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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악당보다 더 악당 같은 (89/102)

89. 악당보다 더 악당 같은202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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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냐가 아힌의 편지를 읽기 30분 전. 이시스는 황제의 침실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닐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의 가슴을.

16567328428665.jpg‘잘 하면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겠군.’

림피크 씨앗은 닐스의 심장으로부터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는 양분을 공급받았다. 이제 필요한 건 성장을 위한 약간의 계기뿐. 머지않아 싹이 트리란 기대감에, 이시스의 입술 위로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위이이잉……. 문득 기묘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윽고 소리의 발원지를 확인한 이시스는 당혹감으로 낯을 굳혔다. 소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카드 한 장을 빼내 들었다.

16567328428665.jpg‘이건…….’

그것은 수백 년 전, 그의 스승이 준 물건이었다. 그 카드를 지니고 있으면 언제든 자신이 이시스를 방문할 수 있노라고 했었다. 그러나 품에 지니고 다닌 이래 단 한 번도 미동하지 않았던 물건이건만…….

16567328428665.jpg‘왜 지금에서야……?’

당혹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이시스는 일단 카드의 귀퉁이를 붙들었다. 그리고 먼 과거에 스승이 알려 주었던 대로 그것을 죽, 찢어 냈다. 곧 카드에 담긴 마법이 실행되며, 먼 곳에 있었을 스승의 육신이 그곳에 나타났다.

16567328428679.jpg“오랜만이구나, 이시스.”

16567328428665.jpg“……왜 왔습니까?”

16567328428679.jpg“그게 간만에 보는 스승에게 할 말이냐?”

아힌은 능청스레 그리 말하고는 테이블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16567328428679.jpg“우선 차나 한 잔 내어 다오. 술도 좋고.”

16567328428665.jpg“…….”

반목한 뒤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스승이 갑자기 찾아와선 마실 거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시스는 아힌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일단 황실의 시녀를 불렀다. 곧 무표정한 시녀 하나가 들어와선 고개를 조아렸다.

16567328428679.jpg“부르셨습니까?”

16567328428665.jpg“차.”

16567328428679.jpg“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시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인형처럼 고개를 조아리면서 차를 가지러 떠났다.

16567328428679.jpg“…….”

아힌은 그 모습을 넌지시 지켜본 채로 말이 없었다. 이시스 또한 마찬가지로 딱히 말문을 열지 않았다. 아힌이 다시 입술을 연 것은 시녀가 마침내 차를 가져왔을 때였다.

16567328428679.jpg“뭐하러 마법을 썼느냐?”

16567328428665.jpg“이 시녀요?”

16567328428679.jpg“그래. 이미 마법의 힘으로 황태자를 네 마음껏 주무르고 있다고 들었다. 황태자의 권위를 빌리면 시녀들도 알아서 널 모실 것인데, 무엇 하러 마법을 걸었느냐는 뜻이다.”

늙었다 하더라도 그는 한때 대현자라 불리었다. 차를 내어 온 시녀가 이시스의 세뇌 마법에 걸린 상태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굳이 뭐하러 죄 없는 이에게 마법을 남용했느냐는 아힌의 힐난에, 이시스는 가벼이 웃음을 터트렸다.

16567328428665.jpg“알아서 모시긴요. 황실 시녀들 콧대가 얼마나 높은 줄이나 아십니까? 귀족이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든, 기사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것들입니다.”

16567328428679.jpg“…….”

16567328428665.jpg“마법을 걸면 그런 건방진 아랫놈들하고 입씨름할 필요가 없죠. 이런 짓도 마음껏 할 수 있고.”

이시스가 제 몫의 찻물을 시녀의 얼굴에 끼얹은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6567328428679.jpg“……!!”

경악한 아힌과 달리, 세뇌 마법에 걸린 시녀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끈적거리는 찻물을 얼굴에 맞는 모욕을 당하고도 그저 인형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시스는 재밌다는 듯 웃었고, 아힌은 낯을 굳혔다.

16567328428679.jpg“이시스…….”

16567328428665.jpg“그렇게 보지 마시죠. 제가 이러는 게 정 꼴 보기 싫으시면 어서 할 말이나 하고 떠나시면 될 일입니다.”

