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네 손에 죽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87/102)

87. 네 손에 죽지 않겠다고 약속할게2022.01.28.

손등에서만 머물던 에드의 그 달궈진 입술이 이윽고 예민해진 손목 안쪽에도 닿아왔다.

16567328079662.jpg“……!”

몇 번을 느껴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간지러운 감각……. 나는 그 감각에 놀라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가 그런 나를 단단히 받쳐 안더니, 동시에 내 등 뒤로 꽉 묶여 있던 드레스 끈을 풀어 주었다. 그 뒤 우리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서로의 손가락을 진득하게 얽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그의 달뜬 숨결……. 쾌락에 겨운 듯 찌푸려지는 잘생긴 얼굴……. 황홀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단단한 육신……. 그 모든 게 온몸이 녹아내릴 만큼의 쾌락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깊게 아로새겨진 것은, 그가 나를 위해 속삭여 준 말이었다.

16567328079668.jpg“그러니까, 괜찮아요.”

16567328079662.jpg“네?”

16567328079668.jpg“거울 속에서 뭘 봤든―”

그가 열기로 가빠진 숨을 몰아쉰 뒤, 다시 말했다.

16567328079668.jpg“뭘 봤든, 겁먹을 필요 없다고. 내가 부인 손에 살해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거울을 들여다봤다가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아까 그에게 ‘당신을 찌르면 어쩔 것이냐’고 물었을 때부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거울 속에서 무얼 봤는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리고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들려주었다.

16567328079662.jpg“정말이죠? 정말로 제가 갑자기 미쳐서 전하께 그런 짓을 해도…….”

16567328079668.jpg“네, 안 죽겠다고 약속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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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결국 눈가에 고였던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내가 혹여 정말로 그를 상처입히게 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정말로 최악의 경우 그를 죽이기 전에 내가 알아서 그의 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는 단 몇 마디 말로써 내 그런 두려움을 전부 녹여냈다.

16567328079662.jpg‘그래, 에드 말이 맞아. 에드는 내 행동으로 위험해질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계속 곁에 남아도 된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바로 선 그 확신을 따르기로 했다. * * * 늦은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탓에 아침부터 눈뜨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했기에, 나는 적당히 채비를 마친 뒤 아힌을 찾아갔다.

16567328079662.jpg“준비는 다 끝난 거죠?”

16567328096053.jpg“물론이지. 당장 출발하는 게 좋겠구나.”

대체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그는 퍽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곧장 목적지를 알려 주었다.

16567328079662.jpg“그럼 지금 당장 북부 공작성으로…….”

16567328096053.jpg“잠깐, 북부의 몬트 공작령으로 가야 한다고?”

방금까지만 해도 잔잔했던 그의 기세가 갑작스레 난폭해졌다.

16567328096053.jpg“릴리아의 딸이라 해서 조금 오냐오냐해 주었더니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16567328079662.jpg“……?”

사실 그가 선의로써 나를 오냐오냐한 건 아니다. 에드에게 흠씬 쥐어 터져서 어쩔 수 없이 내게 협조적으로 나온 것이었지. 하지만 분노한 듯 보이는 그에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며 자존심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마침 그는 본인이 노기를 드러내는 이유를 알아서 알려 주었다.

16567328096053.jpg“릴리아가 몬트 공작과 혼인하여 북부로 갔다는 걸 내가 몰랐겠느냐? 릴리아를 찾을 때 당연히 그곳을 먼저 뒤져 보았다. 그런데 거기 없기에 네게 릴리아의 행방을 물은 것이고.”

어머니를 만날 생각으로 성질을 눌러 참으며 내 요구를 다 들어주었는데도, 자신을 그 ‘북부’에 데려간다고 하니 화가 폭발한 모양이다. 그가 이를 빠득 갈아 냈다.

16567328096053.jpg“내가 이미 몇 번이고 거길 뒤져 봐서 뻔히 다 아는데 감히―”

16567328079662.jpg“잠깐, 그 뒤져 보았다는 게 정확히 언제죠?”

내 물음에 그는 일단 화를 삭이고서 대답했다.

16567328096053.jpg“……대략 18년 전이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찾아가진 못하고 마법으로 몇 번 염탐했었지. 몇 번이나 찾아봤지만, 릴리아는 거기 없었다.”

당연했다. 18년 전이면 어머니는 이미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을 때였으니까. 직접 찾아갔거나, 최소한 사람을 보내서 수소문해 봤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겠지만…… 은둔형 외톨이 마법사인 아힌은 그냥 마법으로 염탐하는 것에서 그친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18년 전이 마지막이었고.

