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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왜 당신 부탁은 무시할 수가 없는지 (50/102)

50. 왜 당신 부탁은 무시할 수가 없는지2021.09.21.

문을 열어 주자 루카스가 웬 커다란 짐 상자를 들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이시스의 단서를 찾아본다기에 이시스가 쓰던 방으로 안내해 주었건만, 왜 도로 여기에 왔는지 의문이었다.

1656732134893.jpg‘단서 찾기는 벌써 끝났나? 하긴, 이미 텅 빈 방이었으니까 뒤져볼 것도 없었겠네.’

먼저 이시스의 방을 뒤져봤던 킬리안도 먼지 한 톨 없노라고 보고했었으니, 루카스가 더 찾아볼 건 없었을 터였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따끔하게 알려 주었다.

1656732134893.jpg“이젠 영애가 아니라 부인이라고 불러야죠. 기혼인데.”

16567321348942.jpg“아, 영애라고 부르는 게 입에 붙어서 그만…….”

1656732134893.jpg“그보다 들고 계신 그건 뭐죠? 혹시 제 짐이에요?”

아침부터 하인들을 시켜서 전에 급하게 가출하느라 못 가져왔던 내 짐들을 황자궁에 옮겨 놓고 있었는데, 왜인지 그중 하나를 루카스가 들고 온 듯했다.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그저 심드렁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짐을 턱 내려놓았다.

16567321348942.jpg“예, 물론. 지금 밖에서부터 옮겨지고 있는 짐 가방은 전부 당신 거니까요.”

1656732134893.jpg“아뇨, 저는 손님인 루카스가 제 짐을 들고 온 게 의아해서 여쭌 거였어요. 이건 저희 집안사람들이 할 일이잖아요.”

16567321348942.jpg“하녀 둘이서 힘들게 들고 올라오고 있길래 그냥 제가 가져왔습니다.”

1656732134893.jpg“아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루카스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기에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1656732134893.jpg“여전히 친절하시네요. 힘들어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뒤 나는 그가 가져온 상자의 내용물을 대강 살펴보았다. 침실 서랍 구석에 박아 뒀던 잡동사니들로 보였는데, 낯선 물건들도 꽤 있었다. 아무래도 빙의하기 이전에 레냐가 쓰던 물건인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간 것은 자물쇠로 입구가 단단히 잠겨 있는 어느 나무 함이었다. 안에 보석이나 금화가 들어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루카스가 말했다.

16567321348942.jpg“그런 것도 있고…… 사실 여기로 올 구실이 필요했거든요.”

1656732134893.jpg“네?”

16567321348942.jpg“힘들어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것 같다면서요. 사실 그 하녀들을 도우려는 목적이었다기보단, 부인을 만나러 올 구실이나 마련해볼 겸 힘 좀 썼다는 뜻입니다.”

1656732134893.jpg“아아……. 그런데 방금 그 말, 되게 의미심장하게 들린 거 알아요?”

만날 구실이 필요해서 ‘굳이’ 이 무거운 짐을 들고 왔다니. 순진한 여자들 마음에 봄바람 불게 하기 딱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일 테지만. 성직자로서 아무것도 모를 그가 저런 의미심장한 말들을 우연히 잘도 꺼내는 게 신기해서 슬쩍 웃자, 그도 민망한 듯 제 뺨을 긁적였다.

16567321348942.jpg“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까? 그럼 미안합니다만, 어쨌든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건 맞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거든요.”

1656732134893.jpg“뭐가 궁금한데요?”

16567321348942.jpg“당신, 릴리아 테레니아 님의 딸이었습니까?”

1656732134893.jpg“……?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춤 신청을 하듯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얼결에 그 위에 손을 얹었더니, 그가 내 손가락을…… 정확히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어머니의 반지’를 본인의 눈앞으로 끌어당겨 자세히 살폈다.

16567321348942.jpg“이 반지, 왠지 전에 비슷한 물건을 본 것 같아서 잘 생각해 보니 기억나더군요. 테레니아의 가주가 이것과 세트인 것처럼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던 게.”

1656732134893.jpg“테레니아의…… 가주요……?”

16567321348942.jpg“예, 그 목걸이에도 당신 반지에 박힌 이것처럼 특이하게 발광하는 보석이 박혀 있었죠. 그래서 무슨 물건인지 물었더니 그가 말하길, ‘오직 테레니아 가문만이 소유하고 있는 보물’이라더군요.”

거기까지 말하고서 그가 내 손을 놓아 주었다. 단,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한 채로.

16567321348942.jpg“그리고 그런 가보를 당신이 가지고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일 겁니다.”

