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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너를 울리고 말 거야 (76/102)

76. 너를 울리고 말 거야2021.12.21.

농담인 것처럼 말하긴 했어도 사실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에드를 위해서, 그가 엉엉 울……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힘들어할까 봐서, 그곳에 가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뭐가 그리 웃긴지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를 지켜 준다는 게 그에겐 그렇게나 말도 안 되게 웃긴 일이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나도 서서히 빈정이 상하기 시작했다.

16567326037443.jpg“…….”

말없이 뾰족해진 눈빛으로 그를 찌릿하게 쳐다보니, 그제야 그가 머쓱하게 웃음을 멈췄다. 나는 휙 고개를 돌리며 비꼬는 말을 던졌다.

16567326037443.jpg“조금만 비웃어 줘서 고마워요. 많이 비웃었으면 상처받았을 텐데.”

16567326037453.jpg“아뇨, 비웃은 게 아니라, 제가 살면서 받아 본 위로 중 가장 사랑스러운 위로여서…… 그래서 웃은 거예요.”

이윽고 에드가 나를 제 품에 꽉 가두었다. 그러곤 내 드러난 이마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눌렀다. 이마 모양을 제 입술로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게 그렇게 마음껏 애정을 드러낸 뒤에도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고서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16567326037453.jpg“이렇게 귀여우니까 나만 아는 안전한 곳에 숨겨 두고 싶었던 건데…….”

어느덧 내 정수리 위에 턱을 괴다시피 올린 그가 체념하듯 속삭였다.

16567326037453.jpg“그래도 황성에 가고 싶다니 어쩔 수 없죠. 같이 가요. 대신, 내기 하나만 할까요?”

16567326037443.jpg“내기……요?”

16567326037453.jpg“누가 더 먼저 울게 되는지.”

어쩐지 사악한 속셈이 엿보이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곧 사악한 말이 이어졌다.

16567326037453.jpg“그리고 진 사람은 침실에서 이긴 사람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걸로…….”

16567326037443.jpg“……!”

16567326037453.jpg“물론 자신 없으면 안 해도 되고요.”

자신이 없으면 도망치라니.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이렇게나 자존심을 긁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16567326037443.jpg“하죠, 그 내기.”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가 몹시도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직감했다. 만약 이 내기에서 지면 침실에서 엄청난 일들을 겪게 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를 이길 방법을 필사적으로 떠올려 보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16567326037443.jpg“만약 상대를 때려서 울게 만들면, 그건 반칙일까요?”

16567326037453.jpg“……저를 때리려고요?”

16567326037443.jpg“아뇨, 그냥 물어본 거예요.”

때릴 생각까진 없었지만, 실수인 척하며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게 한다든가…… 그런 수법을 쓸 의향은 있었다. 아쉽게도 에드는 내 속내를 이미 간파한 것 같았다.

16567326037453.jpg“지금 보니 반칙……으로 해야 할 것 같네요. 안 그럼 부인이 제게 폭력을 행사할 것 같으니까…….”

그가 무섭다는 듯이 가련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했다. 저래 놓고 분명 속으론 나를 침실에서 어떻게 괴롭힐지나 생각하고 있을 터다. 그러므로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16567326037443.jpg‘반드시 내가 먼저 에드를 울려야 해……!’

에드를 지켜 주겠다는 결심을 한 게 불과 5분 전이건만. 그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머릿속엔 어느새 그것과는 정반대의 결심이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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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런저런 잡설이 오갔으나, 여하간 중요한 건 에드와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황성에 가고자 평소엔 입지 않는 검은색 드레스를 급하게 기성품으로 맞추었다. 드레스를 입고 대강 준비를 마친 다음엔 곧장 에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물론 평소처럼 정령을 타고서 날아가면 더 빠르기야 빨랐을 테지만, 마침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게다가 예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 가는 것이니만큼 이동 수단으로 새카만 마차를 골랐다. 그렇게 우리는 검은색 말들이 이끄는 검은색 마차를 타고, 검은색 예복을 입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먹구름이 껴서 거무죽죽해진 하늘 아래를 달려 황성으로 가게 되었다.

