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가지세요, 그럼.2021.11.09.
“기다렸어요, 전하.”
에드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나는 그가 있을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혹시 안에서 익사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다행히 그는 내가 그런 마음을 먹기 전에 욕실을 나왔고, 나는 당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나를 피해 두 걸음 물러섰다.
“오지 마시죠. 오늘은 조금 지저분한 일을 했으니까.”
“지저분한 일……?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방금 씻으셨잖아요?”
“……고작 씻는 걸로 지워질 만큼 가벼운 죄를 지은 게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대강 예상이 됐으나 일단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서 내 눈을 피해 버렸다.
“그 부분은 답하기 힘들군요. 이미 저를 혐오하는 부인께서 이 얘길 들으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어서.”
“……혐오한 적 없어요.”
“거짓말. 벌써 이혼까지 준비해 둔 사람이 그런 말 해 봤자 안 믿어요.”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꺼낸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는 굳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 부분은 이따 설명해 드릴게요. 어쨌든 저는 전하를 혐오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오늘 어떤 일을 했다고 해도 혐오하지 않을 거고요.”
“…….”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디 한번 보자는 마음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그런 말을 툭 꺼내 놓고는 내 반응을 살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가 다시 분명하게 밝혔다.
“이시스를 찾아내서 죽였습니다.”
“…….”
“어때요, 마족의 피가 섞인 잡종이나 할 법한 혐오스러운 짓이죠?”
그는 아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웃음임에도 전혀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낮고 음울한 웃음을. 아마 내가 자신의 예상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이 그는 그토록이나 우습고, 또 서글펐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예상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잘했어요.”
그의 머리에 손을 살포시 얹어,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쓰다듬었다. 그는 내 그런 돌발 행동에 놀란 듯 웃음을 멈췄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손끝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족스레 헤집었다.
“나쁜 사람이었잖아요. 알렉시스를 조종하고, 그래서 절 죽이려 하고……. 아마 그냥 살려 뒀다면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
“그러니까 본인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지 마세요. 잡…… 어쩌고 하는 나쁜 말도 쓰지 말고요.”
에드를 위로하기 위한 가식이 아닌, 내 진심이었다.
‘에드는 전에도 충분히 이시스를 죽일 수 있었어. 이시스가 황자궁에 수족들을 심어 뒀을 때도…….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던 건, 나름의 자비였겠지.’
그런 자비를 받고도 이시스는 잘못을 반복했다. 그러니 이시스를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부인.”
계속 밀어낼 것만 같았던 그가 비로소 먼저 나를 끌어안았다. 대체 욕실에서 뭘 한 건지 그의 온몸이 얼음장 같았다. 감기 들겠구나― 걱정되는 마음에 나도 그를 한껏 끌어안자, 파랗게 질려있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혐오하는 게 아니면…… 그럼 왜 그런 걸 준비해 뒀어요?”
“이혼 신청서요?”
“그럴 필요 없었잖아. 나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한 채로 머뭇댔다. 이것을 밝히려면 내 가장 큰 비밀을 먼저 그에게 털어놓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여러모로 주저되었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채 내게 답을 구하는 그의 모습에 일단은 입을 열었다.
“제가 이혼을 준비했던 건 말이죠……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어요.”
에드가 나를 품에서 잠깐 떼어 놓곤 멍한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럼 저 혼자 전하를 사랑하다가 비참하게 버려질 것 같아서, 그래서 떠나려고 한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전 다 알거든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에드는 제 마음이 진심이 아님을 어떻게 장담하냐고 물었고,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전 장담할 수 있어요. 전하께서 제게 진심이 아니시라는 거.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진심이 되진 않으실 거라는 거.”
그로서는 퍽 답답하게 여겨지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장담할 수 있다고만 했으니……. 정말로 미안한 일이나, 그 결정적 이유만은 이번에도 감춰야만 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아는지 설명하려면, 제 가장 큰 비밀을 밝혀야만 해요.”
“…….”
“그리고 전 그게 정말로 두려워요. 아마 다들 저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거거든요. 아버지도, 오빠도, 한나도, 그리고…… 전하마저도요.”
떨리는 내 시선을 들키지 않고자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 비밀이 뭔지는 말해 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전하를 싫어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건 진짜예요. 그것만은 다 걸고서 약속할 수 있어요.”
말을 끝맺을 즘엔 내 목소리에도 물기가 서려 있었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시스가 죽었다고 했으니, 이 세계가 원작에서처럼 파멸할 가능성도 크게 줄어든 셈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에드의 곁을 떠날 날도 훌쩍 가까워졌구나…….’
이시스가 죽고 세계가 멸망할 확률이 줄어든 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다. 그를 떠나야 할 날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지금 당장 그가 내게 실망했다며 나를 밀쳐 낼 것이 두려웠다. 그러니 싫어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마음 깊은 곳에 품은 것이다. 그에게 마음 주지 않고자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
원작의 레냐가 그랬듯 나 또한 이토록 비참한 짝사랑을 시작하게 됐으니, 퍽 서러운 일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로 조용히 흐느끼고 있던 때였다. 문득 그가 손끝으로 내 턱밑을 살며시 받쳐서 들어 올렸다.
