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남편이 나보다 예쁠 때2022.01.18.
아무래도 아힌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모르는 모양이다. ‘만나게’ 해 달라는 그의 말이 어머니의 묫자리로 안내해 달라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서 잠깐 침묵하고 있던 때, 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감님, 영감님께서 말씀하신 제 부인의 모친…… 그러니까, 저희 장모님은 만나 뵐 수가 없어요.”
“음?”
“왜냐면 그분께선―”
이미 세상에 안 계시노라고, 에드가 말하기 직전에 내가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만나게 해 드릴게요.”
당연하지만 이미 죽은 이를 만나게 해 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걸 지금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힌이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으려 들 터였다. 에드도 내 의도를 깨닫고 그에 따르기로 한 듯했다. 내 쪽으로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눈빛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모르는 아힌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릴리아에게. 그런데 갑자기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곤란했었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잘 알던 사이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전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았지만, 여하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잘 어르고 달래서 이시스의 약점을 불게끔 해야지.’
어머니 얘길 듣고 한결 밝아진 아힌의 얼굴을 보니 의외로 일이 순조롭게 풀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도 관광 여행을 앞둔 노인처럼 묘하게 들떠 있었다.
“자, 그럼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구나. 가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해 다오. 서둘러 끝내고 릴리아를 봐야겠다.”
“아뇨, 지금 당장 같이 가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도중에 잠깐 말을 멈추곤, 이시스의 서랍에 들었던 자료들을 전부 끄집어내서 책상에 올려놓았다. 에드가 마법을 쓰면 원하는 자료를 금방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실험실에 있는 자료들이 워낙 방대해서 일손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새로이 얻게 된 일손(?)을 향하여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희도 여기서 뭘 좀 찾아보려고 온 거였거든요.”
“…….”
“이것도 도와주실 거죠? 물론 할아버지가 하실 일은 단순한 정리 작업이고 본격적인 자료 확인은 전부 저희가 할 거지만.”
아힌은 내가 꺼내 놓은 자료들을 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대현자라는 사람에게도 서류작업은 딱히 즐거운 일이 아닌가 보다. 그가 노인 학대 어쩌고 하면서 투덜거린 것도 같았으나, 나는 못 들은 척하며 그에게 일감을 잔뜩 몰아주었다. * * *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히 웃으며 닐스가 함을 열었다. 비단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함 안에는 톱니바퀴 모양의 금속이 들어 있었다. 용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데다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변색되기까지 한 쇠붙이……. 겉보기엔 단순히 잡동사니로만 보이는 그것을 닐스는 황홀한 시선으로 살폈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정말 이걸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아뇨, 그것에 더해서 마계에 있는 태엽까지 있어야…….”
“젠장, 다 아는 내용 가지고 잘난척하지 마. 어쨌든 이게 시간을 되돌릴 때 필요한 그믐달 태엽 열쇠인 건 맞잖아.”
설명하던 이시스에게 닐스가 짜증을 부렸다. 뒤쪽에 서 있던 이시스는 그런 닐스의 뒤통수를 향해서 이를 갈았다.
‘쯧, 세뇌에 걸려 있을 때가 훨씬 고분고분하고 귀여웠는데…….’
그땐 닐스가 늘 멍한 상태라 조종하기 간편했었다. 그러나 이시스가 심장에 씨앗을 심는 바람에 닐스의 육신에 마력이 깃들게 되었고, 걸어 두었던 세뇌 마법도 그로 인해 자연스레 풀리게 되었다. 닐스가 예전의 그 오만하고 버릇없는 황태자로 돌아온 이유였다. 씨앗의 부차적인 효과 덕에 전보다 더 공격적이고 독선적인 인간으로 변한 것은 덤이었다.
‘세뇌당했을 적 일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세뇌의 효과가 어설펐다면 이시스가 그 자신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기억했을지도 몰랐다. 살인을 지시한 것과 건방진 말로 그를 자극했던 것까지……. 그러나 닐스는 세뇌에 걸렸던 기간에 벌어진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이시스가 시녀로 위장하여 자신에게 접근했고, 고맙게도 씨앗을 심어서 마력을 갖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가 닐스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닐스는 열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태엽까지 필요하대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것도 조만간 가질 거니까. 그럼 과거로 돌아가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것들이 태어나는 꼴을 막을 수도 있겠지.”
