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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 (75/102)

75.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2021.12.17.

마족을 정리하고 돌아온 그날 밤은…… 그냥 힘들었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힘들었었다. 에드가 정말 지치지도 않고서 내게 달려든 것이다. 그와 함께 온기를 나누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그를 상대하다가……. 내 정신이 간신히 돌아왔을 땐 이미 하루가 꼬박 지나가 있었다.

16567325895127.jpg‘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단 말이지……?’

그렇게나 몸을 혹사했는데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게 기적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이틀 정도 앓아누웠던 데다가,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리랑 다리가 욱신거리긴 하지만…….

16567325895133.jpg“더 제대로 숨으시죠. 마족이 근처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을 회상하고 있는데 루카스가 불현듯 내게 그리 경고했다. 삐약이와 함께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몸을 더욱 숙이며 다짐했다.

16567325895127.jpg‘이번엔 절대로 방해될 짓 하지 말아야지. 첫 번째 사냥에선 조금 어리버리하게 굴었어도 이번엔 두 번째 사냥이니까.’

나, 타라, 그리고 루카스. ―이렇게 우리 세 명은 현재 마족을 사냥하고자 수도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헤일린 광산에 와 있었다. 루카스는 원래 이시스가 숨어 있다는 황성에 가려 했으나, 알현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던 탓에 신전 측이 손을 써 주길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할 일이 없으니 이시스의 계획이나 저지하고자, 그의 수족인 마족들을 사냥하기로 한 것이다. 나 또한 이시스를 저지하는 데 직접 힘을 보태려고 그들을 따라온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옆에서 쓸데없이 얼쩡거리며 방해나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6567325895127.jpg‘연습한 대로만 하면 될 거야.’

미리 준비해 온 나만의 비밀 무기를 꽉 쥔 채로 그리 긴장감을 삼키던 순간― ―쿵……. 쿵……. 땅이 울릴 만큼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곰 형태의 마족이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즉시 나무 뒤에서 은폐하고 있던 타라가 화살을 쏘았다. 피잉―! 마족이 앞발을 들어서 화살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바람의 힘이 더해진 화살은 그것의 앞발을 가볍게 관통하여, 마족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키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곧바로 루카스가 달려들어 마족의 왼쪽 다리 정강이를 길게 그었다. 성력이 담긴 검에 베인 마족은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어 주저앉게 되었다. 등장한 지 1분도 안 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16567325895127.jpg‘타라랑 루카스가 저렇게 손발이 잘 맞았던가? 내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둘의 연계 공격을 보며 나는 허탈감에 젖었다. 이대로면 뒤에 뻘쭘하게 서 있기만 하다가 돌아가게 될 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무기를 꽉 쥔 채 그들의 사냥을 지켜보던 중, 마침내 내게도 나설 기회가 왔다.

16567325895127.jpg‘타라가 위험해!’

지금까지 루카스만을 공격하고 있던 마족이 한순간 그를 지나쳐서 타라에게 내달렸다. 로나를 타고 날아오르면 피할 수 있을 테지만, 로나는 현재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타라와 함께 나무 뒤에서 은폐하고 있기에는 로나가 너무 거대했던 까닭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타라는 쏠 때마다 시간이 걸리는 화살 대신 근거리용 무기인 검을 빼내 들었다.

16567325895127.jpg‘안 돼! 타라의 검 실력으론 못 막을 거야……!!’

그렇게 직감한 나는 마침내 내가 준비해 온 내 비장의 무기를 급하게 들어 올렸다.

16567325895127.jpg‘명중시킬 수 있어. 원작의 레냐도 한 번 던지면 백발백중이라고 했으니까.’

강한 성력도, 강한 정령도 가지지 못했던 원작의 레냐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주특기는 있었다. 바로 던지기 기술. 왜인지 그녀에게는 포크든, 나이프든, 짱돌이든, 던지기만 하면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재능이 있어서, 전쟁터에서도 맹독을 바른 단검을 던져 가며 스스로를 지켰었다. 다만, 오늘 내가 가져온 건 독을 바른 단검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무기였다.

