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날 혐오하더라도 내 품 안에서만2021.11.05.
“네……?!”
그리 어리숙하게 되물을 때가 아니란 걸 나도 알았다. 당신을 끔찍하게 여긴 적 따윈 한 번도 없노라고, 당장 에드에게 침착하게 해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침착할 수 있을까. 이혼 서류를 들켜버린 이 시점에서. 그는 내가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었다고 여긴 듯, 아픈 말을 되풀이했다.
“다 이해한다고 말했어. 네가 날 혐오하더라도.”
“아, 아뇨. 전…….”
“그래,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내 어깨에 힘없이 고개를 기대고 있던 그가 비로소 똑바로 섰다. 그러곤 널브러진 이혼 신청서를 주워 들더니, 내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아앗…….”
“날 혐오하더라도 내 집에서, 내 품 안에서만 해 줘. 부탁할게?”
어버버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서류들이 찢겨 나간 것은.
그는 보란 듯이 그것을 천천히 찢었고, 그다음 겹쳐서 또 천천히 찢어 냈다. 서류들을 완전히 가루처럼 잘게 찢어 내는 동안 그의 눈빛은 명백한 악역의 그것이었다. 제게 반박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차가운, 그런 눈빛.
“푹 쉬어. 급한 일만 끝마치고 밤에 다시 올 테니까.”
남편의 달콤한 애정 표현인지, 아니면 살벌한 결투 신청인지……. 그는 그렇게 영 헷갈리는 소릴 속삭여 건네며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
생소한 자극에 놀라서 휘청거리는 나를 그가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그러곤 날카로운 꽃병 파편이 흩뿌려진 바닥을 지나, 침대에 내려 주었다.
‘뭐지……? 꿈인가……?’
침대에 앉아서 엉망이 된 방을 보며 내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무렵엔, 이미 그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 * * 이시스가 느긋한 걸음으로 회의장 내부에 들어섰다. 그곳엔 일찌감치 열댓 명의 마법사들이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시스를 추종하기로 맹세한 자들로, 에드에게 전부터 불만을 품어 온 인물들로만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에드에게 품고 있는 불만이란 대략 이랬다.
“명문가 딸과의 혼인으로 권력을 쥐는 일에만 혈안이 된 애송이가 마탑의 주인이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에드가 권력에 눈이 멀어 마탑주로서 이루어야 할 본래의 목적…… 즉, 마계로 이어지는 문을 연다는 그 목적은 까맣게 잊었다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었다. 이시스는 그들의 그런 가려운 부분을 솜씨 좋게 긁어 주었고, 마침내 이만한 인원을 끌어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단, 그들 전원은 두꺼운 가면과 망토로 본인들의 모습을 철저히 감춘 채 앉아 있었다. 제 정체를 훤히 드러내 놓고서 마탑의 주인을 상대하기란 겁나는 일이기에. 이시스도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의아함을 느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왜 이리 조용하지……?’
에드에게 반감이 심한 자들이 처음으로 모인 자리이니만큼 다들 흥분감을 드러내고 있을 줄 알았건만. 전원이 고개를 수그린 채 앉아 있기만 했다. 이시스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상석에 가서 앉았다.
“일전에 서신으로 고했듯이, 그 물건이 황궁의 지하에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냈다.”
“…….”
“다만 그곳에 접근하는 게 나 혼자만으론 어려우니 그대들과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물건을 그자보다 먼저 손에 넣는다면, 그의 존재 자체를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리는 것도 무리한 꿈이 아니겠지.”
“…….”
“……이봐?”
그쯤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확신한 이시스가 제 옆에 앉은 자의 망토와 가면을 휙 벗겨 보았다.
“……!!”
가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낸 마법사의 얼굴이 기괴하리만치 창백했다. 산 자의 혈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제대로 보고자 살짝 건드리자마자 곧 마법사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설, 설마……?’
이시스는 즉시 그 옆자리에 앉은 다른 자의 가면도 벗겨 보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죽어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 모두를 살해한 뒤, 가면을 씌워서 살아 있는 것처럼 앉혀둔 것이었다.
‘그 망할 애송이가 벌써……!!’
이시스가 이런 짓을 한 범인을 떠올려 냈을 때. 멀리 떨어진 자리에 다른 시체들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에드가 가면을 벗으며 일어났다.
“뭘 그리 놀라? 나 몰래 뒤에서 수작을 부릴 작정이었으면 이렇게 될 것도 예상했었어야지.”
에드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들떠 있었다. 이시스의 수족들을 전부 처리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이시스까지 처리하고자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런 에드를 보며 이시스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어떻게 눈치챘지? 그 여자에게 정신 팔려서 마탑엔 한동안 발길도 뜸하더니…….’
이렇게까지 한 것으로 보아 상황을 다 아는 듯 보였지만, 이시스는 일단 잡아떼는 편을 택했다.
“……수작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
“제가 이들을 수집한 건 그 열쇠를 에이드리언 님께 바치기 위한…… 큭!!”
이시스의 말이 이어지던 중 다가온 에드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서 벽으로 밀쳤다.
“같잖은 헛소리 좀 그만해 봐. 안 그래도 지금 집안일 때문에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까.”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듯, 현재 이시스를 보는 에드의 눈이 살의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에게 이 정도의 동요를 일으켰다면…….
