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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나로 인해서 변화한 것 (81/102)

81. 나로 인해서 변화한 것2022.01.07.

16567327128397.jpg“아으으…… 일하기 싫어……. 폐하께선 왜 하필 이렇게 한창 바쁠 때 돌아가셔서 일감을…….”

16567327128397.jpg“쉿! 목소리 낮춰, 바보야! 시녀장님 아직 근처에 계신단 말이야!”

16567327128397.jpg“헉, 그래?”

원래라면 꿈나라에서 노닐고 있어야 할 시간, 밤 10시. 황성 빨래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하녀 둘이 긴박하게 주위를 살폈다. 왜 하필 이렇게 한창 바쁠 때 돌아가셔서 일감을 늘리셨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려 했던 하녀, 멜리사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한숨지었다.

16567327128397.jpg“휴……. 아무도 없다…….”

16567327128397.jpg“넌 제발 입 좀 조심해. 황성에선 말실수하면 진짜로 큰일 난다니까?”

16567327128397.jpg“응, 진짜로 미안……. 어휴, 깜짝 놀랐더니 갑자기 배고프네.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야식 먹어야겠…… 음?”

그때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주위를 살피던 멜리사의 시야에 의아한 풍경이 들어온 것은. 그녀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황후의 침실 발코니에 시선을 고정했다.

16567327128397.jpg“황후 폐하께서 이 시각까지 안 주무시네? ……지금 소리 지르고 계신 것 같은데?”

황후는 발코니까지 도망치듯 뒷걸음질 쳐 와서는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다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라며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침실 안에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당황한 멜리사와 달리 리리아는 심드렁했다.

16567327128397.jpg“그냥 못 본 척하면 돼. 듣기론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황후께서 조금…… 충격을 받으셔서, 갑자기 혼자 중얼거리고 그러신대. 보더라도 신경 쓰지 말라고 시녀장께서 직접 당부하셨는데, 너 그때 딴짓했구나?”

16567327128397.jpg“아아…….”

16567327128397.jpg“어서 세탁물이나 널고 들어가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리리아가 멜리사를 채근했다. 그러나 멜리사는 쉬이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16567327128397.jpg‘춤추시는 건가? 아니, 뭔가에 끌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지켜보는 사이 차츰 황후의 몸이 발코니 난간 쪽으로 밀려났다. 이윽고 멜리사는 들고 있던 세탁물 바구니를 툭, 떨어트렸다.

16567327128397.jpg“잠깐만, 황후께서……!”

16567327128397.jpg“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빨리 들어…… 어어?”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다니듯 기괴하게 흔들리던 황후의 신형이 그대로 발코니 난간 너머로 추락했다. 두 하녀가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간 그곳엔 처참한 몰골로 숨져 있는 황후가, 그리고 그녀가 즐겨 신던 붉은색 구두가 덩그러니 나동그라져 있었다. * * *

16567327157656.jpg‘본인이 죽였다는 걸 제대로 숨기지도 않는구나.’

황후가 죽었으며, 그 시신은 공개되지 않고 곧바로 화장될 예정이란 소식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만약 대중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닐스는 황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조사해 보는 시늉이라도 했을 터였다. 그런데 황실의 전통적인 장례 절차조차 전부 생략한 채로 곧장 시신을 불태우려 들다니……. 그녀의 죽음에 본인이 관련돼 있노라고 대놓고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16567327157656.jpg‘닐스가 원래부터 막무가내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심장에 심었다는 그 뭔가가 머리까지 이상하게 만드는 걸까?’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에드가 내게 걱정 가득한 물음을 던진 것은.

16567327157663.jpg“정말로 같이 갈 거예요? 거기 징그러운 것들도 잔뜩 있는데.”

16567327157656.jpg“네,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가 따라가지 않으면 전하께선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요.”

16567327157663.jpg“흐음,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네요.”

외출을 준비하느라 쭉 거울에 향해있던 에드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16567327157663.jpg“부인께선 마탑에 한 번도 안 가봤잖아요. 그런데 이시스의 비밀 실험실이 거기 숨겨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그 실험실 마법 잠금을 직접 풀 수 있다는 확신은 또 어디서 나왔고요.”

16567327157656.jpg“그게 말이죠…….”

물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원작에서 이런 대사를 읽었던 덕분이었다.

