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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그 손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까요? (86/102)

86. 그 손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까요?20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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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힌의 말을 조심스레 따라 읊었다.

16567327930443.jpg“모두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요? 사용자 한 명만 제외하고……?”

아힌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67327930448.jpg“그믐달 태엽이 작동하는 순간 그곳 세계…… 이 세계를 A라고 하자. 작동하는 순간 A의 시간은 멈춘다. 시간이 멈추고 죽은 세계가 되어 버려.”

16567327930443.jpg“……!”

16567327930448.jpg“그와 동시에 새로 복제된, 즉 A’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복제된 [세계 A’]는 원본 [세계 A]와 모든 게 같지만 ‘시간만 과거로 되돌아간’ 형태를 띠고 있지.”

세계가 통째로 복제된다니. 나는 그 거대한 스케일에 미약한 두려움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16567327930443.jpg“……그런 의미였군요? 그믐달 태엽으로 시간을 ‘되돌린다’라는 게.”

16567327930448.jpg“그래. 편의상 되돌린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A의 시간은 그냥 그대로 멈춰 버릴 뿐인 거야. 단지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복제품 하나가 더 생겨난 셈이지.”

16567327930443.jpg“그럼 그 뒤 태엽의 사용자는 어떻게 되나요?”

아힌이 쓸쓸함이 깃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16567327930448.jpg“혼자 남게 된단다. 모두가 사라지고 시간조차 멈춰 버린 [세계 A]에 홀로, 영원토록…….”

16567327930443.jpg“…….”

16567327930448.jpg“억겁의 시간을 버티고 또 버티다가 정신이 나가 버려도 죽을 수 없지. 왜냐면 시간이 멈추어 있으니까. 그래서 이시스가 그믐달 태엽에 눈독 들이지 않는 거다.”

이시스의 비열함에 치를 떨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원본이라고 믿었던 이 세계도 실은 복제된 세계인 게 아닐까? 이미 누군가가 그믐달 태엽을 돌려서 만들어 낸 A’ 혹은 A”인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두려워져서 나는 그것에 관한 생각을 관두었다. 어차피 그 태엽은 마계에 있다고 했으니 나랑은 상관없는 물건일 터였다. 그 뒤에도 나는 이시스에 관하여 이리저리 물었고, 그때마다 아힌은 내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이시스가 그렇게까지 마계에 목을 매는 이유도 이때 들을 수 있었다. 먼 옛날,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아힌에겐 인간을 혐오하고 마족을 추앙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한때의 방황이었다나? 그리고 그때 거둬들인 제자가 이시스라고 했다. 이시스는 어릴 적부터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우연히 아힌의 눈에 띄게 되어, 그의 실험실을 청소하는 하인으로 고용되었다. 처음엔 그저 하인으로 쓸 요량이었지만 이시스는 생각보다 영특했고, 무엇보다 그 또한 아힌처럼 세상을 향한 증오를 가득 품고 있었다. 아힌은 그런 이시스를 어여삐 여겨 마법을 가르쳤다. 그 어린아이가 가슴속에 얼마나 거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 채.

16567327930448.jpg“나는 그 아이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세상을 증오하되, 그 증오를 속에 꾹꾹 담아 놓기만 하고 정작 터트리진 못하는…… 그런 겁쟁이인 줄 알았던 거다. 정말로 착각이었지.”

아힌이 그리 말하며 어느덧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릴없이 내린 그의 시선엔 그 찻잔보다도 더한 공허가 느껴졌다. 텅 비어 버린 눈빛. 그걸 본 나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말했다.

16567327930443.jpg“하지만 이시스는 그 증오를 행동으로 옮긴 거군요.”

16567327930448.jpg“그 애는…… 마족과 계약을 맺었다. 마족의 힘을 받고, 대신 그의 영원한 종으로 살아가게 되는 계약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처음 듣는 척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16567327930443.jpg“찜찜할 텐데요? 마족의 종이 된다니.”

16567327930448.jpg“찜찜하지. 그래서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자들은 당연히 마족과 계약 따윈 안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날 적부터 노예였고, 기왕 노예의 신분이라면 마족의 노예가 되겠노라 택한 거다.”

