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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당신 누구야? (94/102)

94. 당신 누구야?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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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냐가 사라졌다. 그것도 눈앞에서. 방금까지 화살을 쏘아 대며 그녀를 통로로 엄호한 장본인인 타라는 가만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레냐를 대피시키라는 니콜라스의 명을 어긴 걸로도 모자라 레냐가 통로에 들어설 수 있게끔 본인이 직접 돕기까지 한 처지니, 무슨 형벌을 받든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장 타라를 체포하려 드는 이는 없었다. 방금 발생한 사고에 다들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으니까. 게다가― ―쩌저적, 쩌적. 또 다른 재앙이 시작되려는 듯, 림피크 나무가 불길한 소릴 내며 움찔거렸다.

16567329307438.jpg“모두 침착해라!! 허둥대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각 기사단장들의 외침을 듣고 병사들은 무기를 고쳐 잡았다. 긴장감으로 병사들의 목구멍이 바짝바짝 마르는 상황. 그래서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정작 나무 위쪽에 열린 통로에서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16567329307444.jpg“잠깐, 통로를 보십시오.”

통로의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루카스였다. 루카스의 말을 듣고 니콜라스 또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채 통로를 살폈다. 며칠간 계속 확장되기만 했던 통로가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16567329307448.jpg‘설마……!’

레냐가 말하길, 자신은 통로를 닫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했다. 어쩌면 통로 반대편으로 건너간 그녀가 뭔가 손을 쓴 것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친 순간 니콜라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16567329307438.jpg“……각하!!”

그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흑표범에 올라탄 채 통로로 내달렸다. 만약 마계로 건너간 레냐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혼자 통로를 닫고 있는 거라면, 당장 그녀를 데려와야 했다. 그녀가 건너편에 있는 상태로 문이 닫힐 경우엔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16567329307448.jpg‘그 애를 또 이렇게 무책임하게 혼자 둘 수는……!’

흑표범도 제 주인의 절박함을 알아챈 듯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통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제 입구를 좁히고 있었다. 커다랬던 통로가 이젠 사람 하나도 드나들기 버거울 정도로 줄어들었을 즘, 마침내 근처까지 온 니콜라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16567329307448.jpg“……안 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니콜라스를 약 올리듯 그의 바로 코앞에서 제 입을 완전히 다물어 버렸다. * * * 뭐였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고자 했으나, 살펴보면 볼수록 주위가 낯설기만 했다.

1656732930747.jpg‘……여기가 마계라고? 뭔가 이상한데.’

일단, 내가 아주 비장한 각오를 품고서 통로에 뛰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아예 마계 쪽으로 넘어가서 나무를 불태우려 했었다. 그곳에 있을 에드를 찾아야 했고, 동시에 통로를 막아 사람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었다.

1656732930747.jpg‘통로에서 새카만 그림자 같은 게 나와서 날 끌어당겼었어. 에드가 당한 그건가?’

뭔진 몰라도 그 까만 그림자가 나를 감싸 안을 때 아주 아늑한 기분이 들었던 건 기억이 났다. 그 뒤엔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떠 보니 다짜고짜 낯선 천장이 보인 것이다.

1656732930747.jpg‘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상황이네.’

물론, 내가 눈뜨자마자 보게 된 건 단순히 낯선 천장이라고만 표현하기 부족하긴 했다. 화려한 천장화가 빼곡하게 그려진, 아주 호사스러운 낯선 천장이었으니까. 대체 뭘까?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침실 문이 열렸다.

16567329307438.jpg“깼구나, 레냐.”

1656732930747.jpg“……!!”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더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다시피 벗어나선 당장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1656732930747.jpg“전하!! 대체 어떻게 되셨던 거예요?! 갑자기 통로로 끌려가셨다고 들어서 제가 얼마나―!”

16567329307438.jpg“괜찮으니까 진정해. 난 여기 있으니까.”

