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하얀 로브의 현자2022.01.11.
굳게 잠겨 있던 이시스의 실험실이 마침내 활짝 개방되었고, 내 입가에도 활짝 미소가 피었다.
‘역시 그 암호가 맞았구나.’
이시스의 비밀 실험실에 대해 떠올렸을 때부터 나는 그자가 이런 단순한 암호를 설정했으리라 예상했다. 그는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붉은색에 광적인 집착을 하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그의 실험실을 쉽게 열게 되어 기뻤는데, 에드는 생각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전하? 혹시 뭔가 잘못됐나요? 문이 열렸는데 전혀 안 기뻐하시는 것 같아서…….”
“그게…… 조금 자괴감이 들어서 말이죠. 이런 단순한 놈을 제가 계속 놓쳤다는 게.”
하긴, 에드의 심정도 이해는 됐다. 비밀번호를 ‘00000000’ 수준으로 짓는 단순한 인간을 자신이 못 잡고 있다는 사실에 허탈해졌을 터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자가 단순해지는 건 ‘붉은색’을 선택해야 할 때뿐이에요. 그 색깔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간이잖아요. 그 외의 일에서는 철두철미하고 영악한 인간이니까…… 그를 놓친 것도 그리 자책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
내 위로가 그에게 썩 잘 먹힌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내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이시스는 붉은색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억나. 이시스가 붉은색에 집착하는 이유…… 어느 고위급 마족에게 종속돼서였을 거야’
선천적으로 마력을 지니지 못한 이시스가 그만큼 힘을 쓰는 건 강력한 권세를 지닌 마족과 계약을 체결해서였다. 그는 그 대가로 마력을 얻어 젊음을 유지하고 힘을 쌓았다. 대신 힘을 빌려준 마족의 종복이 되어, 마족들이 이 세계를 식민지화시키는 걸 돕는 것이다. 이때 그 계약한 마족의 상징이 붉은색이었던가 해서, 이시스도 영향을 받아 기묘한 집착증이 생겼다는 게 원작의 내용이었다. 더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실험실에 그 마족에 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런 생각을 품곤 실험실 내부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부 풍경을 눈에 담아 갈수록 이렇게 변했다.
‘확실히 마족의 단서 같은 게 있을 듯한 경관이네.’
이시스의 실험실은 꼭 지옥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처럼 끔찍했다. 그의 실험이 주로 영생, 영원한 젊음, 키메라 생성 따위에 맞춰져 있어서일까? 마법 생명체들의 표본들이 특히 많았다. 살아생전 본 적 없는…… 아니, 존재할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괴생명체의 내장들이 유리로 된 관 안에서 꿈틀대는 걸 보고 나는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정작 안내인으로서 함께 온 게나일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오오……!!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잔뜩……!!”
그는 자신의 신체와 비슷한 도마뱀 마족의 표본을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정신없이 살펴 댔다. 그러다가 결국 에드의 손에 끌려 나갔고 말이다. 에드는 게나일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문을 닫은 뒤 책장에 다가갔다. 한순간 공기에 섞인 마력의 밀도가 높아져서, 나는 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마법으로 찾아보시게요?”
“네, 이 많은 자료를 하나하나 눈으로 살피면서 찾으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테니까요.”
그가 눈을 감고 책장에 손을 가까이 대자, 그의 마력이 책들 하나하나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원하는 자료를 찾는 데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깄네요.”
에드가 곧 뽑아 든 것은 걸레 조각처럼 낡아빠진 어느 가죽 책자였다. 그 안엔 이시스가 직접 기록한 듯 보이는 마계 생명체들의 정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책자를 휘리릭 넘기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이거였어요, 그때 닐스의 가슴에 심겨 있던 것.”
에드가 보여 준 페이지의 삽화를 보고, 나는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그날 자세히 못 봐서 다행이었네. 이런 게 심겨 있었다니…….’
닐스의 심장에 박혔다는 그것은 삽화로만 봐도 눈이 찌푸려질 만큼 징그러웠다. 이런 걸 실제로 자세히 봤다면 아마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에드는 별생각이 안 드는지 덤덤한 얼굴로 그 괴상한 것의 정보를 읽어 주었다.
“마계의 기생형 씨앗이라고 하네요. 정식 명칭은…… 아, 마계 언어로 된 명칭이라 제국어 발음으로 옮기기가 애매한데, ‘림피크’라고 부르면 될 것 같아요.”
“림피크? 기생형 씨앗이요?”
“네, 식물은 식물인데, 땅에서 자라나지 않고 생명체의 체내에 기생하면서 싹을 틔우는 식물이죠. 마계엔 이런 이상한 것들이 꽤 많아요.”
“아아, 그럼 그게 현재 닐스의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크고 있다는 건가요? 그런데 닐스는 왜 그런 걸 원했을까요?”
닐스가 에드에게 말하길, 그 기생 식물을 심장에 심고자 결정한 건 닐스 자신이었다고 했다. 내 물음을 들은 에드는 설명의 뒷부분도 더 읽어 주었다.
“이게, 단순히 양분만 빨아먹는 게 아니라 숙주가 된 생명체에게 강력한 마력을 제공하는 모양이에요. 또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끼쳐서 숙주의 공격성을 높인다고도 하고…….”
“아아…….”
그렇다면 전부 설명이 됐다.
‘곱등이에 기생하는 연가시 같은 건가? 이것 때문에 황제 부부를 죽였던 거구나.’
