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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내 이름을 떠올려줘 (55/102)

55. 내 이름을 떠올려줘2021.10.08.

이곳에서 내 숨이 끊어지면 아마도 나는 다른 곳에 가게 될 터였다. 에드의 다른 괴로운 기억이 있는 곳으로……. 혹은 아예 현실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떠나지 말아 달라는 그의 부탁을, 나로서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16567322212046.jpg“에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러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16567322212052.jpg“구해 준다고 해놓고 매번 혼자 사라졌잖아.”

내 손을 부여잡은 그의 손이 어느덧 잘게 떨리고 있었다.

16567322212052.jpg“이번엔 혼자 남겨 두지 마.”

붉게 물든 어머니의 육신을 부여잡고서 애원했던 그때처럼, 그는 떨면서 내게 그리 말했다.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이 그때의 기억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 혼자 남겨진 채 오열하던 작은 소년이 그에게서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힘이 솟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축 늘어졌던 손에 다시 힘을 불어넣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16567322212046.jpg“혼자 안 둘게. 같이 가자.”

16567322212052.jpg“……어디로.”

16567322212046.jpg“현실로. 나랑 같이 꿈에서 깨어나는 거야.”

내 말을 헛소리 취급하던 그가 이번엔 조용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처음으로 물었다.

16567322212052.jpg“어떻게?”

16567322212046.jpg“이게 꿈이라는 걸 인정해. 그리고…….”

가빠진 숨을 진정시킨 뒤, 이어서 그에게 요구했다.

16567322212046.jpg“그리고 내가 누군지 잘 기억해 봐.”

16567322212083.jpg

  이 꿈속에서의 그는 나를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에드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부디 에드가 그 현실을 기억해 내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16567322212046.jpg‘틀렸어. 눈이 자꾸 감기고 있어.’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내 생명은 자꾸만 사그라지려 들었다. 더 버티지 못하고서 손을 툭 떨구었다. 차가운 죽음의 감각이 몸을 휘감아 왔다. 결국 눈이 감기고 바로 코앞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즘,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67322212052.jpg“레냐.”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해 낸 순간, 비로소 모든 통증이 사라졌다. 주위가 새카맣게 변했다. 동시에 새하얀 빛들이 솟아 나와 우리의 몸을 감쌌다. 꿈에 들어오고자 의식을 시작했을 때 우리를 감쌌던 것과 똑같은 빛이. 드디어 악몽이 끝났구나― 그리 직감하며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 후 처음 보인 것은 익숙한 숲의 풍경이었다. 마법사들과 함께 왔던 그 숲의 호숫가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에드부터 일단 살폈다.

16567322212046.jpg“에드!”

에드는 며칠간이나 감겨 있던 눈을 마침내 뜨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현실에서 보는 저 은회색 눈동자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직 멍하게 누워 있는 그에게 곧바로 물었다.

16567322212046.jpg“정신이 드세요? 계속 눈을 안 뜨셔서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전하를 찾아갔었어요.”

16567322212052.jpg“알아. 전부 기억나. 꿈속에서 네가 했던 말, 행동, 그리고 내 뺨을 꼬집었던 것도…….”

16567322212046.jpg“……!!”

설마 그 일을 기억할 줄이야. 순간 당황하는 바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변명했다.

16567322212046.jpg“아, 아뇨, 그건 어린 시절의 전하께서 너무 못됐……이 아니라,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16567322212052.jpg“정말로 날 구해 줬어.”

변명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걸까?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운 이를 만난 것처럼 그리 한참을 쓰다듬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켜 나를 마주 보았다.

16567322212052.jpg“레냐.”

나는 이후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서 눈을 감았다. 역시나 곧 있자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계속 아픈 상태였으니 입 안이 까슬까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의 입술에선 그저 달콤한 향이 퍼져 왔을 뿐이었다. 마법으로 뭔가 했을까? 그런 잡생각은 어느덧 녹아서 사라졌다. 지금의 입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헌신적이고, 애절하며, 다정해서, 내게 다른 생각을 할 겨를 따윈 없었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속삭여 왔다.

