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부인께선 가까워질 준비가 된 것 같아요2021.11.30.
귓가에 속삭여진 에드의 달뜬 음성 덕분에 머릿속에 가득했던 고민거리마저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어서 타라와 루카스를 이어 줄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리 걱정하면서도, 정작 몸으론 에드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사이 그는 흐물흐물 풀어졌을 내 표정을 감상이라도 하듯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본인의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손을 깍지 껴서 붙잡았다.
“보세요, 지금 우리가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지. 빈틈없이 닿아 있잖아요?”
“으음…….”
“틀림없이 운명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들도 마찬가지로 운명으로 엮여 있다면, 언젠간 이렇게 될 테니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럴까……?’
타라와 루카스를 기껏 붙여 놓아도 서로 데면데면하기만 하니, 나도 모르게 초조해졌었다. 그래서 결국 억지로 손을 썼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던가. 그들의 관계는 오히려 전보다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래, 에드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냥 한번 내버려 둬 보자. 둘이 서로에게 천천히 이끌릴 수 있도록. 나는 그리 결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걱정 안 할게요, 일단은…….”
“잘 생각했어요. 그보단 우리가 어떻게 해야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나 고민해 봅시다.”
“……이 상황에서 더 가까워질 수도 있어요?”
이미 찰싹 붙어 있는 우리의 몸을 보며 그리 묻자, 그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웃었다. 그럴 때마다 맞닿은 피부로부터 전해지는 저음의 진동이 나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그 감촉이 좋아서 그의 몸을 두 다리로 슬그머니 얽어맸더니, 그 또한 깍지끼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내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의도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파악되는 행동……. 그제야 나는 그가 말한 ‘가까워지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내 발목에도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보란 듯이 나와 눈 마주치면서.
“물론 더 가까워질 수 있죠. 지금 보니 부인께선 이미 가까워질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으음……. 전하는요……?”
그는 말로써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하반신을 더욱 가깝게 내 쪽으로 붙였다. “아―” 하고, 나는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그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요 며칠간 에드는 본인이 지긋지긋한 악몽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났노라고 믿었다. 레냐를 품에 안고 잠들기 시작한 이후론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득한 즐거움을 맛보고 잠든 그날 밤, 그것이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개자식!! 네놈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됐는지 눈깔 똑바로 뜨고 봐!!”
에드를 향해 검을 치켜든 채로, 꿈속의 타라가 그렇게 외쳤다. 사실 그녀의 말처럼 눈을 굳이 똑바로 안 떠도 주위의 경관은 아주 잘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을까. 병사들과 마족들의 시체가 이토록 사방에 즐비한데. 타라는 세상을 그리 참혹하게 망가트린 장본인으로서 에드가 반성하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정작 그는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뭐?”
“……!!”
“설마 내가 이렇게 될 걸 예상 못 하고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 정도로 반성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꿈속의 에드는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통쾌함을 느꼈다. 죄 없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족속들이 그에 마땅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라고 여겼다.
“죽어!!”
타라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에게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는 마법조차 쓰지 않고서 타라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활 솜씨는 좋았을지 몰라도, 검을 쓰는 법은 영 서툴러서 오히려 재밌기만 했다. 에드에게 동요가 일어난 것은 그녀의 그다음 말을 들었을 때였다.
“내 친구도…… 레냐도 네놈이 죽였지!!”
수천, 수만 명의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기만 하던 마음이 그 순간엔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로 인해 그의 움직임이 둔해진 순간……. 푹― 헛돌기만 하던 타라의 검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당연하지만 아팠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슴에 박힌 검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타라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들이었다.
“그 애는 너 같은 쓰레기도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런 레냐를 너는 어떻게…… 어떻게 죽일 수가 있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의 내벽을 긁어내렸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제 품 안에서 어찌할 틈도 없이 떠나 버린 레냐를 떠올리며,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그래, 내가 죽였다.”
그 즉시 타라의 눈이 희번덕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박아 넣은 검을 천천히 비틀었다. 칼날이 비틀림에 따라 생살이 벌어지며, 더욱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죽어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네놈은 잊지 않을 거야.”
고문하듯이 에드에게 박힌 검을 천천히 휘저으며 타라가 다시 속삭였다.
“네놈도 내 얼굴 똑똑히 기억해 둬. 이번 생에 이어, 다음 생에서도 너를 죽일 인간의 얼굴이니까.”
* * *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에드는 주위를 살피며 찾아다녔다. 꿈속에서 제게 검을 박아 넣은 타라를 찾는 것도, 제 몸에 난 상처를 찾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찾는 것은―
“레냐!! 어디 있어, 레냐!!”
악몽 속에서 그를 위해 죽은, 그의 아내였다. 어젯밤 한 침대에서 잠들었으니 원래라면 레냐도 그의 옆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지금 그는 혼자였다. 덕분에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 침실을 정신없이 살피던 그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을 정신조차 없어서 수면 가운만 대충 걸친 채로. 그때, 그의 목소리를 들은 레냐가 욕실에서 급히 나왔다.