들어오자마자 제게로 달려온 나를 에드가 끌어안고서 토닥였다. 그러곤 기절해 있느라 다소 휘청대는 내 몸을 훌쩍 들어 올려, 침대로 옮겨갔다. 그사이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당장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656732930747.jpg“그런데 여긴 어디죠? 삐약이는 어딨나요?”

16567329307438.jpg“마탑. 네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갔어.”

1656732930747.jpg“……? 마탑이요? 그럼 저흰 마계에서 다시 돌아온 건가요? 전하께서 저를 구해 주신 거죠? 그런데 설마 통로는…… 여전히 열려 있는 건가요?”

그가 나를 부드럽게 침대에 내려놓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67329307438.jpg“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잘 막았으니까.”

1656732930747.jpg“……하지만 어떻게요? 아힌이 말하길 저랑 삐약이가 직접 나서서 검은색 불꽃으로 불태워야만…….”

16567329307438.jpg“검은색 불꽃? 혹시 이거 말하는 거야?”

그의 손 위로 타오르는 선명한 검은색 불길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불길 때문인지 오늘따라 에드의 얼굴에 서린 그림자가 짙어 보였다.

16567329307438.jpg“내가 기절한 너를 데리고 통로에서 나온 다음 이걸로 직접 나무를 불태웠거든.”

1656732930747.jpg“…….”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이 점점 더 몸집을 불려 갔다.

1656732930747.jpg‘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하지만 아힌은 검은색 불꽃을 구현하려면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고 했는데……?’

삐약이를 붉은색 소울스톤으로 급성장시켜야만 낼 수 있는, 순수한 불꽃이라고 했다. 그 위력이 너무도 대단해서 나무를 불태운 다음엔 내 생명력까지 고갈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런 불꽃을 지금 에드는 장난이라도 치듯이 내 눈앞에서 피워 올리고 있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밀려드는 기묘한 감각. 나는 긴장감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1656732930747.jpg“……그런데 왜 황자궁이 아니라 마탑으로 오신 걸까요? 여기로 와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16567329307438.jpg“그야―”

그는 제 미소만큼이나 여유롭게 말꼬리를 늘리다가, 대답했다.

16567329307438.jpg“마탑은 우리 추억이 많이 담긴 곳이잖아.”

1656732930747.jpg“…….”

16567329307438.jpg“여기서 즐거운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고……. 그래서 여기로 왔어. 마침 레냐 네가 좋아하는 색으로 꾸며 놨었거든.”

마탑에 추억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추억이 담긴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주위를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꾸몄다는 말도 조금 신경 쓰였다. 왜냐면 이 주위는 온통 검은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부드럽고 화사한 분홍색이나 하얀색이건만…….

1656732930747.jpg‘에드 맞나? 너무 이상한데……?’

갑자기 마탑으로 오질 않나, 내가 좋아하는 색을 멋대로 착각하고 있질 않나.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1656732930747.jpg“계속 신경 쓰여서 여쭙는데요…… 왜 저를 자꾸 ‘레냐’라고 부르세요?”

그가 왜인지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존댓말도 갑자기 생략됐고 말이다. 어쩌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계에 끌려왔을 때 어느 위험한 마족의 사악한 저주에 걸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16567329307438.jpg“…….”

에드인지 뭔지 모를 존재가 침묵하는 사이 나는 조용히 팔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 소맷자락에 항상 지니고 다녔던 다트를 손에 잡았다. 여차하면 이거라도 호신용 칼처럼 휘두를 생각이었다.

16567329307438.jpg“레냐…….”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 평소 내가 알던 에드의 목소리였다.

16567329307438.jpg“간혹 있잖아. 빛바랜 과거가 현재보다도 더 반짝여 보일 때가.”

1656732930747.jpg“…….”

16567329307438.jpg“그래서 이름으로 불러 봤어. 과거에 널 그렇게 부르던 때를 회상해 보고 싶었거든.”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굳어 있던 내게 손을 뻗어서 부드럽게 뺨과 귓가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내 눈물을 닦아 내고, 내 뺨을 어루만지고, 밤엔 내 살결을 스쳤던 바로 그 손길이었다.