16567322212052.jpg“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요즘 계속 피해 다녔던 거. 내 기억을 봐서 알겠지만 나한테 있어서 황실 인간들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약점이었어.”

16567322212046.jpg“약점…….”

16567322212052.jpg“그래, 약점. 내 가장 약하고 가장 부끄러운 부분.”

그는 씁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 이어서 말했다.

16567322212052.jpg“그런 부분을 네게 들키게 돼서 못 견딜 만큼 부끄러웠거든. 네가 나를 한심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16567322212046.jpg“……전 절대로 그런 생각 안 해요. 어쨌든 이젠 믿어주시는 거죠?”

16567322212052.jpg“아니.”

16567322212046.jpg“……?!”

이렇게 고생해 가며 구해 줬는데도 나를 안 믿는다니?! 황당한 나머지 벙쪄 있었더니 그가 나를 보며 깃털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16567322212052.jpg“사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서 여전히 두려워. 넌 항상 속내를 감추니까. 그래도 예전처럼 마냥 널 피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기보단 차라리…….”

그의 입술이 문득 내 귓가로 다가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리 가까이 와서, 그는 비밀스러운 말을 내게 속삭였다.

16567322212046.jpg“……네?!”

그걸 들은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내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 엄청난 말을 해놓고도 그는―

16567322212052.jpg“돌아가자. 신혼집을 너무 오래 비워 뒀잖아.”

―라며, 여상스럽게 나를 대할 뿐이었다. * * * 일이 무사히 끝났으므로 마법사들에겐 짭짤한 보수를 챙겨 주었다. 내 딴엔 그리 큰돈이 아니었는데, 펠리시는 꽤 감동한 모양이었다. 이런 거금은 태어나서 처음 만져 본다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고, 내게 감사의 의미로써 꽤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전해 주었다.

1656732224114.jpg“이게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지라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고민했는데…….”

16567322212046.jpg“네?”

1656732224114.jpg“요즘 이시스라는 자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마탑의 주인이 되려고 탑의 핵심 인물들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16567322212046.jpg“……선동이요?!”

1656732224114.jpg“예, 어쩌면 그저 소문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16567322212046.jpg“네, 조심하도록 할게요. 중요한 이야기 들려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물론 나는 이 이야기를 곧장 에드와 공유했고, 그는 마탑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막심 오빠가 짐을 싸 들고서 나를 찾아온 건 그렇게 대강 일이 정리됐을 즘이었다.

16567322256246.jpg“이제 가 볼게. 너도, 2황자도 서로 아끼고 챙겨 주는 거 보니까 내가 더 있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16567322212046.jpg“정말? 벌써 간다고? 조금만 더 있지…….”

며칠 재워 달라고 했을 땐 그냥 귀찮기만 했는데, 어느덧 정이 들어 버렸나 보다. 그가 떠난다고 하니 아쉬움이 먼저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올 때와 달리 퍽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16567322256246.jpg“길드장으로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둘 수가 없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돌연 뺨과 귓가를 붉게 물들이더니, 놀랄 만한 사실을 툭 알려 주었다.

16567322256246.jpg“연인이 지금쯤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

16567322212046.jpg“잠깐, 만나는 사람 있었어?!”

16567322256246.jpg“응, 사실 꽤 오래전부터 만나던 사람인데, 나랑 어머니처럼 붉은 머리거든. 그래서 청혼은 계속 미뤄두고 있는 상황이었어.”

16567322212046.jpg“……청혼을 미뤘다고? 그것도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냥 붉은 머리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6567322256246.jpg“나 실은 어릴 적에 어머니한테 되게 많이 투정 부렸었거든. 세간에서 빨간 머리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잖아. 그래서 왜 나를 이런 머리 색으로 낳았느냐고 원망 많이 했었어.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 건강이 나빠지셨고…….”

16567322212046.jpg“아아…….”