당장에라도 노기를 토해낼 듯 보이던 아힌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 분노 대신 그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긴 한숨이었다.

16567328428679.jpg“나는 네게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 주고자 왔다. 원래라면 진즉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너무 늦고 말았구나. 그래도 영특한 너라면 지금이라도 금방 깨우칠 수 있겠지.”

그리 말함과 동시에 아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시녀에게 마법으로 또 다른 암시를 걸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떠나도록, 그리고 떠난 다음엔 이시스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16567328428679.jpg“오래전에, 나는 어느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었다. 그중 첫 번째 선택지는 그 길목에서 얻어맞고 있는 노예를 못 본 척하며 지나가는 것이었고―”

그는 시녀가 제대로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끊어진 뒷말을 이었다.

16567328428679.jpg“다른 하나는 그 아이를 거두어서 돌보는 것이었지. 그중에서 내가 택한 건 후자였다.”

16567328428665.jpg“……이제 와서 케케묵은 과거 얘길 꺼내는 이유가 뭡니까. 뭘, 어쩌자고요.”

아힌이 말한 ‘얻어맞고 있던 노예’가 누굴 말하는지 깨달은 이시스가 모멸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힌은 끝까지 들어 보라는 말로 이시스를 진정시키고는 다시 오래 묵은 옛일을 끄집어냈다.

16567328428679.jpg“그 아이를 거두어서 가르치던 중에 또다시 선택지가 두 가지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는 녀석이 잘못된 사상을 품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16567328428665.jpg“…….”

16567328428679.jpg“그리고 다른 하나는 녀석의 가슴에 응어리진 억울함을 헤아려서 잘 타이르는 것이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때도 후자를 택했지.”

16567328428665.jpg“…….”

16567328428679.jpg“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다. 내 제자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기르고 싶어서. 그 마음이 되레 네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16567328428665.jpg“무슨 소릴 하려나 궁금해서 불러 봤더니만,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군요. 이제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아힌은 침실을 나서지 않았다. 단지 이시스를 깊은 눈길로 응시하며 입술을 움직였을 뿐.

16567328428679.jpg“그렇게 잘못된 선택만 반복한 나지만 그래도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남아 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고.”

긴 이야기를 마친 아힌이 눈짓으로 닐스를 가리켰다. 그 행동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16567328428679.jpg“지금에라도 멈추겠다고 말하거라.”

16567328428665.jpg“…….”

16567328428679.jpg“그럼 내가 도와주마. 함께 대가를 치러서 마족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씨앗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마족과 인간의 계약은 쉬이 파기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이시스처럼 긴 시간 힘을 빌려 왔다면 더더욱. 그것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대가를 함께 짊어지자고 말한 것은 제자를 향한 애정이, 그리고 죄책감이 여전히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어서였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감정들은 조금도 마모되지 않았다. 그러나―

16567328428665.jpg“뭐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데…… 당신은 당신 선택을 실수라 여길지 몰라도, 전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이시스는 끝내 스승의 마지막 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날카로운 말의 가시들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아힌에게 쏟아졌다.

16567328428665.jpg“저는 매 순간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시간이 수백, 수천 번 과거로 되돌아간다 해도, 저는 그때마다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똑같은 마족과 똑같은 계약을 맺고, 성녀를 똑같이 저주할 것이며, 황태자를 똑같이 이 꼴로 만들 거란 말입니다.”

16567328428679.jpg“…….”

16567328428665.jpg“아, 착하고 불쌍한 어린애인 척하면서 당신같이 멍청한 인간 등쳐먹는 짓거리도 물론 똑같이 할 거고 말이죠.”

고요한 침실을 가득 메우는 이시스의 경쾌한 웃음소리. 아힌은 그 경쾌함과 대비되는 창백한 낯빛으로 휘청이며 닐스에게 다가갔다. 닐스의 심장에 박힌 씨앗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양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미 닐스를 구하긴 늦었을 터. 파괴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16567328428679.jpg“그래, 그렇구나……. 그것이 네 선택이었어.”

당장 부서질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아힌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닐스를 보고 서 있던 까닭에, 이시스는 스승의 눈가에 맺힌 서글픔과 애석함을 보지 못했다. 아힌은 제 손으로 조용히 눈가를 가렸다.

16567328428679.jpg“내게도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구나.”