나는 그에게 내밀었던 손을 조심스레 거둬들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1656732134893.jpg“맞아요, 제가 그분의 딸이에요. 상당히 잘 알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희 어머니가 신성국에서 그만큼 유명하셨나요? 저는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날 바로 돌아가셔서.”

그것까진 몰랐던 걸까? 무표정이 기본이던 루카스의 얼굴 위로 설핏 당혹감이 스쳤다.

16567321348942.jpg“……미안합니다. 그렇게 일찍 떠나셨다면 추억도 없을 텐데 제가 괜한 이야기를…….”

1656732134893.jpg“아뇨, 어머니에 대해 더 알 수 있다면 제겐 좋은 일이니까요. 신성국에서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리 물었더니, 루카스도 이내 짧은 침묵을 끝내곤 입술을 움직였다.

16567321348942.jpg“간략히 말하자면, 세상을 구원할 성녀가 되리란 신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지만…….”

1656732134893.jpg“그랬지만 성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셨고요? 그 부분은 저도 알아요.”

16567321348942.jpg“예.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던 신탁이 빗나간 것이었죠. 그래서 제가 아주 어릴 적에도 그 원인을 두고 사람들이 떠들어 대던 게 기억납니다.”

기억을 되짚어 보듯 그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16567321348942.jpg“누군가는 테레니아 가문이 여신의 분노를 사서 그리됐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그녀의 모친이 그녀를 태중에 지니고 있을 때 잘못된 약을 먹어서 그리됐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가 사악한 흑마법에 걸리는 바람에 그리됐다고도…….”

1656732134893.jpg“잠깐, 흑마법이요……?”

16567321348942.jpg“너무 진지하게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누군가의 추측일 뿐이니까. 신탁대로 강력한 성력을 타고났어야 할 그녀가 그러질 못했으니, 어떤 사악한 존재가 개입한 게 아닌가― 했던 거겠죠.”

그냥 떠도는 낭설 중 하나일 뿐이라는 투였다. 하지만 이시스가 알렉시스에게 흑마법으로 저주를 거는 것까지 봤던 나로서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1656732134893.jpg‘정말로 어머니께선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주에 걸리셨던 게 아닐까? 마족을 추앙하는 누군가가 구원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충분해…….’

그렇게 정신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루카스가 문득, 내 뒤쪽 침대에 누워 있는 에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6567321348942.jpg“그런데 아직도 남편분은 정신이 안 돌아온 겁니까? 제가 좀 봐 드릴까요?”

1656732134893.jpg“……?!”

에드에게 성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는 루카스를 보자 번뜩, 위기감이 스쳤다.

1656732134893.jpg‘안 돼! 직접 손대면 루카스가 에드의 마력을 느낄지도 몰라……!’

그 즉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곧바로 루카스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손을 쳐냈다.

16567321348942.jpg“……!”

루카스가 몹시 놀란 눈으로 제 손을 거둬들였다. 내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 버린 탓이다.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건만, 당황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덕분에 루카스만큼이나 나 또한 놀라게 되어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사과했다.

1656732134893.jpg“그게…… 죄송해요. 제가 잘 간호하고 있으니 안 봐 주셔도 괜찮아요.”

16567321348942.jpg“…….”

그는 놀란 듯 그렇게 조용히 굳어 있다가, 조금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16567321348942.jpg“이해합니다. 남편분을 마족으로 착각했던 전적이 있는 제가 손을 뻗었으니, 놀랐을 만하죠.”

1656732134893.jpg“네,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루카스를 의심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루카스로서는 좋은 의도로 손을 내밀었을 텐데, 내가 과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퍽 민망해졌을 터다. 이는 명백히 내 실수라서 그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16567321348942.jpg“다행입니다, 어쨌든.”

1656732134893.jpg“……네?”

16567321348942.jpg“감정도 없이 한 정략결혼이라고 전에 말했었잖아요. 그때 솔직히…… 좀 불행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방금 행동을 보니 부부간 애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그가 정략결혼이냐고 물었을 때 별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부터 쭉 나를 걱정했었나 보다. 내가 에드 없이 혼자 결혼식을 준비할 때 옆에서 재미도 없는 드레스를 같이 골라 준 것도 그래서일 것이고. 하지만 이젠…….

16567321348942.jpg“이젠 저도 가봐야겠습니다. 짐도 가져다드렸고, 이시스라는 자의 흔적도 찾아봤고, 치료할 사람도 없으니.”

1656732134893.jpg“가신다니, 어디로요?”

16567321348942.jpg“제국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을 놓쳤거든요. 예전부터 이렇게 서로 떨어지면 근방에서 가장 큰 신전에서 만나곤 했으니까, 수도에 있는 앨리시엘 대신전에 가 볼까 합니다.”