닐스는 그리 중얼거리곤 황홀한 눈으로 그것,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대한 고대의 유물을 자세히 살폈다. 「그믐달이 저물면 새카만 장막이 무대를 감추니, 이는 하나의 극이 끝났음이라. 끝난 극을 아쉬워하며 장막을 들추지 마라. 그대가 사랑하던 배우들은 이미 무대를 떠났으니.」 동그란 톱니바퀴를 닮은 유물의 표면에 적힌 고대어 글귀였다. 추상적이어서 뜻을 알기 어려웠지만, 닐스는 괘념치 않았다. 어찌 됐든 이 물건의 쓰임새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닐스는 제게 그 쓰임새를 알려준 장본인, 이시스를 향해 싱글 웃어 보였다.
“그래도 너한텐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게 왜 황실 보물인가 했는데, 덕분에 수수께끼가 풀렸거든.”
“황공합니다. 폐하를 모시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
“하지만―”
열쇠를 내려놓은 닐스가 이윽고 이시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검지로 그의 어깨를 툭, 찌르듯이 건드리며 경고했다.
“만약 네놈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땐 목숨을 잃는 걸 넘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될 거야. 이걸 빨리 가지려고 난 내 부모까지 죽여 버렸다고.”
“……제가 들려 드린 정보는 전부 사실입니다. 그리고 폐하께 드린 그 씨앗이 싹트면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생길 것이고, 태엽도 마저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살벌하게 경고하고 돌아서는 닐스의 뒷모습을 보며 이시스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 입가에 떠오른 은밀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서.
‘그래, 문은 열릴 것이다. 물론 그때쯤이면 네놈은 씨앗에 영혼과 양분을 전부 빼앗겨서 자아조차 없는 껍데기 신세겠지만…….’
이시스가 닐스를 향해 값싼 동정의 시선을 던졌으나, 열쇠에 한눈팔려 있던 닐스는 제게 던져진 시선을 끝내 보지 못했다. * * * 이시스의 실험실에서 찾은 쓸 만한 단서는 안타깝게도 그 씨앗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시스의 과거라든가 약점이라든가, 그런 단서는 없었다. 뭐, 아힌을 얻은 것 자체가 굉장한 수확이긴 했지만. 여하간 결국 괜찮은 단서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나오기 직전 그곳을 싹 불태워…… 버리려다가, 개중에서 쓸 만한 것만 몇 개 챙겨 돌아왔다.
“타라랑 루카스는요?”
우리를 마중 나온 킬리안이 내 물음을 듣곤 대답했다.
“그 두 분은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다고 아침에 미리 말씀을 주셨던 걸 보면, 아마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흐음……. 단둘이서 밤늦게까지……?”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둘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좋아, 아주 잘 되고 있어.’
원작대로 가까워진 커플들을 생각하며 뿌듯함에 젖어 있을 때였다. 이번엔 에드가 킬리안에게 명했다.
“그리고 우리랑 같이 온 노인네……가 아니라, 그 장발남한테 적당한 방 하나 내줘. 일단 불편한 건 없게 해 주는데, 만약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나한테 알리도록 해.”
“예, 전하.”
굳이 묶어 놓거나 마법을 걸어 둘 필요는 없었다. 그가 도망칠 것을 대비하여 그에게 마법의 힘이 깃든 서약서를 작성하게끔 했으니까. 절대 멋대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였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그걸 적으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강력한 힘이 깃든 서약서이니 안심해도 된다고 에드에게서 들었다. 그러니 아힌이 도망칠 걱정도 없겠다,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실에 돌아왔다.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인지 에드가 침실 문을 닫자마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네, 당장요.”