16567326037453.jpg“부인, 신기한 얘기 하나 들려줄까요?”

내 맞은편에서 흐린 창밖을 멍하니 보던 에드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살풋 웃고는 입을 열었다.

16567326037453.jpg“아주 오래전엔 말이죠, 닐스가 저를 동생으로 여기고 잘 챙겨 주던 때도 있었어요.”

16567326037443.jpg“……그 사람이요?”

16567326037453.jpg“상상이 잘 안 가죠?”

16567326037443.jpg“네……. 정말로…….”

현재의 그 비열한 닐스를 떠올려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가 들려주는 놀랄 만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6567326037453.jpg“제 모친이 숨을 거두었을 때 황제가 그 시신을 어딘가에 매장했죠. 제겐 매장 위치도 안 알려 준 채로요. 그때 이렇게 검은색 마차에 저를 태우고 시신이 매장된 곳까지 데려가서 함께 명복을 빌어 준 게 닐스였어요.”

16567326037443.jpg“정……정말요?! 그랬던 사람이 어쩌다가 지금은 그렇게…….”

16567326037453.jpg“글쎄요, 사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별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가 뒤바뀐 거거든요.”

16567326037443.jpg“아…….”

에드의 행동 중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라도 있었을까? 그러나 방금 ‘잘 모르겠네요’라고 답한 걸로 보아 에드도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는 듯했다. 그로선 이런 걸로 괜히 내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으니까.

16567326037453.jpg“그냥, 이 마차에 타고 있으니 문득 떠올랐네요, 그때가.”

에드는 그리 말하고서 다시 창밖을 보았다. 문득 떠오른 사소한 과거의 일을 생각난 김에 이야기해 주었을 뿐이라는 듯이. 그 뒤에도 그들에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또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는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 쭉 흐린 창밖만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나 또한 구태여 입을 열어서 그의 사색의 시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의 모친이 떠났을 때 탔던 검은색 마차를 타고 부친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크게 동요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분명 그 나름의 고뇌는 있을 터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황성에 도착한 듯했다. 성 문지기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러 펴졌다.

16567326067102.jpg“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통과한 마차가 마침내 멈추었을 때, 나는 에드의 손을 잡고서 땅에 내려섰다.

16567326037443.jpg‘와…… 개미 걸음 소리까지 들릴 기세네.’

도착한 황성은 당연하지만 몹시도 고요했다. 국장을 준비하고자 이미 황궁 내 시종과 시녀들도 전부 검은색 의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고, 표정 또한 다들 그 복장에 걸맞게 엄숙했다. 웃으면 사형당하는 법이라도 생긴 것처럼. 마찬가지로 음울한 낯짝의 기사 둘이 곧 와선, 우리를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예배당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그곳으로 가는 길에 황제의 사인을 듣게 되었는데, 그 사인이라는 게 퍽 충격이었다.

16567326037443.jpg‘세상에……. 제국 최고의 권력자도 이렇게 죽을 수가 있구나…….’

놀랍게도, 황제는 에드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한밤중 볼일을 보러 가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죽었다는 듯했다.

16567326037443.jpg‘하긴, 다 똑같은 인간인데 권력자라고 꼭 거창한 죽음을 맞이하라는 법도 없나……?’

그렇게 삶과 인생의 덧없음을 새삼 깨달으며 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우리는 이윽고 예배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했던 대로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16567326037443.jpg‘황후다. 그런데 닐스는 없네?’

그곳에선 황후가 혼자 황제의 시신 곁에 있었는데, 평소처럼 붉은색 드레스 차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남편이 떠난 상황이라 검은색 드레스를 갖춰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도를 표한다고 해서 그녀가 마구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16567326037443.jpg‘……왜 겁에 질린 것 같지?’

