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네 모친을 만나게 해다오2022.01.14.
아직 겨울도 아닌데 저런 털 로브를 걸치고 다니는 인간은 원작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휘장 너머에 서 있는 남자가 ‘그 사람’이라는 걸.
“위험……? 아는 사람이에요?”
위험하다는 내 경고를 들은 에드가 그리 물었다. 다급한 나와 다르게 평온한 어투였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다.
“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제가 아는 사람 같아요! 제가 알기로 저 사람은 분명―”
나는 그의 정체를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그전에 그의 손에서 마력이 들끓더니, 물줄기로 이루어진 창 여러 개가 우리 쪽으로 날아와서였다. -퍼버벙! 그대로 맞았다면 기절하거나 다쳤을 터다. 다행히 그자의 공격은 에드가 만들어낸 바람의 벽에 전부 가로막혔다. 그렇다 해도 그 순간 발생한 굉음에 깜짝 놀랐기에, 나는 에드의 옷자락 안에서 한껏 웅크렸다. 이윽고 에드가 그런 내게 달래듯 속삭였다.
“누군지는 나중에 들을게요. 초면에 다짜고짜 물부터 뿌리는 몰상식한 놈한테 예의 먼저 가르쳐 주고요.”
언뜻 차분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와 함께해 온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역시나 곧 있자 그의 마력이 험악하게 끓어올랐고, 그것은 곧이어 냉기의 형태로 변했다. 온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인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대단해……. 주위가 이렇게 얼어붙었는데 나한텐 전혀 추위가 안 느껴져.’
에드가 뭔가 수를 쓴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상대도 냉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새로운 마법을 펼쳤다. 예상대로 냉기에 맞서기 수월한 화염 계통의 마법이었다. 나는 곧 끼쳐 올 열기에 대비하고자 에드의 품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으나―
‘반격을 못 하네……?’
그가 마법으로 피워 올린 화염이 그보다 더욱 짙은 냉기에 감싸여서 사그라지고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결국엔 그의 두 다리마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안심한 나는 비로소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그를 가리고 있던 휘장은 아까 그가 쓴 마법으로 이미 찢겨 나간 상태. 이번엔 얼굴이 제대로 보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크림색 머리카락, 자안, 수려한 얼굴…… 생각했던 것처럼 악역 같은 얼굴은 아니구나, 이시스에게 마법을 전수해 준 스승치고는.’
그 이시스의 스승이었으니 분명 사악한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악당일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온순한 인상이었다. 여하간 그는 얼어붙어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제 다리를 몇 번 빼내려 하다가 포기하곤, 에드를 노려보았다.
“쯧. 누군지 몰라도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제법이구나. 재능이 있어.”
그 뒤 그가 불현듯 로브 안주머니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마법 수식이 새겨진 카드……. 분명 원작에서도 한 번 언급됐던 물건이기에, 나는 지금 그가 뭘 하려는지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회용 마법이 담긴 카드예요! 저걸로 순간이동해서 도망칠 거예요!!”
이시스의 스승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저 카드를 써서 도망치곤 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던 건지, 그가 내 외침을 듣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그럼 막아야죠.”
에드가 그리 말하고는 또 다른 마법을 사용했다. 아까처럼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주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방금 뭐 하신 거예요?”
“이 공간에 한정해서 마력의 흐름을 전부 막았어요. 마법으로 도망치지 못하게끔.”
아예 마법 자체를 못 쓰게끔 만들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하지만 상대도 딱히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멍청한 수를 쓰는구나. 마력의 흐름을 멈추면 나도 그렇지만, 너까지도 마법을 쓸 수 없을 텐데.”
그게 정말인지, 에드가 걸어 놓았던 빙결 마법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두 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얼음도 이윽고 약해져서, 그가 힘주어 다리를 빼내자 파스슥 부서져 버렸다. 안 그래도 걱정스러워지던 차. 그에게서 불안감을 더욱 부추길만 한 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지금 스스로를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거야.”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묻는데, 왜 마법을 못 쓰는 상황에선 내가 불리해질 거라고 생각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나를 뒤에 두고 에드가 느긋한 걸음으로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상대는 잠깐 당황한 듯하더니 자세를 잡고서 에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의 옷자락을 가볍게 낚아채 제압하는 에드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아, 생각해 보니까 마법을 못 쓰게 돼도 둘의 상황이 뒤바뀌진 않겠구나.’
그러니까, 종목이 마법에서 육탄전으로 바뀐다고 해서 에드가 질 일은 없는 것이다. 역시나 그는 호리호리한 마법사를 바닥에 깔아 놓고 물리적 방법으로 예절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잠깐만 밖에 나가 있을래요? 좀 많이 때려야 할 것 같은데.”
내 정신적 충격이 걱정된다는 듯이 에드가 눈가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사람 하나를 밑에 깔고서 주먹을 움켜쥔 채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태클 걸지 않기로 했다.
“네, 그럼 다 끝나면 불러 주세요.”
내가 실험실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뒤에선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실험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시스한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인데도 그렇게 대단하진 않네. 생각했던 것처럼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어.’