‘집안일…… 그 여자와 관련된 문제인가?’
이시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자신과 에드가 반목한 상황에는 항상 레냐가 끼어 있었으므로. 그가 레냐에게 진심으로 살의를 느낀 순간, 에드가 그의 목을 더욱 세게 조였다.
“그래, 얌전히 있어야지. 이미 다 알고서 왔다고.”
“어, 어떻게…….”
“네놈이 뒤에서 수상한 짓거릴 하고 있단 얘길 들었거든.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라 뒷조사를 해 봤지. 평소 행실이 수상하던 녀석들 위주로. 그러다 그중에서 몇몇 녀석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물건을 발견하게 됐고.”
에드가 본인의 주머니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셔츠 소매 끝자락을 단추처럼 장식하는, 은빛의 커프스 링크였다.
“봐, 익숙한 물건이지?”
“……!”
“여기에 마법을 걸어서 녀석들을 감시하고 있던 모양이야? 전에 황자궁에서 비슷한 짓거릴 하다가 걸려 놓고 아직도 그 관음증을 못 고쳤나?”
분한 듯 실핏줄이 선 이시스의 눈앞에서 에드가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여하튼 이걸 가진 놈들을 싹 잡아다가 심문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
“네놈의 진짜 목적도 그놈들이 다 불었으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 마. 그보다는 차라리 유언이나 생각하는 게 더 낫겠지.”
유언을 말하라는 의미로 에드가 이시스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이시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유언이 아니었다.
“잠,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번만…… 단 한 번만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일주일…… 아니, 하루 안에 열쇠를 찾아와서 바치겠습니다. 그게 있으면 시간을 되돌려서 당신의 모든 과오를 없었던 일로……!!”
긴말을 들어 주다 지친 에드가 이시스의 복부에 마력으로 만들어 낸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을 뽑자 이시스의 육신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잠깐 경련하는가 싶더니, 곧 축 늘어져서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러게 그냥 유언이나 생각하라니까.”
제대로 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이시스의 시신 위로 에드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 그러나 곧 다시 멀어졌다. 오래 봐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500년도 넘게 이어진 이시스의 긴 삶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이 짧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 * *
‘후…… 왜 이리 늦지?’
아까 에드와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뭔가를 하려고 들 때마다 에드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떠오른 까닭에.
“푹 쉬어. 급한 일만 끝마치고 밤에 다시 올 테니까.”
밤에 다시 온다는 그 말은, 아마도 밤에 와서 결판을 내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덕분에 초조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변명거리는 다 준비해 뒀기도 하고.’
그때,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명하자, 킬리안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곤 새 소식을 전해주었다.
“황자비님, 방금 전하께서 오셨습니다만…….”
“지금? 여기로 오고 계셔?”
“아뇨, 오늘은 아무래도 다른 방에서 쉬셔야 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
그가 오기를 한참 기다렸건만. 나는 얼어붙은 입술로 더듬더듬 물었다.
“……나한테 화나서……?”
“아뇨, 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황자비님의 잘못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은 부정한 일’을 해서, 황자비님을 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일…….”
“그러니 기다리지 마시고 푹 쉬시지요.”
전에도 에드는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했던 적 있었다. 그땐 나도 그가 마음을 열어 주길 마냥 기다렸었다. 그에게 멋대로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 결과 닐스가 내게 접근하는 틈을 만들어 주게 되었고, 에드는 이후 긴 잠에 빠져들 뻔했다. 과거의 일로 배운 바가 있기에,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난 지금 봐야겠어.”
“예?”
“말해 줘, 킬리안.”
나는 어느 때보다 단호한 태도로 킬리안을 마주했다. 그리고 거부하지 못하도록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지금 어디 있어, 내 남편?”
* * * 마탑을 정리하고서 돌아온 에드는 곧장 별궁 게스트룸의 욕실로 왔다. 그리고 온갖 향유를 들이부은 물에 몸을 담갔다. 타인을 해쳐 보기는커녕 모진 소리 한 번 못 해 봤을 레냐……. 그런 레냐에게 이시스의 사악한 피 냄새가 밴 채로 다가갈 순 없었으므로.
“사악한 피……?”
그는 조용히 그리 읊조리곤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에 유모가 그의 몸에 흐르는 피를 그리 불렀던 것이 하필 지금 떠오르고 말았다. 악몽에서 구원받은 이후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믿었던 레냐마저 몰래 이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새삼 충격받은 탓일 터였다. 또다시 이런 아픈 기억이 떠오른 것은.
‘정말로 나를 혐오하나? 내 몸속에 흐르는 마족의 피 때문에……?’
마음의 깊은 곳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그는 부서지도록 주먹만 움켜쥐었다. 자신의 혈통을 두고 누가 뭐라 해도 상처받지 않겠노라고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는데도 소용없었다. 마음을 줬던 상대의 배신은 언제나 이토록 고통스러웠다. 그 뒤로 그는 지겨우리만치 긴 시간 동안 차가운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어차피 침대에서 그를 기다려 줄 이도 지금은 없을 테니 서두르지 않았다. 그 냉기 덕에 끓어오르는 감정들이 조금 가라앉았을 즘. 비로소 그는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아무도 없는 차가운 침대에 누워 일찌감치 잠드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분명 그럴 계획이었으나…….
“전하.”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 레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