제정신이 아니긴 했어도 가족을 죽일 정도는 아니던 닐스가 갑자기 부모인 황제 부부를 살해한 건 이 림피크 씨앗의 영향을 받아서였나 보다. 그가 에드의 마법에 저항하고, 일시적이긴 해도 마계로 통하는 통로를 열어서 작은 하급 마족들을 끌어온 것도 이것 덕분이었던 듯했다. 그사이 책자를 쭉 읽어 내던 에드가 낭패감 서린 탄식을 뱉었다.
“이런…….”
“……? 무슨 일이세요?”
“이거, 한 번 심으면 절대 제거되지 않는다는데요……? 숙주가 죽지 않는 한…….”
그 말을 듣고 나는 어깨를 화들짝 떨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닐스는 죽기 전까지 그 징그러운 걸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으으…….”
“그렇죠, 그런데 진짜 심각한 건 그게 아니에요. 씨앗을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숙주를 집어삼키고 땅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근방의 모든 생명체를 양분으로 흡수한다고 하네요. 그다음엔…….”
에드가 내게 설명해 주고자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가,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다음 페이지엔 더욱 심각한 내용이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말해 주길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책을 받아서 읽어 보았다. 그 안엔 에드가 읽고서 굳어 버린 것이 이해될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러면 결국 원작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되는 거잖아……!!’
나무가 근방의 생명체들을 죽이고 흡수하다가 더 성장할 수 없을 때까지 커지고 나면, 그땐 제 생존에 더욱 유리한 토양을 찾아서 뿌리를 뻗어 간다고 적혀 있었다. 마계 식물의 생존에 유리한 토양은 당연하지만 마계의 토양. 즉, 그 토양을 누리고자 공간을 뒤틀어서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고, 그 너머로 뿌리를 뻗친다는 이야기였다.
‘원작에서도 결국 이곳과 마계가 연결됐었지. 그 뒤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고……. 내가 그렇게나 뒤틀려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원작과 흡사한 전개로 흘러가고 있어.’
굳어서 멈춰 있는 내 곁에서 에드도 걱정스레 침음을 흘렸다.
“쯧, 이시스가 아주 쓸 만한 밭을 찾아냈네요. 씨앗을 제거하려면 결국 숙주인 닐스까지 제거해야 하는데, 황제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겠죠.”
어쩌면 이시스를 만난 그날 즉시 내가 직접 칼을 들고서 그의 심장을 찔렀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너무 어설픈 각오로써 행동한 것이다. 원작에 없었던 전개까지도 전부 예상해놨어야 했는데…….
‘그래도 내가 한 일들이 전부 헛짓은 아니었을 거야.’
내 노력으로 바뀐 것은 분명히 있었다. 나는 이 세계의 악역이자, 내 지난한 노력의 가장 큰 결실이기도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힘들다 해도 저는 막으려고 노력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전에 먼저 알고 싶어요.”
“……?”
“전하께선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그걸 알고 싶어요.”
나는 안다. 그가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시스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그러니 이시스를 괘씸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저지른 일을 달가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나무가 자라나서 이 세계가 마계와 이어지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
그의 대답이 늦어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가늠하듯이 나를 살피던 그가, 불현듯 눈가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부인께선 이미 알고 있잖아요.”
“…….”
“한번 맞혀 보세요, 제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원작의 에드였다면 필시 이 모든 상황을 그저 관망하며 내버려 뒀겠지. 하지만 내가 바꿔 놓은 에드라면…….
“재앙이 오지 않게끔 저랑 함께 노력해 주실 거죠?”
이는 에드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기에 나온 답변이었다. 동시에 내 소망을 담은 답변이기도 했다. 나는 떨려 오는 마음을 붙들고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몇 걸음 더 나에게로 다가와선 두 팔 안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항상 좋아했던 따스한 체온이 이윽고 내 두 어깨를 가만히 감싸 왔다.
“맞아요. 당연한 건데 왜 이리 대답이 늦을까.”
그의 장난스러운 투정을 듣자 눈가가 시큰거렸다. 원작에서 에드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어서 인류를 절멸시키려 들었었다. 그토록 오랜 염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게 되었는데, 그는 나와 함께 그 일을 막아 내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역시 내 노력은 헛된 게 아니었어. 이 세계는 원작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거야.’
어쩌면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소환된 삐약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삐익!! 삐이이!!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리며 등장한 삐약이 덕에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삐약아……?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삐이!! 생각해 보면 삐약이가 스스로 내 옆에 나타나는 건 주로 내 근처에 수상한 살의를 품은 자가 있었을 때였다. 전에 이시스가 나를 죽이려 들었을 때도 스스로 소환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물론 별 도움은 안 됐었지만……. 여하간 삐약이의 영혼과 내 영혼이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내 주위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거라면 당장 경계해야 했다. 이 근처에 나와 에드 말고 다른 사람이, 즉 위험인물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저쪽에 누가 있나……?’
삐약이는 책장 옆, 반투명한 휘장으로 가려져 있는 복도를 향해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에드를 돌아보며 그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전하…….”
“부인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금방 살펴보고 돌아올…….”
나를 자상하게 어르던 에드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가 보고 있던 방향인, 그 어두컴컴한 복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도의 반절 가량을 가리는 휘장 아래로 새하얀 로브 자락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옷단에 여우 털이 붙어 있는 하얀색 로브……? 저 사람, 설마……!!’
원작에서 저런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누군지 떠오른 즉시, 나는 에드에게 외쳤다.
“전하! 당장 피해야 해요! 위험한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