16567328428665.jpg“……?”

16567328428679.jpg“이번엔 제대로 고를 생각이다. 내 실수를 바로잡아야지.”

아힌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무언가 하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이시스가 급히 달려들었으나, 늦었다. 곧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버릴 만큼 강렬한 빛과 소리가 아힌의 몸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 * *

16567328428665.jpg‘젠장!!’

폐허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시스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폭발 직전에 낌새를 느끼고 보호 마법을 펼쳐서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너진 황성의 잔해가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16567328428665.jpg‘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뜬금없이 와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음 왔을 때부터 분위기가 퍽 이상했었다. 대화 중에도 내내 죽상이던 아힌은 마지막에 닐스의 상태를 살폈고, 그를 되살릴 수 없으리라 판단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전신이 희게 빛난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시스가 상황을 파악하고 조처하려 들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하얀 빛의 폭발에 휩싸이고 있었다. 자폭 마법. 그건 한 명의 마법사가 자신의 모든 생명력 및 마력을 희생하여 주위를 잿더미로 만드는 마법이었다. 닐스의 심장에 심긴 것이 평범한 방식으론 제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듯했다.

16567328428665.jpg‘지금껏 입 닥치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더니 왜 갑자기 찾아와선……!! 그보다 씨앗은 어떻게 됐지……?’

림피크 씨앗은 이시스가 복종을 맹세한 마족이 그에게 하사한, 귀한 물건이었다. 웬만한 방식으론 쉽게 제거되지 않을 테지만, 대현자가 제 생명을 바쳐서 일으킨 폭발에서까지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에드와의 관계도 틀어진 상황에서 그 씨앗마저 없다면 오랜 꿈이 물거품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라, 그는 사력을 다하여 몸을 움직였다.

16567328428665.jpg“헉……. 헉…….”

그렇게 간신히 일어선 그는 제 눈에 마법을 걸어, 마족의 시력을 잠깐이나마 빌려 왔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산 사람은 물론이고 시체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폭발 직전 아힌이 수를 써서 밖으로 다들 내보낸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재차 욕설을 지껄이며 주위를 살피던 그의 시야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새카맣고 굵은 나뭇가지에 보호되듯 감싸인 사람의 형상이었다.

16567328428665.jpg‘찾았다……!!’

이시스는 곧장 닐스에게로 달려갔다. 제 숙주를 지키고자 가지를 뻗은 림피크 덕분에 아직 닐스는 살아 있었다. 나무 자체도 여기저기 그슬리긴 했지만 아예 숯덩이가 되진 않았다. 아직 살릴 수 있다. 그리 판단한 이시스는 재빨리 품속에서 시공간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아 두었던 치유의 물약을 닐스에게 먹이려 시도했다. ―퍽! 그 순간, 병을 들고 있던 이시스의 손을 누군가 걷어찼다. 치유의 물약은 병째로 멀리 날아가서 깨져 버렸고, 이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손을 걷어찬 이를 살폈다.

16567328428665.jpg“……!!”

달빛을 받아서 섬뜩하도록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그것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는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16567328428665.jpg‘에이드리언!? 이 개자식이 왜 하필 지금……!’

당장 도망쳐야 목숨을 부지할 상황이나,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도망칠 순 없었다. 그땐 마탑에 있었기 때문에 제 실험실에 있던 육신을 하나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근처엔 빈 육신도 없을뿐더러 지금 사용 중인 육신의 손상도 심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싸우는 것뿐. 억지 미소를 짓기 위해 이시스의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16567328428665.jpg“여…기서 이렇게 뵙는군요. 닐스 황제 폐하를 뵈러 오신 거지요?”

그는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은밀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기회는 단 한 번. 에드가 방심한 순간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그의 목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16567328428665.jpg“안 그래도 제가 그분의 상태에 관해 드릴 말씀이…… 아악!!”

마력을 제대로 끌어모으기도 전이었다.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우는 듯한 전격이 이시스의 전신을 관통했다. 무심한 얼굴로 마법을 쓴 에드가 이시스의 시도를 비웃듯 헛웃음을 흘렸다.

16567328542891.jpg“바퀴벌레처럼 이리저리 잘도 피해 다니더군. 덕분에 신문지 돌돌 말아쥐고서 얼마나 오랫동안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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