16567328079662.jpg‘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이제 밝혀야 하나? 어차피 이시스에 관한 정보는 얻을 만큼 다 얻었으니까.’

아힌이 가진 정보가 필요했기에 그에게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처럼 말했었다. 엄밀히 따져 보면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말하지 않았을’ 뿐. 그 두 가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달랐다.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면 나중에 아힌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돼도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돌아가신 걸 이미 아시는 줄 알았죠.’ ―라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작성에 어머니가 없었노라고 말하는 그에게 지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감춘다면, 그건 명백히 ‘거짓말’을 한 게 되었다. 왜 죽은 걸 진작 안 말했느냐고 아힌이 나중에 길길이 날뛰어도 변명할 거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16567328079662.jpg“18년 전이면 당연히 성의 ‘지상층’에서는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지하에 계실 때니까요.”

16567328096053.jpg“……? 무슨 소리냐. 공작 부인의 신분이 됐을 텐데 왜 지하에 있단 말이야. 설마 몬트 공작이 감금한 것이냐?!”

16567328079662.jpg“아뇨.”

나는 이어서 말해 주었다. 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어머니의 행방을.

16567328079662.jpg“저희 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셔서, 지하 묘지에 안치되셨어요.”

  * * * 아힌에 관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레냐가 말했었다. 영 불안했음에도 그녀가 그러겠다고 하니, 에드 또한 얌전히 기다리려 했었다. 문득 불길한 마력의 파장이 감지되기 전까지는.

16567328079668.jpg“……!”

그는 이것이 어떨 때 발생하는 파장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레냐와의 결혼식 날 닐스 때문에 이성을 잃고 폭주했을 때도 이런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으니까.

16567328079668.jpg‘그 노인네가……?’

근처에서 이 정도 마력을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에드 자신을 제외하면 아힌뿐이었다. 아힌과 레냐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그는 마법을 써서 급히 그 장소로 이동했다.

16567328079668.jpg“부인!”

에드가 나타나자 레냐는 급히 그에게로 와서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에드는 그런 레냐를 품에 끌어안은 채로 상황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 험악한 마력의 근원지는 아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것도 같았지만, 일단 에드는 물었다.

16567328079668.jpg“다치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에요?”

16567328079662.jpg“전 괜찮아요. 근데 아힌 할아버지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 걸 듣자마자 갑자기 저렇게 되셨어요.”

레냐의 설명을 듣고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67328079668.jpg“전에 제게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 같네요. 감정이 격해져서 마력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거겠죠.”

16567328079662.jpg“네? 하지만 저 할아버지는 상당히 능숙한 마법사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도 통제권을 잃나요?”

16567328079668.jpg“마력을 다루는 데 능숙하면 쉽게 통제권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도 신은 아니니까요.”

턱짓으로 아힌을 가리키곤 에드가 말했다.

16567328079668.jpg“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으면 저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죠.”

이유는 모르겠으나 릴리아의 죽음이 아힌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마력의 통제에 관해선 누구보다 뛰어나야 할 노인이 저렇게 될 정도라면.

16567328079662.jpg“어쩌죠?”

레냐의 물음에 에드는 쓴 한숨을 내쉬었다.

16567328079668.jpg“정말 이러기는 싫지만…… 공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빈사 상태에 빠질 정도로.”

16567328079662.jpg“……네?!”

16567328079668.jpg“대충 보니 설득이 먹힐 상태가 아니에요. 어서 기절시키지 않으면 근방 마력의 농도가 너무 높아져서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겠어요.”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알기에 레냐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만 해도 아힌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 때문에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숨이 막혀 오고 있었다. 성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일찌감치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6567328079668.jpg“어중간한 공격은 안 먹히겠고, 일단 이걸로…….”

그리 말하는 에드의 손 위로 어느새 전류가 흐르듯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치한 퇴치용 전기 충격기 따위보다도 몇 배는 더 위험하게 번뜩이는 빛깔과 소리를 내며.

16567328079662.jpg“전, 전하! 잠깐만요! 아직 설득을 시도해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안 된다고 가정하는 건 너무 섣부르지 않을까요?”

16567328079668.jpg“하지만 지금 대충 봐도…….”

16567328079662.jpg“시도는 해 봐야죠. 제가 일단 가서 얘기해 볼게요. 전하께서 같은 상태에 빠지셨을 때도 진정시켜 본 적 있으니까.”

이미 같은 상황을 겪어 본 레냐는 그때처럼 성력을 끌어올려, 아힌의 마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꽤 힘든 일이었지만 대충할 순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분명 아힌에게 다가갈수록 더욱 마력이 짙어질 것이기에.