세상에 불만을 품은 이가 그릇된 사상에 빠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스는 너무도 쉽게 아힌의 잘못된 사상에 물들었을 것이고, 아마 그 사상에 반하는 기존의 세상을 다 부수고 싶어졌을 터다. 그렇게 세상이 멸망하고 모두가 마족의 노예가 되어 불행해진 가운데, 혼자 ‘사랑받는 노예’가 되길 바랐던 게 아닐까? 세상이 만들어 낸 슬픈 괴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침 그 괴물의 탄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가 내게 뻔뻔한 요구를 해 왔다.

16567327930448.jpg“자, 이제 다 말했으니 릴리아에게 데려가 다오.”

16567327930443.jpg“아뇨.”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16567327930443.jpg“제가 물은 건 세 가지였어요. 이시스의 과거, 목적, 그리고 약점……. 앞에 두 개만 말씀해 주시고 약점에 대한 건 말씀 안 해 주셨잖아요.”

16567327930448.jpg“…….”

16567327930443.jpg“그를 죽이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전에도 죽은 줄 알았는데 영혼을 다른 육체에 옮기는 식으로 목숨을 건졌더라고요. 완전하게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나라고 이런 잔인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드도 없이 나 혼자 아힌을 추궁하는 상황이니, 반드시 강하게 나가야만 했다.

16567327930443.jpg‘여기서 내가 어수룩하게 굴어서 이시스의 약점을 알아내지 못하면 끝장이야. 이 세계도 원작 꼴이 날지도 몰라.’

나는 내 어깨에 얹어진 것들의 무게를 상기하며 더욱 마음을 굳세게 먹었다. 그런데도 아힌은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16567327930448.jpg“그건 나도 모른다.”

16567327930443.jpg“…….”

아힌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말없이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자궁의 병사들이 들어와서 아힌의 목에 검을 겨눴다.

16567327930443.jpg“제 말 한마디면 당신 목은 이 자리에서 잘려 나갈 거예요.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16567327930448.jpg“정말로 나는 아는 게 없어.”

16567327930443.jpg“……방금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충고 드렸잖아요.”

내가 신호를 주자, 기사들이 약속된 대로 검끝을 그의 목에 더욱 가깝게 들이댔다.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에 긴 혈선을 만들었다.

16567327930443.jpg“정든 제자를 감싸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그자 때문에 죽었어요. 지금 막지 않으면 앞으로도 많이 죽을 거고요.”

16567327930448.jpg“…….”

16567327930443.jpg“더 긴말 안 할게요. 협조해 주세요.”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는 아힌의 입술을 보고 나는 기사들에게 다시 신호를 줬다. 그들은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단지 얇은 혈선이 그어졌을 뿐이던 그의 목에서 이젠 핏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 잔인하고 괴로운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꾹 참아 냈다.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기에.

16567327930443.jpg“계속 이런 식이면 저도 어쩔 수 없이…….”

16567327930448.jpg“내가 이시스의 약점 같은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먼저 나서서 손을 썼을 거다. 내 소중한 제자가 마족과 계약을 맺기 전에 말이다.”

16567327930443.jpg“…….”

16567327930448.jpg“막지 않은 게 아니라, 막을 방법을 몰라서 막지 못한 것이야.”

저 말이 진짜일까? 나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자색 눈동자에서는 어떤 불안한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16567327930443.jpg‘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말을 안 한다는 건…… 정말로 방법을 모르는 거라고 봐야 하나?’

일단은 그렇게 판단키로 했다. 어차피 내가 이 이상의 잔인한 방법…… 예컨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불로 지진다거나, 손톱을 뽑는다거나, 그런 방법으로 그를 심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16567327930443.jpg“하……. 일단은 알겠어요. 그럼 내일 어머니께 모셔다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16567327930448.jpg“그래. 믿어줘서 고맙―”

16567327930443.jpg“다만, 매 순간 상기하고 또 상기해야 할 거예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가득 눌러 담은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16567327930443.jpg“이시스의 죽음이 미뤄지면 미뤄질수록 누군가의 부모가, 누군가의 형제가, 누군가의 자식들이 죄도 없이 죽어간다는 거…….”

16567327930448.jpg“…….”

16567327930443.jpg“반드시 기억하세요. 절대로 잊지 말고.”

나는 그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기사들을 데리고 나왔다. 물론 그를 향한 의심의 시선은 그곳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두지 않은 채였다. * * * 아힌과의 대화로 얻어낸 정보는 킬리안을 통해서 에드에게 대강 전달만 해 주었다. 침실로 가서 직접 상세히 말해 주기에는 겁이 났으니까. 에드를 찌르는 미래의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본 탓에 그와 마주하기가 조금 꺼려지고 있었다.