16567322256246.jpg“어린 마음에 그 일로 후회 많이 했었지. 내가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시켜 드려서 그렇게 되신 건가, 싶어서.”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지닌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막심 오빠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속에 품어 왔노라고 털어놓았다.

16567322256246.jpg“그래선지 다 커서도 괜히 빨간 머리만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더라고. 어머니를 그렇게 괴롭혔던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이번에도 상처만 잔뜩 주게 되는 건 아닐지…… 괜히 생각만 많아지고.”

16567322212046.jpg“그랬구나…….”

16567322256246.jpg“근데 이젠 머뭇거리는 건 관두기로 했어, 네 덕분에.”

16567322212046.jpg“내 덕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16567322256246.jpg“널 보니까 고작 머리 색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내가 되게 한심하게 느껴지더라. 나보다 어린 너도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난 뭐 하는 건가 싶어서.”

16567322212046.jpg“한심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16567322256246.jpg“한심한 거 맞지, 뭐. 어쨌든 네 덕에 용기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는 평소 입가에 걸고 다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깨끗하게 지웠다. 그리 진지해진 표정으로, 그가 다시 나를 마주했다.

16567322256246.jpg“고마워. 오빠로서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멋지게 자라 준 것도 고맙고.”

16567322212046.jpg“…….”

이윽고 우리는 서로를 포옹했다. 사실 도움을 받은 것도, 고마워해야 할 것도 나건만……,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정말로 미안하고 고마웠노라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러다가 우리의 포옹이 끝났을 때―

16567322256246.jpg“그러니까 이거 받아.”

그가 불현듯 내 손에 묵직한 금속질의 물체를 툭 떨어트렸다. 잘 보니 보석이 잔뜩 박힌 화려한 모양새의 열쇠였다.

16567322212046.jpg“이게 뭐야? 열쇠??”

16567322256246.jpg“응, 네 열쇠잖아. 설마 본인이 직접 나한테 맡겨 놓고서 잊은 거야?”

16567322212046.jpg“내가……?”

16567322256246.jpg“너 혼자 보관하면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다가 너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때 돌려달라며. 정말 기억 안 나……?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가?”

사실 오래 지나서가 아니라, 그런 약속을 한 게 애초에 내가 아니어서일 것이다. 오래전이라면 이 열쇠를 그에게 맡긴 건 아마 ‘원작의’ 레냐였을 테니까. 그렇다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순 없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67322212046.jpg“아아, 기억나는 거 같아.”

16567322256246.jpg“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랑 제대로 결혼한 거 같아서, 이제 줘도 되겠다 싶더라고.”

정체불명의 열쇠를 그렇게 내 손에 쥐여 준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67322256246.jpg“후……. 이걸로 내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다. 진짜로 가 볼게.”

16567322212046.jpg“음? 아, 응. 언제든 또 놀러 와. 오빠라면 항상 환영이야.”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더 포옹한 뒤 정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내게 그리움을 일깨워 주었던 둘째 오빠의 뒷모습이 그렇게 차츰 멀어져 갔다. 더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즘. 나는 열쇠를 가지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16567322212046.jpg‘이 크기 열쇠라면…… 혹시 그건가?’

며칠 전 루카스가 옮겨 준 짐 상자 속에서 잠긴 나무 함을 하나 발견했었다. 그 함에 있던 열쇠 구멍이 딱 이 열쇠랑 맞을 듯한 크기였던 게 기억났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함을 꺼내어 열쇠를 꽂아 보니― ―달칵. 굳게 잠겨 있던 잠금장치가 손쉽게 풀려버렸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함을 천천히 열었고, 그 내용물을 살폈다. 그 안에 몇 년간 고요히 잠들어 있던 물건…… 그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보석이나 금화는 아니었다.

16567322212046.jpg‘기억의 구슬……?’

그 안에는 기억의 구슬이 들어 있었다. 나는 구슬의 받침대와 그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확인하였고, 그 순간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16567322212046.jpg‘잠깐, 이거…… 이거 내가 전에 에드 나오는 꿈 꿨을 때! 그 꿈속에서 에드가 들여다보던 그 구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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