16567325895127.jpg“삐약아, 전에 연습한 그거!”

―삐이! 삐약이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나는 준비해 둔 그 무기, ‘다트 핀’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다트 핀은 마족의 등허리에 정확하게 꽂혔고, 그 즉시 삐약이가 정령의 힘으로 그것에 불을 붙였다. 콰광!! 다트 핀 안에 가득 채워 넣은 특수한 화약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긴장한 채로 검을 치켜들고 있던 타라도― 그런 타라를 지키고자 달려오던 루카스도― 그리고 다트 핀을 던진 나까지도, 그 순간엔 멍하니 멈추고서 마족을 집어삼키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16567325895127.jpg‘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데? 역시 마법의 힘을 더하길 잘했어.’

단순히 화약만 채워 넣으면 폭죽 수준의 위력밖엔 나오지 않기에, 에드에게 부탁하여 마법의 힘이 더해진 화약을 써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16567325895127.jpg‘이 정도면 타라와 루카스에게 짐 덩어리 취급은 안 당하겠네.’

타라도, 루카스도 나를 다시 봤으리라 여기며 안심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을 뿐. 내 새로운 기술이 그들에게 그 이상의 감상을 남겼다는 건, 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 * * 마족을 퇴치하자마자 우리는 황자궁으로 귀환했다. 궁에서 떠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떠날 때와 달리 지금의 우리에겐 긴장감 대신 흥분감이 감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16567325911044.jpg“정말, 아까 그 장면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니까요? 아, 죽겠구나― 싶은 순간에 불꽃이 ‘퍼벙!’ 하고 터지는데…….”

황자궁 정원에 착륙하자마자 타라가 또다시 나를 향해 칭송에 가까운 칭찬을 쏟아 냈다. 아까 내가 타이밍 좋게 마족을 폭파한 걸 본 뒤로, 그녀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오면서 식사했을 때도, 쉬었을 때도…… 심지어는 물을 마시려고 냇가에 잠깐 착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내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야기했다. 여전히 초롱초롱한 타라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16567325895127.jpg‘이렇게까지 칭찬해 주니까 부끄럽네…….’

마법의 힘이 깃든 파괴력이었으니 그녀가 놀란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라, 나는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루카스를 보았다. 그가 타라를 좀 말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16567325895133.jpg“대체 어떻게 그런 기발한 방식을 생각해 낸 겁니까? 화약을 담아서 폭파하다니. 게다가 그 위력은 또 뭐고요.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믿었던 루카스마저 지금은 타라의 칭찬 세례에 동참해 왔다. 이래서는 끝에 없겠구나― 하고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16567325911056.jpg“황자비님! 긴급 소식입니다!”

킬리안이 그렇게 외치며 궁에서부터 우리가 있는 정원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곤 숨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내게 돌돌 말린 서신 한 통을 건넸다. 서신을 묶은 검은색 리본, 그리고 그 리본과 함께 편지를 봉하고 있는 금빛 실링 왁스……. 그 위에는 황실의 문양이 보란 듯이 찍혀 있었다.

16567325895127.jpg‘황실에서 온 건가? 뭐지……?’

은근하게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16567325895127.jpg“……!!”

나는 안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머리로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였다.

16567325895127.jpg‘갑자기 이렇게 된다고? 하지만 아무런 징조도 없었는데……?’

내가 당황한 기색으로 멈추어 있자 타라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16567325911044.jpg“심각한 소식입니까?”

나는 서신에서 눈을 떼곤, 궁금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는 타라와 루카스에게 알려 주었다.

16567325895127.jpg“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 하네요.”

  * * * 황제가 죽었다. 죽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고, 아픈 곳도 딱히 없어 보였던 그가. 이시스가 관련되어 있으리란 예감에, 나는 급히 에드를 찾아 우리의 부부 침실로 왔다.

16567325895127.jpg“전하!”

16567325927021.jpg“아, 돌아왔어요? 마침 나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그는 나보다 먼저 소식을 접한 듯, 벌써 새카만 빛깔의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황족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갖춰 입는 예복이었다.