우리는 서로에게 은밀하게 미소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그다음 에드가 제 품속에서 벨벳 재질의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것의 정식 명칭은 시공간의 주머니……. 아니, 사실 그게 정식 이름인지 아닌지는 우리도 몰랐다. 그냥 이시스의 실험실에서 슬쩍 가져온 물건이었으니까. 우리가 아는 건 그 주머니 안에 또 다른 시공간이 존재하고 있어서, 부피에 상관없이 뭐든 넣고 보관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여하간 에드가 그 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안에 넣어 온 잡동사니들이 침대에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그중에서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를 집어 들었다.
“저 아까부터 이거 써 보고 싶었어요.”
마법이 걸린 그 물건을 머리에 쓰자, 키가 커지고 가슴이 들어갔으며 목소리가 굵어졌다. 사용하면 성별을 약 3분간 바꿔 주는 물건이었다. 다리 사이를 슬쩍 만져 보니 역시나 그것도 달려 있었다.
“흠? 부인 지금 모습, 니콜라스 공과 상당히 닮은 것 같은데요?”
“정말요? 아버지같이 못된 인상은 아닌 거죠? 다행이다…….”
에드의 말을 듣고 궁금해진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섬세한 얼굴선과 맑은 하늘색 눈……. 남자로 변한 내 모습은 에드 못지않게 꽃미남이었다. 그사이 다른 마법 용품들을 살펴보던 에드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진짜 별걸 다 만들어 놨네요, 이시스는. 시간이 남아돌면 역시 쓸데없는 짓을 하게 되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되게 심심했나 봐요. 나쁜 짓 관두고 계속 이렇게 재밌는 거나 만들면 좋았을 텐데……. 아, 전하도 이거 한번 써 보실래요?”
문득 에드의 여성화 모습이 궁금해진 나는 이번엔 모자를 그의 머리 위에 씌웠다. 곧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키가 훌쩍 줄어들었고, 몸이 호리호리하게 변했으며, 살결이 고와졌다. 완전히 여성의 모습으로 변한 그를 보고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부인? 왜 저를 그런 눈으로…… 혹시 이상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신이 혼신을 기울여 빚어낸 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나보다 예뻐…….’
남성일 때도 어마어마한 미남이었지만, 여자로 변한 에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잃게 했다. 그래도 외모에 꽤 자신감이 붙어 있었는데 남편한테 지다니. 내 자존심엔 제법 큰 스크래치가 생기고 말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다른 것도 구경해 봐요! 이건 어때요?”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모자를 벗겨 내고는 다른 장난감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서 내밀었다. 새로 고른 건 테두리가 은으로 장식된 거울로,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사실 대충만 보고 가져온 거라 아직 기능은 모르고 있었다.
“이건 뭘까요?”
내 물음을 들은 에드는 내게서 거울을 넘겨받곤, 거울 표면에 새겨진 마법 수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 재밌는 걸 집었네요. 아무래도 미래를 보여 주는 물건 같아요.”
“……미래요? 내일이나 내일모레 같은……?”
“네, 맞아요. 그 미래.”
“그럼 대단한 거 아니에요? 왜 이시스는 이런 걸 실험실에 박아 둔 걸까요?”
“기능만 따져 보자면 대단한 물건이 맞죠. 그런데 이건 실용성이 좀 떨어지네요.”
무슨 말인가 궁금하던 차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숙련된 마법사 수십 명이 한꺼번에 마력을 불어넣어야 작동할 거예요. 그렇게 작동시킨다고 하더라도 고작 5초 정도의 미래를 엿보는 게 전부일 거고요. 심지어 미래의 어느 시점을 볼지도 사용자가 설정할 수 없고…….”
“아아……. 그만큼 마력이 필요한 물건이면 못 쓰겠네요. 괜히 가져왔다.”
“못 쓰겠죠, 평범한 사람들은.”
곧 있자 그의 입가에 자신감 가득한 미소가 서렸다. 자신이 그 평범함의 기준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걸 알기에 지을 수 있는, 그런 자신만만한 미소가.
“제가 마력을 제공할 테니까, 궁금하면 한번 들여다보세요. 재밌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