왜인지 그녀는 묘하게 겁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에드가 들어오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떨궜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에드에게 귓속말로 슬쩍 물었다.

16567326037443.jpg“왠지 불안해 보이는데, 혹시 전하 때문일까요?”

16567326037453.jpg“글쎄요? 아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죽이려고 수없이 시도했는데도 끈질기게 안 죽고 살아남아서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16567326037443.jpg“아아…….”

어릴 때부터 독약도, 암살자도 안 통하던 공포의 생명체가 전보다 더욱 강해져서 나타난 상황……. 이렇게 생각해 보니 황후가 겁을 집어먹은 게 얼추 이해는 됐다. 그러나 정작 에드는 그녀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16567326037453.jpg“그보다, 확인부터 해 봐야겠습니다. 정말로 죽었나.”

16567326037443.jpg“앗, 네.”

16567326037453.jpg“부인은 여기 있어요. 괜히 봤다가 꿈자리가 사나워질 수도 있잖아요.”

16567326037443.jpg“네…….”

여기까진 용감하게 따라온 나지만 솔직히 시체를 보는 건 꺼림칙했다. 내가 에드의 말대로 얌전히 뒤로 물러나서 기다리는 사이, 에드는 혼자서 황제의 시신을 확인했다.

16567326037443.jpg‘꽤 오래 보네…….’

그는 황제의 죽음에 별 감상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지만, 정작 시신을 살피는 시간은 꽤 길었다. 제 인생을 뒤틀어 버린 대상을 향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을까? 아니면, 그런 대상이 고작 화장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는 사실에 허망함을 느낄까? 그것도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서글픔을? 모르겠다. 어쨌든 황제의 시신을 보는 그의 눈빛은 감정을 읽어 내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16567326037453.jpg“확인 끝났습니다. 확실히 황제이고, 확실히 죽었군요.”

16567326037443.jpg“그래……요……?”

16567326037453.jpg“네, 이제 이시스를 찾으러 가죠.”

아까 황자궁에서 에드에게 듣길, 이미 그는 이시스가 있는 창고에 갈 계획도 다 세워 놓았다고 했다. 마법으로 우회하여 들어간다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 뱀 마족의 말대로 이시스가 닐스를 세뇌하여 조종 중이라면 필시 그 근처를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해 뒀다면 앞으로 크게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분명 그렇게 믿었는데…….

16567326067102.jpg“얘야, 잠깐…… 잠깐만 시간을 내 다오.”

겁에 질린 얼굴로 구석에서 침묵하고 있던 황후가 갑자기 나를 보며 그리 말했다. 막 떠나는 참이던 에드는 그 소릴 듣고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온 이후로 별다른 표정이랄 게 없었던 에드의 얼굴이 그제야 비로소 색채를 띠었다.

16567326037443.jpg‘혐오하고 있어…….’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 옅게 구겨진 눈썹, 내려간 입꼬리……. 그는 꼭 음습한 곳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황후를 보았다. 그 기색을 느낀 듯 황후가 멈칫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무거운 걸음을 힘겹게 움직여 기어이 내게로 다가왔다. 덕분에 치맛자락이 휘날리며 그녀의 구두가 보였다. 그렇게 보게 된 그녀의 구두는―

16567326037443.jpg‘빨, 빨간색 구두를 신었어……?!’

놀랍게도, 남편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골라 신은 구두는 붉은색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드레스까지는 어쩔 수 없이 검은색으로 갖춰 입었지만, 구두는 치맛자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니 본인이 좋아하는 색을 고른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 빨간 구두 이야기…… 장례식에 붉은색 구두를 신고 갔다가 영원히 춤을 추게 되는 저주를 받아서 결국 발목을 잘라 냈다는 그 전래동화를 알았다면, 결코 저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황후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16567326067102.jpg“아주 잠깐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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