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네게 나는 뭐였지?2021.11.23.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야. 그냥…… 미안해.”
떠나기 전, 레냐는 그렇게 사과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밖에는 아무런 말도…… 심지어는 변명도 하지 않고서,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붙잡고자 타라는 사력을 다했으나―
‘목소리가 안 나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두 다리조차 지금은 돌 더미에 파묻힌 것처럼 꼼짝도 하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레냐는 천천히 멀어졌고, 그녀의 걸음이 향하고 있는 그곳엔 그 남자가 있었다. 세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타라에게서 레냐를 빼앗은 존재가. 타라는 그 증오스러운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핏줄이 설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이드리언!!’
그러는 동안 레냐는 어느덧 그의 앞에 섰다. 그의 미소가 순 거짓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오직 그만을 제 눈에 담았다. 정작 자신의 뒤에 있는 친우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런 레냐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타라는 아득한 절벽으로 내리꽂히는 감각을 느꼈다.
네게 나는 뭐였지? 내게 너는 나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는데. 원망과 억울함.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잠겨 들게 할 만큼 깊은 슬픔. 그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타라는 꿈에서 깨어났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잠기운이 가신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고,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기 와서부터 자꾸 왜 이러지…….’
2황자인 에이드리언을 처음 봤을 때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레냐를 붙잡았다. 생판 처음 봤을 뿐인 2황자가 숨 막힐 만큼 불길하게 느껴졌던 까닭에. 그러고도 모자라 또 이런 이상한 꿈을 꾸고 만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해. 중요한 날이니까.’
타라는 객실에 딸린 욕실에서 찬물로 샤워하며 정신을 똑바로 깨웠다. 오늘은 레냐가 준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고자 오염된 소울스톤 광산에 가는 날이었다. 이런 중요한 날 아침부터 어수룩하게 굴 순 없었다. 그렇게 대강 채비를 끝낸 뒤 밖에 나오니, 앞으로 함께할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레냐, 루카스, 그리고…… 에이드리언 황자가.
“…….”
에드가 침묵한 채로 타라에게 찬 시선을 쏘아 보냈다. 타라 또한 그런 에드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둘 사이에 냉기가 감도는 가운데, 레냐가 애써 타라에게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인원이 더 필요할까요? 오늘은 타라의 실력을 보기로 한 날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전하께서 직접 나설 테니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하셔서 그냥 이렇게 넷이서만 가기로 했는데…….”
“괜찮습니다. 사람은 더 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도 사실 충분하니까요.”
타라는 그리 자신감을 드러내곤 제 정령을 소환했다. 그녀의 정령, ‘로나’는 꽤나 복잡미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사자의 몸통에, 등엔 날개가 달렸으며, 주둥이는 새처럼 부리의 형태를 띤…… 흔히 그리핀이라고 불리는 생명체였다. 그녀의 정령이 그리핀이라는 걸 알고 있던 레냐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놀란 것은 그다음, 타라가 자신에게 손을 뻗었을 때였다.
“……?”
제게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만 보는 레냐에게 타라가 수줍게 웃어 보였다.
“잡아 드릴게요.”
“저를 태워 주실 건가요?”
“제 고용주시니 불편함 없게 모셔 드려야죠. 이 애가 조금 험상궂게 생기긴 했지만, 이동할 때 등에 태운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게끔 많이 배려해 주거든요.”
“아아, 그럼 좋아요. 안 그래도 제가 멀미가 심해서 흔들리지 않게 태워 주신다면…….”
그때 자신의 정령을 소환하고 있던 에드가 불만을 드러냈다.
“잠깐만요, 부인. 제 뒤에 안 타신다고요?”
“네, 오늘만요. 타라랑 단둘이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그전엔 따로 대화할 만한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
“괜찮죠?”
괜찮냐고 묻는데도 에드의 구겨진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레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상스러운 얼굴로 에드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까치발을 세워, 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
비로소 에드의 구겨진 표정이 펴졌다. 타라와 함께 가도 불평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제 앞에 타세요. 제가 뒤에서 붙잡아 드릴게요.”
타라가 레냐를 제 앞에 태우곤, 곧장 로나를 출발시켰다. 목적지인 소울스톤 광산을 향해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에드가 고개를 돌렸다. 제 뒤에 남은 나머지 한 명을 보기 위해서.
“…….”
“…….”
루카스와 단둘이 남았으니, 이제 그를 목적지로 데려가는 것도 에드의 몫이 되었다. 마음대로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정령이 없는 그에게 혼자 알아서 오라고 하면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므로.
“하…….”
에드가 절망감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루카스는 도리어 실웃음을 흘렸다.
“저는 손 안 잡아 줍니까? 저 둘은 벌써 꽤 친근해 보이는데.”
“……알아서 올라타는 게 좋을 거야. 난 남자랑 손잡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라, 잡아 주는 척하면서 확 밀어 버릴 수도 있거든.”
에드의 뾰족한 대꾸에도 루카스는 재차 웃음만 흘렸다.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었던 에드가 레냐 때문에 툴툴대는 게 내심 재밌었던 까닭이었다. 그사이 에드가 먼저 블랙의 등에 올라탔고, 루카스도 그의 뒤에 따라서 올라탔다. 제 정령에 남자를 태우는 건 처음인 상황. 에드의 눈가가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좀 떨어져 봐. 닿으면 안 될 게 닿잖아.”
“여기서 더 뒤로 가면 떨어집니다. 도착할 때까지만 좀 참으시죠. 아니면 제가 앞에 탈까요?”
피식 웃으며, 루카스가 에드의 귓가에 불필요할 만큼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뭐, 그래 봤자 누구의 것이 누구에게 닿느냐만 달라질 뿐이겠지만.”
