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한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어요2022.02.01.
과거 속 이시스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성녀라 불려서 배알이 뒤틀렸다니? 그래서 저주를 건다니? 게다가 그 저주를 건다는 대상이―
‘어머니한테……? 우리 어머니한테 저주를 건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가 되리란 신탁을 받았음에도 성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채로 태어나셨던 어머니……. 어쩌면 나는 그녀의 모든 불행이 시작된 시작점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를 불행으로 이끈 자들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과거의 시간대에서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든 거냐.”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저는 원래 이런 놈이었어요. 당신도 제가 이런 놈이라서 제자로 받아 준 거잖아요.”
“…….”
“당신이 나를 선택했고, 당신이 나를 키웠어. 그러니 지금 와서 그렇게 섭섭하게 남처럼 굴지 마세요. 스승이면 본인이 길러 낸 제자가 행복해지게끔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아힌을 원망스레 노려보던 이시스가 떠나려는 듯 등을 돌렸다.
“기다려!!”
그런 그를 아힌이 곧 따라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시스를 향해 뻗었던 그의 손은 이시스가 마법으로 생성한 불의 장벽에 가로막혔고, 끝내 무엇에도 닿지 못한 채 허무하게 떨어졌다. 이시스가 무엇을 하러 가는 건지 알아챈 나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안 돼! 그만해!!’
저자가 어머니께 위해를 가하기 전에 당장 달려가서 막으라고, 아힌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보는 모든 것은 이미 흘러 지나간 과거의 기억일 뿐. 그러니 현재의 내가 아무리 외쳐도 과거의 아힌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힌에게서 떠밀려 오는 과거의 상념들을 그저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야.]
[스승으로서 저 아이가 품은 열등감을 일찌감치 눈치챘더라면…….]
[그 열등감 때문에 마족과 계약까지 맺게 되리란 걸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저 아이가 저렇게 되기 전에 막을 수도 있었어.]
[그러니 모든 것은 스승인 내 죄고, 내겐 저 아이를 막을 자격이 없어.]
[그래, 차라리 내버려 두자. 그 릴리아라는 아이에게 저주를 내려서 지독한 열등감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다면…….]
아힌은 놀라울 정도로 무력하고 한심한 생각들을 하면서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그보다 더한 무력감에 몸부림쳤다. 바꿀 수 없는 불행한 과거를 지켜보는 것은 정신적 고문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로 괴로웠으나 아힌은 멈추지 않고 내게 과거의 상념들을 쏟아 냈다.
[릴리아가 조금 가엾지만…… 그래도 좋은 집안 아가씨라는 점은 변하지 않지. 그깟 저주로 성력을 잃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불행해질 일은 없어.]
어머니가 태어나기 이전의 아힌은 그렇게 자신의 죄를 축소했고―
[성력을 못 가지고 태어나서 일가친척들한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고? 쯧, 한심하고 비열한 작자들이군. 그깟 성력이 뭐라고 어린애를 못살게 굴다니.]
어머니가 태어난 이후엔 자신 대신 타인을 비난했으며―
[왜 그 아이는 아무런 노력도 하질 않는 거지? 성력을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강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왜 노력할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불행에만 취해 있느냐는 말이야.]
끝내는, 그저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게로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그렇게 제 안전한 실험실에 박혀서 비겁한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던 그가 움직인 것은 무려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찾아가서 한마디 해 줘야겠다.]
죄악감을 품고서도 차마 두려워서, 자신의 잘못으로 불행해진 아이를 찾아가는 게 두려워서 숨어만 있던 겁쟁이…….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 죄를 마주할 최소한의 용기가 생긴 그 겁쟁이는 어머니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보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처참한 불행 속에 파묻혀 살았는지를.
“정신 차려!! 정신 차리세요, 부인!!”
귓가로 에드의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아힌의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나는 그 목소리 덕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아…….”
“괜찮아요?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울길래 급히 깨웠어요.”
에드의 말을 듣고서 눈가를 손으로 훑어보니 과연 눈물이 맺혀 있었다.
“별거……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우선은 그런 거짓말로 에드를 진정시키곤, 아힌을 바라보았다. 그다음― ―짝! 나는 아까 그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때렸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한 힘을 실어서 아힌의 뺨을 후려쳤다.
“전부 당신들 때문이었어.”
“…….”
“당신들 때문에 어머니가…….”
이시스의 열등감과 아힌의 우유부단함이 어머니를 살해했다. 만약 어머니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성력을 고스란히 지닌 채로 태어나, 신탁에 따라 구원자로서 추앙받으셨을 터다. 그리고 병세가 번진 채로 무리한 출산을 감행하지도 않으셨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본인의 성력으로 병을 치료하셨을 테니까 말이다.
