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한밤중에 본 것2021.12.31.
‘떨어진다……!’
추락하며 밀려드는 아찔한 감각에 몸이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몸이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
“……!!”
나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게 되었다. 떨어지는 꿈을 꾼 사람들이 다들 그러하듯이.
“헉, 헉……!!”
숨이 대강 진정된 다음엔 즉시 주변부터 살폈다. 나는 어느덧 황성의 어느 객실에 와 있었다. 드디어 꿈에서 탈출한 것이다.
‘역시 깜짝 놀라면 깨어나게 되는 거였어. 마법 꿈이든 뭐든 일단 꿈은 꿈이니까.’
꿈속이 지나치게 밋밋한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다. 나를 오래 가둬 놔야 하는 에드로서는 당연히 나를 놀라게 할 만한, 즉 자극적인 것들을 치워 둘 수밖에. 어쨌든 간신히 탈출한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에도 마법이 걸려 있기는 했지만 그걸 해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력에 닿으면 반발하며 밀려나는 것이 마력의 특성. 마법이 걸린 문고리에 최대한 끌어올린 성력을 불어넣자 마력이 흩어지면서 문이 열렸다.
‘에드는 지금쯤 그 창고에 있을까? 그런데 어느 방향이지?’
그 고민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게 해답이 나왔다.
“뒤뜰 창고에 화재 발생!!”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고, 곧이어 “불?”, “불났다고?” 하면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내가 서 있던 작은 복도와 이어지는 큰 복도를 시종들이 우르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타이밍에 창고에서 화재라면 에드가 벌인 일이겠구나. 이시스를 무사히 불태웠나? 아니면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이시스가 에드를 불태운 건 아니겠지? 그 인간이 만들어 둔 이상한 함정에 빠져서 에드가 위험해진 건……?’
물론 에드는 내가 걱정할 필요 없이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이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간의 정해진 수명을 아득하게 넘어설 때까지 살아온, 초인적인 흑마법사였다. 그런 이시스가 작정하고서 에드를 위험한 함정에 빠트렸다면…….
‘가 봐야 해……!’
나는 발걸음 소릴 최대한 줄이고서, 아까 시종들이 뛰어간 방향으로 향했다. 다행히 가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다. 아마도 다들 화재를 진압하느라 뛰어가서 이 근처는 텅 비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안심하고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
복도 코너로부터 걸어 나오던 누군가를 발견하고 황급히 몸을 숙였다. 나는 그렇게 근처 조각상 뒤에 수그리고 앉은 채,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그를 보았다.
‘닐스잖아? 그런데 상태가…….’
그의 몰골은 멀리서 대충 봐도 알 정도로 엉망이었다. 겉옷은 그슬려 있고, 안에 받쳐 입은 셔츠도 누가 찢어 놓은 것처럼 맨살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찢긴 셔츠 안으로 보이는 그의 가슴팍에도 뭔가 붉은 게 보였다.
‘가슴에 저 빨간 건 뭐야. 다쳤나?’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더 얇게 뜨고서 보려고 했으나, 그 순간 닐스의 고개가 이쪽으로 휙 돌았다.
‘눈, 눈 마주칠 뻔했어……!’
급히 조각상 뒤에 더 깊이 숨어든 채로 입을 틀어막았다. 빠르게 몸을 숙이긴 했지만, 그에게 살짝 보였던 것도 같았다.
‘그냥 닐스일 뿐이야…… 그뿐인데…….’
왜 이렇게 무서운지 의문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닐스의 몰골과 관계없이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 자체도 조금 이상하다는 점이었다. 이 찌릿찌릿하게 피부를 찔러 오는 감각은 아마 마력인 듯한데, 평범한 마력과 달랐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그때― 저벅. 저벅. 닐스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으로 보건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들켰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쯤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도망쳐야 해?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나서 인사해……?’
그러는 사이에도 닐스의 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일어나서 적당히 인사하며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도망쳐 봤자 늦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생각도 못 한 행운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음이 복도 너머에서 들려왔다. 덕분에 이쪽으로 점차 가까워지던 닐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다행히 아까 내가 재빠르게 숨은 까닭에 닐스도 내 모습을 자세히 보진 못했던 모양이다. 기척만 설핏 느껴져서 확인하고자 이쪽으로 오던 차, 반대쪽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니 발걸음을 돌린 것 같았다.
“들켜선 안 돼! 내 정령이 관심 끄는 동안 어서 여기로 와!”
“……?”
안심하고 있던 때 근처의 객실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그리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다급했던 데다가, 닐스가 또 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일단은 그곳에 들어섰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은 정말 황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이상한 날이라고.
“황후 폐하……?”
아까 예배당에서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물러났던 황후가 나를 부른 장본인이었다. 수도 없이 에드를 죽이려 들었던 여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어김없이 불쾌감이 치솟았다.
“……왜 여기 계시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란다. 왜 여기에 있지? 한참이나 찾았잖니.”
“저를…… 말씀이세요?”
“여기 너밖에 더 있니? 계속 찾아다녔는데 이런 데 있을 줄이야…….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너도 큰일이 났을 거다.”
황후가 ‘이 아이’라고 부른 건 어느샌가 문틈으로 쪼르르 들어와선 황후의 어깨에 올라앉은, 레몬색의 작은 생쥐였다. 아마 그 생쥐가 그녀의 정령인 것 같았다. 생쥐의 턱을 긁어 주는 그녀의 손길이 능숙했다.