16567327176537.jpg“마탑의 가장 낮은 곳이자 가장 깊은 곳…… 제가 수백 년간 쌓아 온 지식의 정수를 모아 둔 곳이죠.”

  이는 원작의 에드가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한창 전쟁을 벌이던, 후반부 파트에서 나온 대사였다. 전쟁 도중 뜬금없이 자리를 뜨는 이시스를 보며 에드는 ‘어디 가?’라고 물었고, 이시스는 그에 저렇게 대답했다. 마탑의 가장 낮고 깊은 곳, 수백 년간 쌓은 지식의 정수를 모아 둔 곳에 가노라고. 이시스가 말한 장소가 그의 ‘비밀 실험실’이라는 걸 알아들은 에드는 이시스를 붙잡지 않았고, 그 뒤 이시스는 실험실에서 본인이 연구 중이던 생체 병기, ‘키메라’ 떼를 끌고 와서는 전력에 보탠다. 문젠 내가 이 부분을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시스의 실험실이 언급된 건 그 대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잊어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16567327157656.jpg‘이 중요한 걸 잊었다니. 기억하고 있었으면 이시스를 진작에 잡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리 생각하니 괜히 속이 쓰렸다. 나는 애써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가동했다.

16567327157656.jpg‘그래도 어제 그 꿈을 꿔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아예 영영 잊어버렸을 수도 있었어.’

어제 새벽에 꾼 꿈속에서 마침 저 장면이 나왔었다. 꼭 필요한 순간에 딱 필요한 꿈을 꾸다니, 정말로 운이 좋았다. 어쩌면 수호신 같은 것이 나를 지켜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튼 생각마저 들었다. 여하간 원작 얘기고 꿈 얘기고, 에드에게 말하기는 곤란한 것들뿐이라 나는 이번에도 적당히 얼버무렸다.

16567327157656.jpg“그냥 감이에요.”

16567327157663.jpg“성의 없는 거짓말……. 뭐, 그래도 차분히 기다려 드리죠. 언젠간 부인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될 날이 올 테니까.”

자신감이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미소다. 에드는 그렇게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미소를 내건 채,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공간이 뒤틀리듯 일렁이는 감각과 함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 * * 다시 시야가 회복됐을 땐 이미 마탑이었다. 황자궁에서 마탑까지 그래도 꽤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나 순식간에 오다니. 새삼 마법의 위력을 실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가 마탑에서도 가장 붐비는 ‘토론의 층’으로 이동해 온 까닭에 제법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우리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다. 운동도, 식사도 거르고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살아서 호리호리해진 콩나물형 마법사들. 그리고 영생을 얻고자 제 몸에 온갖 마법 실험을 해 대서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몬스터형 마법사들. 나는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는 어느 몬스터형 마법사를 응시했다.

16567327157656.jpg‘저 사람이 게나일이겠구나.’

원작에서 에드의 주된 활동 무대가 마탑이었기 때문에 마탑 인물들의 특징과 이름은 나도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방금 막 달려온 도마뱀 피부 마법사가 마탑의 문지기인 ‘게나일’이라는 것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역시나 에드는 그를 향해 이렇게 명했다.

16567327157663.jpg“게나일, 우리를 마탑의 가장 낮은 곳이자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해라.”

그러자 게나일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을 내비쳤다.

16567327128397.jpg“예? 그, 그게 뭔지요? 소인은 잘……. 그보다 옆의 아름다운 분은 황자비 전하가 아니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나름 진실을 숨긴답시고 애쓰는 눈치였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게나일이 들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에드에게 속삭였다.

16567327157656.jpg“혹시 마법으로 소리 차단할 수 있어요? 우리 대화를 다른 사람들이 못 듣게끔.”

16567327157663.jpg“아, 그 정도는 간단하죠.”

곧 있자 주위에서 웅성거리듯 들려오던 소음이 깨끗하게 멎었다. 에드가 마법을 건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에게 속삭여 말했다.

16567327157656.jpg“모른다는 건 거짓말일 거예요. 제가 알기로 마탑 문지기는 마탑의 비밀 방들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사는 바퀴벌레 마릿수까지 다 꿰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모르는 척하는 건…… 아마 전하를 두려워해서겠죠.”

16567327157663.jpg“두려워해서……?”