“…….”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입에 담기가 힘들어서였다. 아힌도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제 죄를 시인하고 내게 사과할 용기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죄송해요, 저 잠깐 혼자 있고 싶어요. 저 사람은 그냥 내보내 주세요. 더 볼 일 없을 테니까.”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억누르기 힘들어진 나는 에드에게 그리 말하곤 황급히 장소를 벗어났다. 다행히 배려심 많은 에드는 도망치듯 떠나가는 나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 * * 그 뒤 나는 조용히 침실로 돌아와서 오열하다가, 잠깐 기절하듯 잠들었다. 상상도 못 했던 과거를 접한 까닭에 정신적 피로가 누적됐던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고서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땐 이미 밤이었다.
“아, 미안해요.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내 옆에 누워있던 에드가 쓰다듬던 손을 급히 거둬들였다.
“괜찮아요. 더 쓰다듬어 주셔도……. 그런데 아힌은…….”
“일단은 내보냈어요. 부인이 보내 주라고 했으니까.”
“고마워요. 저 아깐 정말로 힘들어서…….”
말을 흐리는 나를 에드가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위태로이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머리에 입술을 대고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본 거죠? 아힌으로부터.”
나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원인을 봤어요. 아힌이 연관돼 있더라고요. 그런데 전 그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못 했죠. 바보처럼.”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받을 때 아무것도 못 하는 무력감…… 저도 잘 알아요. 어떤 마음일지 충분히 이해해요.”
그래, 생각해 보니 그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귓가에 에드가 이어서 속삭였다.
“그래서 한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었어요. 제가 지키지 못한 사람을, 놓친 인연을 되찾고 싶어서.”
그 순간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아힌이 말했던 그 위험한 태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두려워진 나는 떨리는 입술로 더듬듯 물었다.
“……지금도 그걸 원하세요?”
“아뇨. 잃을 게 없을 땐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시간을 되돌리면 지금 가진 인연들마저 잃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가진 인연…….”
“네. 과거보다는 현재의 인연을 놓지 않는 일에 집중하려고요. 부인은요?”
내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저도요.”
어느덧 내 목소리엔 조금 힘이 돋아나 있었다.
“이제 약한 소리 안 할게요. 그 말씀대로, 지금은 과거에 묶여 있을 때가 아니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어머니는 이미 떠났지만, 에드는 당장 내 눈앞에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소중한 사람마저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당장 이시스가 설치는 이 긴급한 상황에 처량하게 과거 생각이나 하며 주저앉아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에드는 결심을 다지고 있던 나를 가만 살피더니, 뭔가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걸 보세요.”
“이건…… 편지인가요?”
“아힌이 부인께 남겨 두고 갔어요.”
그 남자가 두고 간 편지라는 말에 내 손끝이 잠깐 움찔거렸다. 에드가 그런 내 손을 가만히 달래듯 붙잡았다.
“힘들어하는 부인한테 이걸 보여 줘도 괜찮을지, 고민 많이 했어요. 운이 좋으면 안에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죄를 빙자한 자기합리화 따위나 줄줄이 적혀 있으면 분명 또 상처받을 테니까.”
“아아…….”
“그런데 지금 보니까 보여 줘도 될 것 같네요. 저보다도 마음이 씩씩하고 튼튼한 사람이잖아요, 부인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씩씩하게 끄덕인 뒤, 편지를 뜯었다. 그 안에 본인 잘못 아니라는 식의 헛소리가 적혀 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릴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그 사실마저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 유약함이 네게 더 큰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구나. 나는 용서를 빌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겠지.― 편지의 처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네 덕에 나는 비로소 외면하기만 했던 제자의 만행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저지른 죄악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끔찍하다는 사실 또한 덕분에 알게 되었지.― 그런 문장으로 이어졌다. 편지의 절반가량이 그런 자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너뿐만 아니라 몬트 공작, 너의 오라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 황자에게도…… 나는 실패한 스승으로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싶다.― 그 편지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시스는 내 어머니인 공작 부인 말고도 황실에도 어느 정도 마수를 뻗쳐 놓았던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에드에게 사과를 건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 짐작할 수 있었을 뿐. 내가 조금 더 불길함을 느낀 것은 그 편지의 후반부를 읽었을 때였다. ―과거를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 나 자신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희생…….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감각에 나는 읽는 속도를 높였다. ―오늘 밤, 황성에서 큰 소란이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게 잘 끝나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땐 황태자가 품고 있는 림피크 씨앗을 누구든 나서서 불태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화염으론 불타지 않으니, 아래에 적어 둔 방법을 잘 숙지해 두어라.― 그 밑으로는 림피크 씨앗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다만 나는 지금 그 부분을 읽을 여력이 없었다. 바로잡다, 희생, 소란……. 아힌이 남겨둔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이며 불길한 감각을 자아내고 있었다. ―수만 번을 반복해도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야기하마. 정말로 미안하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아힌의 계획을 알 것 같았다.
“안 돼…….”
“뭐라고 적혀 있어요?”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묻는 에드에게 나는 다짜고짜 외쳤다.
“지금 당장 황성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