16567327930443.jpg‘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담해 볼까?’

워낙 충격적인 사안이라 에드에게 말 안 하려 했는데, 또 혼자서 끙끙 앓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다.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정원에서 생각에 몰두하던 나는 결국 차가운 밤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침실로 향했다.

16567327930443.jpg‘역시 자고 있구나.’

일부러 시간을 늦게까지 끌다가 들어간 거라 그는 먼저 잠들어 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름다운 눈썹과 완벽한 콧대, 입술, 목선……. 기억 위에 영원토록 새길 기세로 그의 모습을 눈동자 속에 담아냈다. 천천히 그를 살피던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그의 가슴팍 위에서였다. 거울 속에서 내가 직접 단검을 박아 넣었던 그 가슴팍 위.

16567327930443.jpg“…….”

나는 조심스레 몸을 뒤로 물렸다. 역시 그 미래를 확실히 피해 가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기 전까지는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듯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16567327984137.jpg“또 어딜 가요? 방금 와 놓고.”

어느샌가 눈을 뜬 그가 내 팔목을 붙잡고선 그리 물었다. 나를 얽어맨 손가락에서부터 느껴지는 남자의 악력, 그리고 은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매번 그랬듯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지은 미소로써 숨겼다.

16567327930443.jpg“……일어나 계셨어요?”

16567327984137.jpg“어떻게 자겠어요. 침대가 이렇게 차가운데.”

그가 장난스레 타박하고는 나를 안으려 했다. 평소라면 나도 급히 샤워를 마치고서 곧장 그의 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기에, 그의 손을 가만히 풀어냈다.

16567327930443.jpg“뭐 한 가지만 여쭤도 될까요?”

16567327984137.jpg“흐음?”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에드도 미소를 거두었다. 곧이어 우리 사이에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다소 파격적인 서두로써 깨트렸다.

16567327930443.jpg“만약…… 정말로 만약에 말인데요……, 제가 모종의 이유로 전하께 칼을 휘두르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16567327984137.jpg“칼? 그 날카로운 칼을 말하는 거예요?”

16567327930443.jpg“네.”

16567327984137.jpg“되게 이상한 질문이네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이상한 질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진지하게 듣는 기색이 아니라서 내가 직접 몇 가지 예를 들어 주었다.

16567327930443.jpg“제가 이시스의 저주에 걸린다든가, 몽유병에 걸려서 자다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한다든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16567327984137.jpg“아,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16567327930443.jpg“어떻게 대처하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요.”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정작 들은 대답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16567327984137.jpg“그냥 맞죠, 뭐.”

16567327930443.jpg“……그게 끝?”

기껏 큰맘 먹고 던진 물음이었는데 이런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내 목소리는 어느덧 조금 높아져 있었다.

16567327930443.jpg“아니, ‘그냥 맞죠’라뇨……. 주먹으로 때리는 게 아니에요. 칼날로 심장을 노리고서 찔러 오면 어떻게 대처할 건지 여쭌 거예요. 그런데 ‘그냥 맞죠’가 대답인가요?”

16567327984137.jpg“부인도 알잖아요, 그렇게 해도 잘 안 죽는 거.”

16567327930443.jpg“…….”

16567327984137.jpg“저를 독살하려 들었던 황후가 칼질은 안 해 봤을까요? 부인이 아니어도 제게 칼을 꽂아 넣으려 들었던 인간들은 많았어요. 개중엔 덩치가 곰처럼 커다란 암살자도 있었고요.”

16567327930443.jpg“…….”

16567327984137.jpg“그런 암살자도 못 죽인 저를 죽이려면―”

그가 도중에 말을 잠깐 멈추곤 내 손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할 수 있으면 한번 숨통을 조여서 죽여 보라는 듯이. 당연하지만 나는 손을 덜덜 떨기만 했고, 그는 다정한 음성으로 끊어진 말을 이었다.

16567327984137.jpg“저를 죽이려면, 이 가늘고 하늘하늘한 손으론 힘들 거예요. 제게 기쁨을 안겨주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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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을 움켜쥐지도 못한 채 가여울 정도로 떨리던 내 손을 그가 본인의 입술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드라진 손등뼈 사이사이에 내리눌러진 그의 입술은 어느덧 내 영혼에도 자국을 남길 만큼 뜨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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