아니면 내가 에드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기다리고 있자 에드가 나를 다시 불렀다. 들어가 보니 그자는 이미 흠씬 두들겨 맞은 채로 묶여 있었다. 나는 에드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낸 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 있었던 거예요? 당신 실험실이 아니잖아요.”
“……첫 질문이 이상하구나. 보통은 내가 누군지부터 물을 텐데.”
“당신이 누군지는 이미 알아요. 아힌 윌러드 티렐. 이시스에게 마법을 전수해 준 사람이잖아요. 한때는 대현자라고 불렸던 적도 있고요. 수백 년간 속세와 연을 끊고 은둔해서 대부분은 당신을 잊었겠지만…….”
아힌의 눈빛이 짧은 시간 흔들렸다.
“……역시 알고 있었느냐? 아까부터 꼭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를 어떻게 알게 되었지?”
“아뇨, 먼저 질문한 건 저예요. 왜 여기 계셨는지 말씀해 주셔야죠.”
이시스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 할아버지는 내게 대답해 주기가 영 싫었나 보다. 은근슬쩍 질문권을 빼앗아 가려고 들었다. 그래서 원천에 차단하고 다시 질문했는데,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내 옆에서 아힌을 살벌하게 노려보던 에드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부인, 미안해요. 심문할 준비는 다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자랐나 봐요. 잠깐만 다시 나가 있으면 제가 금방…….”
“감, 감추기 위해서 왔다!!”
에드가 또다시 폭력행사에 들어설 기미를 보이자 아힌의 입에서 급박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까득, 물며 이어서 말했다.
“내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온 거다…….”
“잘못이요?”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괜한 발뺌은 관두마. 네 말대로 나는 이시스의 스승이고, 그 아이의 탈선을 막지 못한 데에…… 약간의 책임감을 느껴 왔다.”
사실 그가 책임감을 느꼈다는 것까진 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이시스의 스승이라는 것까지만 알았을 뿐.
‘아아, 그러고 보니 원작 읽을 때도 아힌이 하는 짓이 이상하긴 했어. 이시스랑 나름 유대가 깊을 텐데도 이시스 편에서 안 싸우고 전쟁을 관망하기만 한 게 이래서였구나.’
이시스를 제자로 아낀 것과 별개로, 그가 저지르는 행위 자체는 ‘탈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도 원작에선 그를 말리려는 어떤 행동도 안 했다니…….
“그래서 은신하신 거예요? 이시스가 하는 짓이 잘못된 건 알겠는데, 그걸 막을 용기는커녕…… 지켜볼 용기조차 없어서?”
“……말씨가 날카롭구나, 얘야. 예의를 지키거라. 내가 이리 보여도 네가 살아온 세월과는 결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아왔다.”
“죄송해요. 하지만 초면인 사람한테 다짜고짜 물세례를 퍼붓는 분께 예의를 지적받고 싶진 않아요.”
“…….”
그 부분에 관해선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가 잠깐 이탈했던 대화 주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여기 온 거다. 내가 이시스에게 마법을 가르쳤던 흔적들을 전부 지우려고……. 지금껏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는데 누군가 실험실에 침입한 것이 느껴져서 달려왔지. 이제 만족하느냐?”
“궁금한 건 해결됐어요.”
“그럼 어서 묶인 것 좀 풀어다오. 이렇게 있었더니 삭신이 쑤셔서…….”
“궁금증은 풀렸지만, 아직 구속을 풀어 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시스를 찾아내서 없애는 일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거든요.”
“……뭐?!”
역시나 그의 시선이 단숨에 사나워졌다.
‘그래, 말 몇 마디 나눈 거로 생각을 바꾸진 않겠지. 원작에서 타라랑 루카스가 개고생하면서 싸울 때도 끝까지 숨어만 있던 인간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부끄러워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그는 되레 내게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이 늙은이한테 무슨 궂은일을 시키려는 게냐!”
“……그만하세요, 할아버지. 이대로 이시스를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이미 아시잖아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잠깐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방황하는 것뿐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정신 차릴…….”
“하지만 벌써 황태자에게 이런 걸 심었던데요.”
나는 이시스가 적어 낸 책자를 펼쳐, 닐스가 가슴에 뭘 품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듯 아힌이 입을 다물었다.
“…….”
“여기 와서 당신의 흔적들을 지우고 외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설명은 충분히 되었을 듯했다. 나는 강경한 태도로 부릅떴던 눈매를 누그러트리곤 그의 상처로 손을 뻗었다. 그도 내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듯했다.
“성력……? 잠깐, 그 반지는…….”
“아, 이거요? 저희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반지예요.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물건이라고 들었어요.”
“…….”
예르타에서 온 물건인데도 그는 내 반지의 특별함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반지 위에서 한참이고 머물렀다.
겁 많고 주책맞은 노인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순간엔 눈빛에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긴 세월이 느껴졌다. 역시 데려가면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어쨌든 저희랑 같이 가 주실 거죠? 황태자가 그렇게 된 이상 더 머뭇거릴 시간 없다는 거, 이제 아시잖아요.”
“……그래, 같이 가 주마.”
“잘 생각하셨어요, 할아버지. 그럼 이제 슬슬…….”
“대신―”
그가 잠깐 멈추었다가 꺼낸 말은 내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그 반지를 준 사람…… 네 모친을 만나게 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