16567325895127.jpg“황성에 가시는 건가요?”

16567325927021.jpg“그렇죠. 황제가 죽었다는데 황자가 안 가면 그것도 좀 이상하니까.”

16567325895127.jpg“갑자기 왜 그렇게 됐을까요? 혹시 이시스와 연관이 있을까요?”

16567325927021.jpg“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아니면 뭐, 한밤중에 볼일 보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죽은 걸지도 모르죠. 차라리 그런 거면 재밌기라도 할 텐데…….”

역시나 황제의 죽음을 대하는 에드의 태도는 냉소적이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인 데다가, 황후의 암살 시도를 방관한 인간이었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사람들 앞에서 연기할 슬픈 얼굴을 몇 번 연습하곤, 내 이마에 입 맞추었다.

16567325927021.jpg“어쨌든 금방 가서 원인도 알아보고 이시스도 끝을 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16567325895127.jpg“……혼자 가시나요?”

어렵사리 꺼낸 그 물음에 그가 멈칫했다. 그사이 나는 그의 앞을 슬쩍 가로막았다.

16567325895127.jpg“저는요?”

16567325927021.jpg“……부인을 닐스와 이시스가 있는 곳에 데려가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16567325895127.jpg“…….”

16567325927021.jpg“괜찮죠? 사람들이 부인에 관해 물으면 제가 알아서 핑계도 잘 댈 거고…….”

괜찮으냐는 그 말에 나는 억지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옷소매를 말없이 힘주어 붙들었다.

16567325895127.jpg“저도 마찬가지예요.”

16567325927021.jpg“……?”

16567325895127.jpg“그런 곳에 전하를 혼자 보내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내 진심을 듣고 멈춘 틈을 타서 나는 빠르게 털어놓았다.

16567325895127.jpg“이렇게 걱정하는 게 꼭 이시스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교활한 인간이 함정을 파놨을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지만…… 황성은 그 자체로도 전하께 괴로운 장소잖아요.”

그의 모든 불행은 그곳에서 시작됐다. 그를 증오하는 모든 이가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어떻게 그를 혼자 보낼 수 있을까. 마음을 졸이는 나를 향해서 그는 티끌 하나 없는 순백색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67325927021.jpg“그것도 옛날 일이죠. 옛날 말고 지금의 저를 똑바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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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온한 그의 눈빛, 그리고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그의 입술이 보란 듯 가까워졌다. 그 상태로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뭉근하게 문지르며, 그가 웃어 보였다.

16567325927021.jpg“이제 과거의 악몽에 벌벌 떠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저는.”

그의 말대로, 눈앞에 보이는 이 커다란 남자는 농담으로라도 어린애라고 할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에게서 기분 좋은 저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6567325927021.jpg“황성뿐 아니라,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지금은 제게 동요를 줄 수 없어요.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괘념치 않겠죠. 제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제 앞에 있는 사람뿐이니까.”

16567325895127.jpg“……저요?”

16567325927021.jpg“네. 부인이 황성에 혼자 갔을 때 제가 동요했던 것도, 그곳에 간 게 부인이었기 때문이죠. 당신한테 내 과거를 들키는 게 싫어서……. 다른 이가 갔다면 전혀 상관치 않았을 겁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혼자 보내 주어도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16567325895127.jpg‘사실일까? 실은 그냥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존심 강한 그가 제 아픈 부분을 애써 숨기고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16567325895127.jpg“그럼 더더욱 함께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165673259270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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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들은 그는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아―” 하곤,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16567325927021.jpg“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요.”

16567325895127.jpg“그럼 저랑 함께 가겠다고 대답해 주세요.”

16567325927021.jpg“흠……. 하지만 이시스가 끔찍한 마법으로 놀라게 할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고 싶어지면……? 물론 저야 부인의 그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16567325895127.jpg“안 울어요, 전.”

나는 그의 추측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러곤, 자신감을 가득 담은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16567325895127.jpg“제가 아니라, ‘전하께서’ 혹시라도 엉엉 울까 봐 지켜 주러 가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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