16567328079662.jpg“혹시라도 제가 공격당할 것 같으면 뒤에서 엄호해 주세요.”

16567328079668.jpg“……네. 아니면 지금이라도…….”

16567328079662.jpg“아뇨.”

16567328079668.jpg“네…….”

이미 말 잘 듣는 남편의 길을 걷고 있던 에드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레냐의 주변을 엄호했다. 레냐는 제 주위를 더욱 단단히 성력으로 감싸고는 아힌에게로 접근했다. 가누기 어려운 감정에 짓눌려서 의식을 반쯤 잃은 것처럼 보이던 아힌이 레냐를 향해 말했다.

16567328096053.jpg“안 죽었다는 것 안다.”

16567328079662.jpg“…….”

16567328096053.jpg“그래, 죽었을 리가 없어.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전에 레냐의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으니까. ―짝! 상황과 걸맞지 않게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고 나서야 그는 패닉 상태에서 얼추 빠져나온 듯했다.

16567328079662.jpg“때려서 죄송해요. 이제 정신이 드세요?”

16567328096053.jpg“…….”

대답하진 않았지만 폭주하듯 날뛰던 마력은 확실히 옅어지고 있었다. 그 틈에 레냐는 음울한 진실을 되새겼다.

16567328079662.jpg“돌아가셨어요.”

16567328096053.jpg“…….”

16567328079662.jpg“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게 당신뿐은 아니에요. 당장 저희 아버지께서도 ‘릴리아가 죽었을 리가 없어, 아직도 성에 돌아오면 웃는 얼굴로 반겨 줄 것 같은데……’ 하고, 수천 번은 더 되뇌셨죠.”

16567328096053.jpg“…….”

16567328079662.jpg“그렇게 간절히 바라도 변하지 않더라고요. 어머니께선 정말로 돌아가셨어요.”

릴리아의 죽음을 진짜로 부정하고 싶은 건 아힌이 아니었다. 몬트 가문, 특히 그중에서도 공작은 그녀의 죽음 이후 지독한 슬픔에 젖어서 살았다. 그리움에 사무칠 때마다 제 아내가 남기고 간 작은 추억 조각을 얼마나 매만지고, 매만지고, 또 매만졌을지…… 레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났다. 더 괴로울 이들조차 슬픔을 참고 견디는데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는 아힌에게.

16567328079662.jpg“정말로 어머니를 뵙길 바라시면 우선 예의를 지키세요. 제대로 된 이유도 설명 안 하면서 이렇게 행패부터 부리는 분을 묘지로 모셔다 드릴 순 없어요.”

‘이런 짓을 하는 마땅한 명분이 있다면 말해 보라’는 그 권유에 아힌은 가만히 멈추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 레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16567328079668.jpg“부인!”

레냐가 공격당한다고 여긴 에드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즉시 그녀는 손을 들어서 그의 행동을 막았다. 왜냐하면―

16567328079662.jpg‘나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야.’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힌의 손을 타고서 느껴지는 마력은, 단지 레냐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 * 곧 아힌의 마력이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기분이 들었다. 그다음엔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낯선 기억들이 뇌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둡고 음침한 실험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스승과 제자……. 내 것이 아닌 그 낯선 기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스승인 아힌이었다.

16567328096053.jpg“이시스, 그만둬라. 더 마족의 힘을 빌려 쓰면 너는…….”

16567328166665.jpg“더 힘을 빌려 쓰면 사후에 영혼을 빼앗긴다고요? 이미 각오했습니다. 사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영혼째로 끌려가서 마족의 종으로 부려진다 해도 멈출 생각 없어요.”

  아힌의 충고에 제자, 이시스가 그리 대꾸했다. 나는 지금 보이는 이것이 아힌의 과거 기억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아힌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을 때 마법으로 기억을 흘려 넣었을 터였다.

16567328079662.jpg‘무슨 상황이지?’

그런 의문이 피어오르던 차, 마침 듣게 된 아힌의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16567328096053.jpg“……대체 뭐 때문에 영혼을 팔아 가면서까지 그 아이를 저주하려는 게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네게 뭘 잘못했길래.”

16567328166665.jpg“그냥 재수가 없잖아요. 누군 날 적부터 노예 신세였는데, 그건 태어나기도 전부터 성녀라느니, 세상을 구할 구원자라느니…… 그런 말 같잖은 칭송이나 받는 게.”

16567328096053.jpg“…….”

16567328166665.jpg“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새끼를 릴리아 ‘님’이라고 존칭까지 쓰면서 부르질 않나,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더군요. 배알이 뒤틀려서 더는 못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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