“결론은, 제가 싫지 않다는 말씀이죠?”
“네, 그건 절대 아니…….”
제대로 대답할 틈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를 덮었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입술 사이를 헤집으며 들어왔다.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나를 그가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도망칠 수도 없게 된 상황. 나는 그가 내 입술에 쏟아 내는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잠깐…….”
내가 무심결에 흘린 그 말 또한 곧 그의 입맞춤에 파묻혀 사라졌다. 이미 나를 벽까지 몰아붙여 놓고 무엇이 그리 급했던 걸까? 그는 말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가쁘게 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입술을 뗐다.
“부인.”
나는 입 맞추는 동안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어느샌가 끈이 풀리고 벌어진 그의 가운 틈새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나신이 보였다. 달빛 속에서 빛나는 그의 은발과 황족답게 투명하고 새하얀 살결……. 그는 인간과는 명백히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처럼 여겨질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다음엔 천천히 손끝을 내려, 단단하게 붙은 가슴과 복부 위를 스치듯 만졌다.
내 손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럴수록 그의 시선에 서린 열망은 짙어졌고, 마침내 그의 하복부 근처에 손끝이 닿은 순간―
“보여 줄게요, 내가 부인께 얼마나 진심인지.”
그가 그리 속삭이며 나를 받쳐 들곤 침대로 데려갔다. 그 말처럼, 내 목덜미에 곧이어 쏟아진 그의 입맞춤은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했다.
“내 진심을 못 믿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믿게끔 만들면 되니까.”
“…….”
“그리고 설령 부인의 그 모든 말이 그저 저를 밀어내기 위한 거짓말이고, 실은 제 마족의 피를 정말로 혐오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비로소 살결 위에 대고 있던 입술을 떼고서 나를 보았다. 그러곤 눈가를 순진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전혀 순진하지 않은 말을.
“그래도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부인의 마음이 어떻든 나는 부인을 놔줄 생각이 없거든요.”
새하얀 모습으로 새카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새삼 깨달았다.
‘결국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구나.’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건, 주지 않건― 내가 그를 떠나건, 떠나지 않건―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그는 끝내 나를 가졌을 것이다. 원작에서 그러했듯이.
‘……잘됐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됐으니 불안하고 초조해야 옳은데, 이번에도 내 예상과 정반대의 감정이 솟았다. 오히려 지금껏 마음을 옥죄던 부담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 하러 그를 밀어내고 도망치려 애쓴단 말인가. 어차피 내 멋대로 도망칠 수 없는 관계인데.
“가지세요, 그럼.”
툭, 그리 허락의 말을 던지자 그가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서 나를 응시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눈빛으로 되묻는 듯하여,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던 손을 치웠다. 이보다 더 명확한 허락의 몸짓은 없을 터. 역시나 그는 내 뜻을 이해했고,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미약한 머뭇거림마저 이내 내던져 버렸다. * * *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뜬 후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포근한 체온 탓에 잠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잠기운을 몰아내고자 몸을 꼼지락거렸더니, 귀 바로 근처에서 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늦게 깼네요. 혹시 아직 피곤해요?”
“으으음……. 살짝요……. 그리고 허리랑 여기저기가 너무 아파요…….”
“아아, 미안해요. 어제 너무 무리하게 만들어서.”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누른 채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말로는 미안하다면서, 일어나자마자 또 괴롭히려고 시동을 걸고 있는 그였다. 나는 그가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전에 몸을 돌려서 그를 마주했다. 마주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도 보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 세수를 안 해서 꼬질꼬질할 텐데도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내 얼굴 곳곳에 자꾸만 입을 맞췄다. 나는 그런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막아 냈다. 함께 장난치는 이 시간이 물론 좋지만, 그 전에 다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였다.
“아침부터 이런 무거운 이야길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무거운 얘기요?”
그의 물음에, 나는 조심스럽게 내 고민거리를 꺼내 들었다.
“전하께선 혹시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아…….”
이해한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의 입장에선 조금 못마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 워낙 격정적인 밤을 보냈던 탓에, 이런 걱정이 슬그머니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나와 달리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있죠.”
“어떨 것 같아요?”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끝……?”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 같아요. 분명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겠죠. 후…… 아침에는 참으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네요. 어서 만듭시다.”
왜 갑자기 2세를 만드는 걸로 결론이 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어젯밤처럼 또다시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그를 급히 막아 냈다.
“아뇨, 아뇨!! 저는 각오라든가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게 있는지 여쭌 거예요!!”
커다란 강아지처럼 무작정 달려들던 그가 내 외침을 듣고서 멈췄다.
“각오? 계획?”
그는 내 말을 똑같이 되뇌더니 입가를 미소로 물들였다. 아버지답게 인자한…… 그러나 동시에 악역답게 사악한 미소로.
“저를 뭐로 보고……. 당연히 전부 계획해 뒀죠. 남들은 상상도 못 할 아주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정말요? 일부분이라도 좋으니까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그 계획.”
그가 곧 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순진무구하게 미소 지었다.
“예, 우선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겠네요. 예컨대 닐스…… 그를 5년 안에 암살하는 것부터요.”
“…….”
그가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해 준 그 계획은, 공교롭게도 순진함과는 거리가 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