“전하?! 무슨 일이에요?!”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놀랄 틈도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그녀를 바스러지도록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녀가 실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씻어서 젖은 머리카락과 뺨, 그리고 어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새하얀 목덜미……. 그녀의 온몸엔 산 자 특유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아…….”
“전하, 갑자기 무슨…… 혹시 악몽이라도 꾸신 건가요?”
“네. 전에 꾸던 것과 비슷한 악몽을 또…….”
“아아, 전에 제가 죽는 꿈을 꾼다고 하셨죠? 이번에도 그런 꿈이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동시에 그녀를 아까보다 더욱 세게 안았다. 힘이 가득 들어간 팔뚝 탓에 숨이 막혀 왔지만, 레냐는 구태여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보단 나긋한 손길로 그의 은발을 쓰다듬어 달랬다.
“괜찮아요, 전 여기 있잖아요. 그냥 단순한 악몽이에요.”
“단순한 악몽이라…….”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읊은 그가, 이번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자꾸만 불안합니다. 꼭 훗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 같아서요. 만약 그렇게 되면…… 전 정말로 버틸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버틸 수 없다는 건……?”
“이성을 잃고, 꿈속에서 제가 했던 아주아주 나쁜 짓을 똑같이 하게 될지도 모르죠.”
“……꿈속에서 뭘 하셨나요?”
레냐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깃들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 본인도 확 따라 죽어 버리겠다거나― 그런 말을 할까 봐서였다. 연인들이 실없이 주고받는 농담이라 해도 그런 불길한 농담은 싫었다. 곧 이어진 그의 대답은 그녀가 우려한 것과 달랐다. 다만, 그렇다고 그녀가 안심할 만한 대답인 것도 아니었다.
“꿈속에서 제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
“시체가 땅에 겹겹이 쌓여서 그 위를 밟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였죠.”
“…….”
“그래서 현재 다른 방에 묵고 있는 두 명이 저를 죽이러 왔고, 전 그들마저 해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야만 제가 원하는 어떤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디까지나 꿈이었기에, 그는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서 적당히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건. 에드에게 중요한 건 지금 레냐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저를 두고는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부인.”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속삭임을 건넨 뒤, 그의 입술이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매끄러운 목선을 훑듯이 내려간 그것은 이윽고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가 어제 그녀를 안으며 남겨 둔 붉은 흔적…… 그 위에다 입술을 대고서, 에드는 다시금 자국을 남겼다. 이번엔 더욱 집요하게, 더욱 짙게.
“……아셨죠?”
꿈 얘길 듣고 얼어붙은 레냐에게 그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녀의 피부 위에 낙인찍듯 새빨간 자국을 남겨 놓고도 그의 불안감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자신을 응시하는 에드를 보며, 레냐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
그럼 소유욕이 강한 그는 필시 그녀의 몸에 그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들 터였다. 지금 피부에 남긴 붉은 자국보다도 더욱 확실한 흔적을.
“네, 아무 데도 안 갈게요.”
“……정말이죠?”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전하께서도 어서 씻고 나갈 준비하세요. 광산에 가려면 서둘러야…… 잠, 잠깐, 저를 왜 갑자기 들어 올리세요……?”
“씻으러 가야 하니까.”
“아뇨, 제 말은, 전하께서 씻으시는 데 왜 저를…….”
레냐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선 에드가 문을 닫았다. 항의를 쏟아 내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윽고 멈추었고, 그 대신 문 너머로 들려온 것은 서로 물장구를 치며 찰박거리는 소리뿐이었다.
* * * 우리가 채비를 끝내고 방에서 나왔을 무렵. 루카스와 타라는 광산으로 떠날 준비를 일찌감치 끝마치고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가볍게 사과를 건네며,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젠 좀 고생했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컨디션 좋아 보이네. 둘 사이에 저 어색한 분위기만 없었어도 훨씬 좋았을 텐데…….’
루카스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고, 덕분에 어색했을 타라는 이제라도 내가 나온 걸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밝아진 표정으로 그녀가 정령을 소환했다.
“타세요, 고용주님.”
숨 막히도록 어색해 보이는 타라와 루카스를 함께 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어제처럼 타라가 내민 손을 붙잡고서, 로나의 등에 오르려 했다. 그랬으나-
“또 멋대로 태우고 가려고?”
내가 타라의 손을 붙잡기도 전, 에드가 내 앞을 막아섰다. 타라 또한 그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그를 은근슬쩍 노려보다가 이윽고 내게 물었다.
“어느 정령을 타시겠습니까?”
“제, 제가 골라야 하나요……?”
“예, 물론. 고용주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사실 여기서 날아가면 광산에 도착하기까진 고작 10분 안팎으로 걸릴 것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 정령을 타고 가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난감하네. 한쪽을 고르면 꼭 다른 한쪽이 삐칠 것 같단 말이지……?’
퍽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실에선 둘 사이에 딱히 특별한 접점도 없었건만, 이렇게나 서로 흉흉한 분위기를 풍겨대다니. 여하간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구 한 명은 내게 삐칠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