“너를 찾아낸 것도, 방금 닐스가 너를 발견하기 전에 도자기를 깨트려서 관심을 끌어 준 것도 이 아이지. 네 생명을 구한 거나 다름없어.”
아까 위험하던 때에 딱 맞춰서 들려온 깨지는 소리는 이 작은 정령이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장식용 도자기 같은 걸 떨어트려서 낸 소리였나 보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건만……. 여하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은 꼭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발견하시면 제가 ‘생명’을 잃게 된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
아까 예배당에서 황후가 묘하게 겁에 질려 있던 게 이상하다 싶었다. 처음엔 에드 때문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원인이 의외로 닐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시스가 닐스를 조종하고 있다고 했었지. 마법으로 닐스에게 세뇌 같은 걸 걸었나? 그래서 본인 아들이 이상행동을 보이니까 황후가 겁을 집어먹었고……?’
내가 아는 정보들을 짜 맞추니 그런 결론이 나왔다. 답을 듣기 위해 차분히 기다리자, 곧 그녀에게서 긴 한숨이 토해졌다.
“……그래.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솔직하게 말하마. 네 말이 옳다. 지금의 그 아이라면 필시 너를 죽였겠지. 그 밝았던 아이가 근래에 들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난폭해졌으니까.”
“……!”
“아까 네게 하려던 이야기도 이것이었고.”
난폭해졌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다는 의미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기도 전에 황후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가 그렇게 친근한 관계도 아닌데 말이다. 에드를 죽이려 들었던 여자와 닿는 게 끔찍해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는 놓아주지 않은 채로 제 말만 이어 갔다.
“언제부턴지는 정확히 모른다. 어쨌든 그 애는 이상해졌어. 아랫것들에게 별 이유도 없이 채찍질해 대고, 어디서 자꾸 이상한 고깃덩어리를 가져오더구나. 게다가 방에선…….”
차마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황후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아주 비릿하고 고약한 악취가 풍겼고.”
“악취요……?”
“꼭 뭔가 썩어 가는 듯한 악취였다. 이상해서 시종들에게 방을 살펴보라고 했지만, 누가 들어가려고만 해도 과하게 화를 내더구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
이야기를 이어 가는 그녀의 몸이 어느덧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뒤뜰 창고를 개인적으로 쓴다면서 다 치우게 하더니, 그때부턴 거기로 고기를 날랐다.”
“…….”
“그런 기행이 이어지니 폐하께서도 몇 번이고 훈계하셨지. 그때마다 그 애는 꼭 악귀가 씐 것처럼 악을 썼고. 이번에도 그렇게 소란이 일어서 간신히 잠재웠는데…….”
점점 심하게 떨던 그녀가 잠깐 심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그날, 새벽에 잠깐 침실을 나서셨던 폐하께서 돌아오질 않으시더구나. 너무 안 돌아오시기에 직접 찾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거란다.”
“……무엇을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필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될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들어맞았다.
“닐스…… 그 애가 폐하를 계단 난간 밑으로 밀어 버리는 모습을.”
황후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을 듣고 나는 한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 말씀은, 폐하께서 실수로 발을 헛디디신 게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죠?”
“알리지 않은 게 아니야. 알리지 못한 것이지.”
황후가 이윽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황성에서 누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니? 기사단장? 황실의 가신? 그 누구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그 아이로부터 날 보호해 주진 않을 거다. 그 애는 장성한 황태자로서 이미 그 영향력이 황제와 다를 게 없어.”
“…….”
“몰래 서신을 보내서 내 친정에 도움을 청하려고도 해 봤지만 실패했다. 그 서신을 닐스가 중간에 가로채다가 확인하는 바람에 오히려 상황만 더욱 나빠졌지.”
거기까지 들으니 황후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감이 잡혔다.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가로챘다면 닐스도 이미 황후가 살인을 목격했단 걸 알아챘을 터. 입막음을 목적으로 그녀 또한 은밀하게 죽이려 들 가능성이 있었다.
‘황성 인간들은 이미 다 닐스에게 넘어갔고, 외부인인 내가 그나마 안전해 보여서 도움을 청하려는 건가……? 하긴, 그 이유가 아니면 본인 사정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털어놓지도 않았겠지. 무엇보다 나는 황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인, 에드의 아내기도 하니까.’
역시나, 곧 그녀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내가 흥정 따위를 할 상황이 아니란 걸 알아. 그렇기에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했다. 이 간절함을 헤아려서 나를 도와다오.”
“…….”
“어려운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야. 나를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돕고, 그다음 몬트 공작에게로 데려가 주면 된다. 그 뒤엔 내가 알아서 그에게 거래를 제안할 거니까.”
“…….”
“내 소유의 토지와 재산 일부를 대가로써 신변 보호를 요청하면 그도 순순히 받아들이겠지. 내가 내놓을 그 땅이 작긴 해도 토지가 비옥하고 관광지로써도 매년 큰 이익이 나오는 곳이니,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거든.”
“…….”
“아니, 손해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놓치면 후회할 수준의 거래일 거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그녀의 간절함은 이제 잘 알겠다. 본인이 그토록 혐오하던 존재, 즉 에드의 아내인 내게 이렇게나 저자세로 부탁할 정도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