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때로는 단단하게2022.02.08.
또 한 번, 아까와 같은 전격이 이시스를 덮쳤다. 두 번 연속으로 이어진 공격에 이젠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의식마저 흐릿해진 가운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청각뿐. 이시스는 무력하게 꿇어앉은 그대로 에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놈 찾느라 신혼도 제대로 못 즐기고―”
말이 이어지던 도중 또다시 같은 공격이 내리꽂혔고,
“안 그래도 거슬리던 닐스도 해괴한 꼴로 변하고―”
또다시 꽂혔으며,
“부인도 침울해하잖아.”
마지막으로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강력한 전류가 몸을 불태웠다. 그가 릴리아 모녀에게 저지른 업보를 한 번에 돌려받듯 끔찍한 고통이 그의 영혼마저 불사르고 있었다. 이미 형태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까맣게 불타 버린 채로 이시스가 신음했다.
“아…… 아아…….”
“여기서 깔끔하게 죽어라.”
이미 제 기능을 잃은 눈동자에 에드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는 마력을 한데 모아서 검 형태로 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시스는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게 직감했다.
‘끝이구나.’
예전과 같은 행운은 이제 없다. 고통으로 점철된 그의 긴 삶은 이곳, 이 순간에서 끝을 맺을 것이었다. 너무도 확실하게 예견된 죽음을 마주하고 있어서일까? 살고자 하는 욕구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새카맣게 탄 혀를 사력을 다해 움직였다.
“나한테…… 헉, 헉…… 이런 짓을 한다고 뭐가…… 헉, 바뀔 줄 아는 거냐……? 이미… 이미 늦었다……. 네놈의 힘 없이도 나는 내 할 일을 끝마쳤어……. 조금 있으면 네놈들 전부―”
그때, 근처에서 레냐의 외침이 들려왔다.
“전하!!”
“……?!”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외침이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사고가 발생한 듯했다. 그에 에드는 레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짧은 순간 이시스는 기대했다.
‘지금이다! 저 여자한테 정신 팔린 틈에 도망치면 살 수 있―’
이시스가 한 가닥의 희망을 움켜쥔 그때, 에드의 검이 그의 목을 잘라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가 기대했던 반전은 끝내 없었다.
“부인? 무슨 일이에요?”
이시스를 정리한 에드가 이윽고 레냐에게로 달려왔다. 레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걸 보세요.”
“이건……?”
아까 에드가 이시스를 상대하고 있을 무렵, 함께 온 레냐는 조용히 닐스를 살폈었다. 원래는 유서 같은 편지를 두고 간 아힌이 걱정돼서 막고자 달려온 것이지만, 이미 막기엔 늦은 듯 보이는 상황…… 별수 없이 그녀는 그가 제거하고자 했던 림피크라도 제대로 제거됐는지 확인하려 했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멀쩡했다. 또한, 가지의 위쪽 허공에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작고 새카만 구멍이 어느샌가 생겨나 있었다.
“통로…….”
레냐가 가리킨 그 구멍의 정체를 파악하고서 에드가 그리 중얼거렸다. 아직 작긴 해도 그곳에선 벌써부터 불길한 마계의 기운이 넘칠 만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현상을 일으킨 원흉인 림피크 나무가 마계의 기운을 더욱 누리고자 탐욕스레 가지를 꿈틀대는 걸 보던 중, 레냐가 말했다.
“일단 사람들 오기 전에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이걸 없애지 않으면…….”
떠나길 주저하는 에드의 앞에서 레냐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어차피 못 없애요. 이건 시공간이 ‘찢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괜히 어설프게 손을 쓰면 구멍이 더 넓어질 뿐이라고 했어요.”
“……? 누가 그런 조언을 줬죠?”
“아힌이요. 아힌의 유서에 이 통로를 없애는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방법에 따르려면 일단 여길 떠나야 해요.”
마침 아힌의 마법에 걸려서 멀리 떠났던 병사들이 제정신을 차리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서 있다간 황성을 폭파한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드는 순간 이동 마법을 준비하면서도 레냐에게 의심스레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거,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 맞아요?”
“……확실한 방법 같아요.”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그는 일단 레냐와 함께 황자궁으로 이동했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냐는 제 물음에 어째서 레냐가 머뭇거렸는지……. 그리고 어째서 ‘안전’이란 말을 빼고 단지 ‘확실한’ 방법이라고만 답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의 일이었다. * * * 우리가 황자궁으로 돌아왔을 땐 타라와 루카스 또한 궁에 와 있었다. 알콩달콩한 시간을 즐기고 싶을 그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나는 굳은 낯빛으로 아까의 일들을 설명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굳어졌고, 그쯤에서 나는 부탁했다.
“루카스, 지금 이 상황을 교황 성하께 최대한 빠르게 전달 부탁드려요. ‘문을 닫아야 한다’고만 전달해도 성하께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 알고 계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원작에서 지금처럼 통로가 열렸을 때 예르타의 지원군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통로를 막고자 기꺼이 제국을 도울 것이었다.
“그리고 타라, 제게 고용되기 전에 몸담고 있던 용병단에 가서 최대한 사람을 모아 주세요. 그중에서도 꼭 데려와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이따가 간략하게 목록을 만들어 드릴게요.”
“맡겨 주세요, 고용주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마족들을 상대로 특출나게 활약했던 용병들의 이름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타라가 그들을 데려와 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타라와 루카스, 둘 다 나름대로 나를 신뢰하고 있어서인지 별다른 설득 없이도 금방 떠날 준비를 하고자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에드를 응시하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저한테 시키실 일은?”