16567327157656.jpg“네. 저 파충류처럼 생긴 육신은 탈피만 제때 해 주면 노화하지 않는 불멸의 몸인데, 저걸 얻을 때 이시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을 거거든요. 그 대가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문까지 적어 줬었고요.”

16567327157663.jpg“…….”

16567327157656.jpg“지금 이시스의 실험실이 공개되면 그걸 전하께 들킬지도 모르고, 그럼 호되게 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숨기는 거예요. 어차피 서약문 자체는 별 의미도 없는 거긴 하지만…….”

원작의 정보를 에드에게 전해 주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모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16567327157656.jpg‘앗, 너무 갑자기 정보들을 막 풀었나? 날 믿는 거 같아서 말해 준 건데……. 혹시 예전처럼 경계하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결론적으로, 그것은 기우였다.

16567327157663.jpg“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요. 부인께서 실은 어떤 고차원적이고 전지전능한 무언가의 화신이나, 환생자가 아닌가 하는…….”

16567327157656.jpg“……네?”

16567327157663.jpg“워낙 말도 안 되는 정보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예쁘고, 상냥하고, 귀엽고……. 후, 이런 완벽한 사람이 내 아내라니…….”

의심은커녕, 그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음란한 눈빛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덕분에 나는 새삼 깨달았다. 원작에서처럼 사람을 의심하고 도구로만 사용하던 에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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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로 인해서 변화한, 나만의 에드를 향해 마음을 아낌없이 담아낸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67327157656.jpg“그럼 오늘은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오붓하게 놀까요? 그전에, 우선 게나일을 설득해서 우릴 그곳으로 안내하게끔 해야 해요.”

16567327157663.jpg“흠. 그런데 저 녀석, 의외로 고집이 센 편이라 웬만한 설득으론 입을 안 열 텐데…….”

16567327157656.jpg“말로 하는 설득은 안 통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알기론 게나일에게 잘 통하는 또 다른 설득 수단이 있거든요.”

거기까지 듣고 그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아―” 하고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16567327157663.jpg“뭔지 알겠네요.”

16567327157656.jpg“네, 맞아요. 최고의 설득 수단은 역시 거액의―”

16567327157663.jpg“폭력과 공포. 맞죠?”

‘최고의 설득 수단은 역시 거액의 뇌물’이라고 말하려던 나는 잠깐 멍해졌다.

16567327157656.jpg“그, 그것도 따지고 보면 설득 수단이긴 한데…….”

16567327157663.jpg“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3분 안에 다녀올 테니까.”

그 뒤 에드는 게나일을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정확히 3분 뒤에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돌아온 게나일은 불안한 기색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16567327128397.jpg“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 따라오, 오십시오…….”

어쩐지 상당히 찜찜한 해결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부들부들 떠는 게나일을 따라 쭉 이동해 갔다. 공간을 뒤틀어 낸 듯 기괴한 각도로 이어지는 계단,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존재하는 문……. 마탑의 그런 기묘한 공간들을 계속하여 지나쳐간 끝에 우리는 비로소 ‘가장 깊고 가장 낮은 실험실’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실험실 입구는―

16567327157656.jpg‘잠금이 걸려 있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마법으로 봉인돼 있었다. 사실 마탑에 존재하는 실험실은 전부 이랬다. 문 앞에 위치하는 석판에 색색의 돌이 박혀 있고, 그 돌을 ‘정해진 순서에 맞게 8번’ 두드려야만 열리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16567327157656.jpg‘내 생각대로면 암호는 아마도…….’

나는 원작에서 본 이시스의 버릇을 떠올리곤, 석판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붉은색 돌만 연속으로 여덟 번을 ‘톡톡톡톡톡톡톡톡’ 두드렸다. 내가 살던 세계 방식대로면 ‘00000000’, ‘11111111’, ‘12345678’ 따위의, 해킹당하기 딱 좋은 암호를 입력한 셈이었다. 그 뒤 문이 열리길 기다렸으나,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서 에드가 결국 입을 열었다.

16567327157663.jpg“암호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 간사한 놈이 그렇게 단순한 암호를 설정해 놨을 리가 없―”

에드의 말이 이어지던 중. ‘드르륵’ 기묘한 기계음을 내며, 이시스의 실험실 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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