“……하아…….”
뒤에 남자를 태운 거로도 모자라서 이런 웃기도, 화내기도 뭣한 농담이나 듣게 될 줄이야. 에드는 레냐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며, 블랙을 출발시켰다. * * * 타라의 정령은 빠르면서도 흔들림이 적었다. 또한 특유의 능력으로 주위에 바람 장벽을 만들어, 거센 바람도 알아서 차단해 주었다. 덕분에 우린 멀미 따위 없이 편안하게 잡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일전에 응접실에서 2황자님을 처음 뵈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타라가 불현듯 꺼낸 그 말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 놀라셨나요? 어떤 부분에서요?”
“제가 상상하던 것과 분위기가 달라서요. 소문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아, 혹시 이런 대화 불편하십니까?”
“아뇨, 불편할 건 없죠.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전하께서 결혼 후에 실제로 많이 유해지셨으니까요.”
“그건…… 결혼 전엔 소문과 같았다는 말씀인가요?”
“으음, 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차가운 분이셨어요. 사람을 쉽게 믿지도 않으시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타라가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팠는지는 대강 예상이 됐기에, 나는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궁금하세요? 그런데도 결혼한 이유.”
“……예. 그런데 너무 깊은 곳까지 여쭙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어차피 말하기 곤란한 이유도 아니니까요.”
나는 가볍게 웃어 준 뒤, 그녀에게 솔직히 알려 주었다.
“제가 전하와 결혼한 건, 제게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어요. 우린 각자 가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죠. 정략결혼 한 부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아…….”
“하지만―”
곧 이어질 내 말을 들으려는 듯 타라가 침묵을 지켰다. 정령의 날갯짓 소리만 외롭게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독백하듯 고했다.
“하지만 ‘결혼을 지속하는 이유’는 그것과 같으면서도 조금 달라요.”
“결혼을 지속하는 이유……요?”
“네, 사실 결혼을 통해서 이미 제 초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거든요.”
에드와 이시스가 반목하게 됐으니 세계 멸망을 막는다는 목적은 30%가량 이루어진 셈이다. 그 부분은 적당히 생략한 채로 나는 타라에게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도 쭉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건, 여전히 그가 제게 필요해서예요. 다만, 이번엔 그의 권력, 재력, 수완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나는 타라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에이드리언 전하, 그분 자체가 필요해진 거죠.”
“흐음……. 즉, 그분의 본연을 사랑하게 되셨다는 겁니까?”
“맞아요, 정확해요.”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는 새 미미하게 들떠 있었다.
“어쨌든, 이제 제겐 꼭 필요한 사람이 됐어요. 훗날 그가 저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더라도 그 사람 옆에 있어야 할 만큼.”
“알더라도……라는 말씀이군요…….”
“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에요. 불완전하던 삶이 비로소 완전해진 기분과 비슷해요. 그러니까 타라도 그런 상대를 꼭 만났으면 해요.”
내 덕담…… 아니, ‘예고’에 더 가까울까? 타라와 루카스를 반드시 이어 줄 계획이었으니까. 어쨌든 내 예고를 듣고서 타라는 침묵을 삼켰다. 설핏 본 그녀는 왜인지 다소 침울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낯빛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거리라도 있나 보다― 라고 여기며, 나는 구태여 그녀에게 말을 걸어서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린 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만약에 말이죠, 당신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남편 분을 해치…….”
“앗, 타라! 목적지에 다 온 것 같아요!”
타라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으나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 먼 앞쪽에 우리의 목적지가 보인 까닭이었다. 우리는 곧 그 목적지인, 새하얀 빛깔의 저택 앞에 내려섰다.
“여깁니까?”
이곳이 에드가 미리 말해 준 ‘그 장소’임을 확신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족을 퇴치하는 동안 다 같이 여기서 묵을 거예요. 그나저나 전하와 루카스는…… 앗, 벌써 왔네요.”
내가 말하는 틈에 에드의 블랙도 곧이어 착륙했다. 뒤를 살피지 않아서 몰랐는데, 바짝 붙어서 쫓아오고 있었던 듯했다. 에드는 오는 동안 지루했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내려섰고, 루카스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내리자마자 에드가 우리에게 권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가지.”
집주인의 허락도 떨어진 상황. 우리는 에드를 선두로 해서 저택 안에 들어섰다. 곧 있자 별장을 관리 중이던 사용인들이 다 같이 나와서 우리를 마중했다.
“오셨습니까, 황자 전하. 머무시는 동안 편히 모시겠습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별장 관리인이 이윽고 우리를 객실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살펴본 바닥과 유리창은 전부 깨끗하게 청소돼 있었다. 방문 전에 미리 별장에 연락해놓아서일 터였다. 아마 다른 준비도 완벽히 되어 있겠지만, 괜히 노파심이 솟아서 에드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준비해 왔죠? 그거…….”
“물론.”
에드가 제 외투 안주머니를 슬쩍 벌려서 보여 주었다. 그 안엔 은빛으로 반짝이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타라와 루카스를 운명의 짝으로 이어 주고자 미리 준비해 온 물건이었다. 그 열쇠를 보며, 나는 전에 에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래서는 서로 협력이 힘들지 않을까요? 이시스를 뒤쫓으려면 한 명으로는 벅찰 텐데.”
“흠……. 그런 거라면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죠.”
“……? 불법인가요……?”
“따져 보면 불법이지만, 들키지 않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게 뭐냐면―”
그 뒤 내 귓가에 속삭여진 것은 악당이나 생각해 낼 수 있을 법한, 몹시도 사악한 방법이었다.
“둘을 고난 속으로 함께 밀어 넣는 겁니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아주아주 혹독한 고난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