“전하께선 차기 황제로서 귀족들을 집결시켜 주세요. 황성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라 곧 있으면 제국 전체가 허둥대기 시작하겠죠. 체제가 흐트러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차기 황제라……. 그렇게 되겠군요, 확실히.”
황제와 황후가 모두 죽었고, 닐스마저 지금은 황제로서의 구실을 못 하게 된 상황. 계승 서열에 따라 제2 황자인 에드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이처럼 혼란한 틈을 타서 권력을 전복시키려는 자들은 분명 있을 터였다. 그전에 그들을 모아 두고 다음 대의 황제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보인 뒤, 제대로 이끌어야 했다.
“그래서 집결시킨 다음엔? 그 뒤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뒀어요?”
에드의 그 물음에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했다. 곧 내 모든 계획을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할, 짤막한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정신 차리게 만들어 줘야죠.”
* * * 2황자의 서신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된 제국의 주요 귀족들이 임시 회담처로 날아오기까지는 대략 이틀이 걸렸다. 그토록 빠르게 달려온 건 황성에 생겨난 그 통로를 막을 방안을 모의하기 위해서……인 듯 보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목적일 뿐이었다. 그들의 속엔 별개의 은밀한 야욕이 싹트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황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그 마지막 후손인 2황자 에이드리언은 사생아로서 입지가 불안정한 상황. 그들은 이 혼란을 판을 뒤집을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죄다 씨를 말려야 한다고!”
가장 먼저 야욕을 드러낸 이는 남부에서 온 ‘베론’ 후작이었다. 황제가 살아 있었을 적엔 그의 충실한 신하였던 자. 그러나 그랬던 그도 지금은 죽은 주인의 빈자리를 탐욕스레 넘보는 승냥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귀족들이 모인 앞에서 보란 듯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법이란 본래 이토록 위험한 힘이었소. 마족과 계약한 마법사가 단신으로 국가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사례도 있고 말이오.”
두려움에 젖은 몇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선황께서는 그 위험한 힘을 회피하듯 외면하시고 단순히 흑마법만을 제재하는 선에서 그치셨지만…… 나는 그것으론 부족하다는 걸 오래전부터 예견했소.”
거기까지 말하자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욱 고조되었다. 잠깐 말을 멈춘 사이 그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2황자가 오기 전에 기세를 잡아 놓아야 해. 어차피 그 새파랗게 어린놈은 제 처갓집을 제외하면 뒷배가 없는 처지…… 선점만 잘 해 두면 상대하기 어렵지 않아. 게다가 그 처갓집인 몬트 가문의 새 가주도 조금 늦는 중이고.’
왜 늦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기회는 지금뿐. 후작은 곧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그때 내가 말한 대로 제국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다가 마법사란 족속들을 싸그리 불살라야 했던 거요! 흑마법사고, 그냥 마법사고 간에 무엇 하러 구분한단 말이오! 그냥 끝까지 추적하고 찾아내서 죄 쓸어버렸으면 분명 이번 같은 재앙은 없었……!!”
“잠깐. 공께서 정말로 이런 상황을 예견하셨소?”
그리 말한 것은 제국의 서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휘튼’ 백작이었다. 그는 눈을 삐딱하게 뜨고는 후작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하면, 왜 폐하께서 계실 때엔 목소리 높여 의견을 내지 않은 것이오? 공께서 마법에 관해 그리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본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아서 묻는 것이요.”
“……!!”
서부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이라지만 백작에 불과한 자였다. 저보다 낮은 위세를 지닌 자의 지적에 베론 후작의 낯이 분노로 터질 듯 붉어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분명 말한 바가 있소! 공께선 이자 놀음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니 몰랐겠지!”
“이자 놀음……? 설마하니 우리 가문의 빈민 구제 활동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거요?”
“허, 구제 활동이라니. 눈 튀어나올 고금리 대출로 돈 없는 변방 영주들 뼛속까지 긁어먹는 걸 그렇게 포장하는 뻔뻔함이 놀랍구려.”
“……지금 그 말, 당장 취소하는 게 좋을 거요. 나를 모욕하는 거면 몰라도 우리 휘튼가를 향한 모욕은 참지 않겠소.”
“지금 보니 본인이 욕먹은 걸 가문이 욕먹은 거로 포장하는 실력까지 일품이구먼……? 가문 이름 팔아먹으면서 고귀한 척하면 면이 좀 서시오?”
문제 해결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어느덧 서로를 향한 비난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통로에 관한 것은 이미 다들 잊은 지 오래였다. 권력의 단맛을 아는 중년들의 그 치열한 싸움터에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마법사들을 싸그리 불사른 다음은요?”
정신없이 서로를 비난 중이던 귀족들이 한순간 말을 멈추고는 방금 도착한 레냐를 응시했다. 2황자비이자, 몬트 공작의 외동딸……. 그 외에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2황자는 안 보이는군. 혼자 온 건가?’
한순간 긴장했던 중년들은 2황자가 없다는 걸 알고 다시 서로를 물어뜯을 준비를 했다. 남편이나 아비도 없이 혼자 온 황자비는 애초에 그 싸움터에 낄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논외의 존재로 여겨졌기에. 그러나 레냐는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그들을 멈춰 세웠다.
“대답해 보세요. 아까 복도까지 울릴 만큼 목소리 높이셨잖아요, 마법사란 족속들은 다 불태워 버렸어야 했다고……. 그래서 태우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해야 통로를 닫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