1656732134893.jpg“그래도 잠깐만요! 아직 가시면 안 돼요!”

루카스의 운명의 상대인 타라를 만나게 해 줄 때까진 그를 데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일단 가지 말라고 외쳤더니, 역시나 그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16567321348942.jpg“가면 안 되는 이유가?”

1656732134893.jpg“이유는…….”

전에는 수도까지 태워 준다고 말하며 붙잡을 수 있었으나, 이미 수도에 와 버린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타라랑 소개팅시켜 줄 테니 남으라고 솔직하게 밝힐 수도 없었다. 일행을 잃어버려서 불안할 사람한테 그런 소릴 하면 싸늘한 눈초리나 받게 될 테니까.

1656732134893.jpg‘큰일이야. 루카스를 붙잡을 합당한 핑곗거리가 전혀 없어!!’

그런 와중에 루카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16567321348942.jpg“이유는?”

1656732134893.jpg“…….”

16567321348942.jpg“거 봐요. 별 이유 없잖아.”

그는 실웃음을 흘리곤 기어코 몸을 돌렸다. 그렇게 그의 걸음이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

1656732134893.jpg“루카스가 저를 도와줬으면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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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도움을 바라는 이가 여기 있으니 떠나서는 안 되노라고- 나는 간신히 떠올려 낸 핑계를 그리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곤 루카스의 걸음이 일순 멈춘 틈에 재빨리 말했다.

1656732134893.jpg“지금 남편도 쓰러졌고, 가족들도 곧 북부로 떠날 거예요. 물론 막심 오빠가 제 곁에 남아 주긴 하겠지만…… 그 오빠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낯설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16567321348942.jpg“…….”

1656732134893.jpg“염치없지만, 조금 더 여기 남아 주셨으면 해요.”

루카스는 한동안 조용히 제 눈동자 안에 나를 담고만 있었다. 그렇게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강 알 것도 같았다.

1656732134893.jpg‘분명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빨리 가 봐야 한다는 사람을 고작 이런 이유로 붙잡았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본인을 위해’ 여기 남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니, ‘나를 위해’ 남아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는……. 체감상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비로소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러나 그 사이로 흘러나온 건 알겠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16567321348942.jpg“정말로 모르겠습니다.”

1656732134893.jpg“……네?”

16567321348942.jpg“왜 당신 부탁은 이렇게 신경 쓰이고 무시할 수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1656732134893.jpg“그 말씀은…… 여기 남아 주신다는 거죠?!”

16567321348942.jpg“예, 다만 제 일행들을 위해서라도 일단 수도에 있는 신전을 찾아가 보긴 해야 합니다. 대신 최대한 서둘러서 일주일 안에 돌아오죠. 괜찮습니까?”

1656732134893.jpg“물론 괜찮죠! 다시 와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폴짝폴짝 기뻐하는 나를 보며, 그는 왜인지 다소 씁쓸한 빛깔의 미소로 입가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곧장 황자궁을 떠났고, 다음 날 아버지와 닉 오빠도 예정된 대로 내 곁을 떠나 버렸다. 사실 가족들이 좀 더 함께 있어 주었으면 했지만, 북부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그들도 루카스처럼…… 아니, 어쩌면 루카스보다 훨씬 더 바쁜 신세였다. 그러니 붙잡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잘 지내라는 인사에 애써 괜찮은 척하며 웃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 뒤 느껴지는 공허함을 달래는 것은 물론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에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게 된 것은. 나는 매일같이 그에게 찾아가서, 미동도 없이 감겨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분명히 일어나겠지.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일어나겠지……. 하지만 그 기대는 매번 배신당했고, 마침내 닷새가 된 오늘은 기다리다가 지친 나머지 그의 침대에 기대서 깜박 잠까지 들고 말았다. 그렇게 지쳐 있던 내가 눈을 뜬 건 새벽, 누군가가 나를 안아 올리는 게 느껴졌을 때였다.

1656732134893.jpg“……?”

잠이 덜 깨서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실루엣이 어른거리며 비쳤다. 하지만 황자궁에서 지내는 남자 사용인들 중에 나를 이렇게 안아서 옮겨 줄 만한 사람은 내가 알기론 없었다. 다들 내 몸에 손대는 걸 상당히 조심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불편하게 잠들어 있더라도 보통은 그냥 어깨를 흔들어 깨워주었을 뿐이니까. 내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손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한 명뿐일 터였다. 나는 까슬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움직여서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소리 내 불렀다.

1656732134893.jpg“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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