에드는 여유롭게 걸어가서 그의 멱살을 낚아챘다. 아직 입을 움직일 수 있었던 닐스가 살의를 담아 발악했다.
“흑마법?! 흑마법을 쓴 거냐?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 마족 새끼!!”
“…….”
“네 어미도 이런 역겨운 흑마법으로 우리 아버지를 유혹한 거지!! 죽여 버릴 거야!!”
그때, 처음으로 에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술 새로 나온 것은 닐스의 발악에 대한 대꾸가 아니었다.
“또 얼쩡거리면 죽여 버린다고 불과 며칠 전에 말했잖아.”
황성에서 나를 황자궁으로 돌려보내면서 에드가 닐스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 아무래도 닐스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나 보다. 닐스가 그때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을 지어서 알 수 있었다.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두려워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닐스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한 듯했다.
“닥, 닥쳐!!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죽여 봐!! 죽여 보라고, 이 사생아 새끼야!!”
그 즉시 에드의 오른손에 마력이 뭉치더니, 새카만 검의 형태로 다듬어졌다. 오직 에너지로 이루어진 까닭에 닐스의 그것처럼 형태가 뚜렷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마력이 응축되고 또 응축되어 있는지,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저런 거에 찔리면 살점도 남아나질 않을 거야!’
닐스가 튀긴 핏물을 뒤집어쓸 에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나는 즉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제발 움직여! 제발!!’
닐스가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살인이 나면 에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터였다. 그때―
“……!!”
까딱― 내 노력이 통한 듯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내 몸을 사방에서 짓누르는 이 마력을 밀어내고자 성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비로소 조금씩 압박감이 사라지고, 차츰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검을 완성한 에드는 그것을 닐스에게 찔러 넣고자 팔을 들고 있었다. 나는 급히 입을 열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성량으로 외쳤다.
“에드!!”
검의 끄트머리가 닐스의 복부로 파고들기 직전, 에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비로소 닐스가 아닌 나를 바라보았다. 길게 말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단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
“…….”
내 분명한 의사 표시를 보고서도 에드는 한동안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닐스를 놔주고서,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도 그대로 없애 버렸다.
“헉, 헉……!! 마, 마족이……!! 근위병!! 근위병 어디 있……!!”
비로소 움직일 수 있게 된 닐스가 패닉에 빠진 채로 근위병을 찾았다. 그러곤 사람들을 불러오려는 것처럼 미로를 벗어나려 했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일이 크게 번졌을 터나, 그 전에 에드가 닐스 쪽은 보지도 않은 채로 마법을 써서 그를 기절시켰다. 시끄럽던 닐스는 그렇게 기절하고 풀벌레 울음소리조차 사라진 상황. ‘저벅저벅’ 내게로 다가오는 에드의 걸음 소리만이 그곳에 유일하게 남은 소리였다. 어느새 가까워진 그가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는 손끝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끝까지 모르길 바랐는데.”
감정을 삼키듯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방금보다도 더한 서글픔이 그의 음성에 묻어 있었다.
“이젠 다 알아 버렸으니, 너도 나를 혐오하게 되겠지.”
‘혐오’라니……. 단언컨대 그를 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전 신경 안 써요. 전하께 어떤 피가 흐르건 그런 건 전혀 상관 없…….”
“거짓말.”
그가 이윽고 몸을 숙여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얼결에 쓰다듬듯이 그의 뒤통수에 손을 올리자, 옅은 떨림이 손바닥을 타고서 느껴졌다.
“넌 항상 내게 진심을 숨기잖아.”
“…….”
“나한테 솔직했던 적 따윈 한 번도 없지.”
에드를 잘 속이고 있다고 믿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눈치 빠른 그는 내가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비밀을 자꾸 감추는 에드에게 내가 느꼈던 섭섭함을, 어쩌면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원한다면 말해 줄게요. 제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비밀을 가졌는지, 전부…….”
“…….”
“……전하?”
대답이 없기에 의아해서 그의 몸을 흔들어 보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갑자기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버린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전하, 전하?!”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댄 채였던 그를 다급하게 바닥에 눕혔다. 툭, 그의 팔뚝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두 눈꺼풀도 마찬가지로 힘없이 닫혀 있었다.
‘왜 갑자기 정신을 잃었지? 아까 충격받아서? 닐스 때문에 마력을 마구 흩뿌려서인가?’
어쨌든 상황 수습부터 해야 했기에, 일단 삐약이를 소환했다.
“삐약아, 다른 사람은 모르게, 최대한 조용히 가족들을 여기로 데려와 줘!”
* * * 그날의 소란은 나를 찾아 달려온 가족들 덕분에 깔끔하게 수습되었다. 아버지랑 오빠들이 쓰러진 두 황자들을 내부로 옮겼고,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닐스를 찾던 황제 부부에겐 그가 과음으로 쓰러져 누웠노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의외로 그들은 그 말에 쉽게 수긍했는데, 알고 보니 닐스가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퍼질러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랬겠거니, 하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에드가 흑마법을 쓴다는 걸 알게 된 닐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였으나…… 다행히 이 부분도 내가 고생해서 해결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왜 여깄지? 결혼식은……?”
오전쯤 정신을 차린 그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에드가 닐스를 마법으로 기절시켰을 때, 그의 기억도 함께 지운 듯했다. 이성을 잃은 듯 보이던 에드였는데, 그런 와중에도 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할 생각을 했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만큼 철저한 게 역시나 악역다웠다고 해야 할까? 여하간 그래서 에드가 흑마법을 썼던 것도, 닐스를 죽일 뻔했던 것도 전부 조용히 묻어 둘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건 다 해결됐으니까 이제 에드만 일어나면 되나?’
닐스와 달리 에드는 어제 기절한 이후로 여전히 눈뜨지 못하고 있었다. 왜인지 성력으로 치료하려고 해봐도 듣질 않고, 아침에 온 의사 또한 별 해결책을 내놓진 못했다. 딱히 외상은 없는 것 같으니 일단 지켜보라고만 했을 뿐. ‘동화 속 공주님들은 입맞춤 한 방이면 금방 눈 뜨던데…….’-라고, 무방비하게 놓여 있는 에드의 입술을 보며 쓸데없는 생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정중한 노크 소리가 귓가를 두드려 왔다.
“영애? 안에 있습니까?”
아무리 어제 결혼했다지만 엄연히 기혼자인 나를 ‘영애’라고 부를 줄이야. 퍽 무신경한 태도다. 하지만 그렇게 실수해도 왠지 밉지 않은 사람이기에, 나는 군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요, 루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