1656732930747.jpg‘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 생각도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16567329307438.jpg“그보다, 배고프지 않아?”

1656732930747.jpg“…….”

16567329307438.jpg“같이 식사하러 가자.”

나를 익숙하게 쓰다듬던 그 손이 이번엔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그의 손을 붙들고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 * * 식사하러 가자기에 황자궁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나를 이번에도 마탑의 어딘가의 장소로 데려갔다. 몇 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마법을 쓰는 사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이미 식사가 차려진 장소에 와 있었으니까.

16567329307438.jpg“여기 앉아.”

1656732930747.jpg“네…….”

이렇게 식사가 준비돼 있는데 황자궁에 가서 먹자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자리에 앉아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종들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였다.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1656732930747.jpg“그런데 왜 식기류가 제 것뿐이에요?”

16567329307438.jpg“난 배가 안 고파서.”

1656732930747.jpg“네? 하지만 음식이 이렇게 많은데…….”

16567329307438.jpg“괜찮아. 오늘은 먹기보다는 먹여 주고 싶으니까.”

그는 이번에도 의미를 알기 어려운 말을 하면서 내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직접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힘이 없었던 차라, 그가 썰어 주는 게 싫진 않았다. 단지, 아까부터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한 듯해서 조금 꺼려질 뿐. 그는 뭔가 깨달은 듯 먼저 음식을 한 입 먹었다. 그것이 안전하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듯한 태도였다.

1656732930747.jpg‘내가 오래 기절해 있었나? 되게 배고프네.’

빨리 음식을 넣으라는 뱃속의 항의를 외면 못 한 나는 결국 그가 내미는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동안 그의 시선이 내 오물거리는 입술에 닿아 왔다. 신기한 듯, 그리고 그리운 듯이 오랫동안. 적당히 배를 채운 뒤 나는 후식으로 준비된 케이크를 응시했다.

1656732930747.jpg“…….”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나서, 넌지시 그에게 말했다.

1656732930747.jpg“이거 보니까 생각나네요. 제가 처음으로 전하께 디저트를 만들어 드렸던 때요.”

16567329307438.jpg“흠?”

1656732930747.jpg“케이크를 처음 만들어 봐서 조금 이상해졌는데, 그래도 전하께선 맛있게 드셔 주셨잖아요. 기억나세요?”

그는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침묵했다가,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

16567329307438.jpg“아, 나도 생각나, 그 케이크.”

1656732930747.jpg“…….”

16567329307438.jpg“모양이 이상했긴 했어도 나름 맛있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흐릿한 의심에 불과하던 생각이 마침내 확신으로 변한 까닭이었다. 일어나면서 쥔 스테이크 나이프에서 그나마 날카로운 부분을 그의 목에 들이대자, 그가 고요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16567329307438.jpg“레냐.”

나를 보는 눈빛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분명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그것이었다. 그 남자와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나마저 얼핏 속일 수 있을 만큼 똑같이 흉내 낸 모습이었다. 아마 영영 속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자가 에드와 나의 추억까지도 똑같이 베껴 냈다면. 하지만―

1656732930747.jpg“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냈어야지.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준 디저트는 케이크가 아니었어.”

에드가 나와 혼인하기 위해 마족을 토벌하러 갔던 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디저트를 만들어 줬었다.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내가 살던 세계의 디저트를.

1656732930747.jpg“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준 건 도넛이었지. 당신이 진짜 에드라면 그걸 잊었을 리가 없어.”

처음 도넛을 먹어 보고 에드가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러니 진짜 에드라면 내가 그에게 준 첫 디저트가 도넛이란 걸 잊었을 리 없었다, 절대로. 나는 나이프를 그의 목에 닿을 만큼 가까이 들이댔다.

1656732930747.jpg“당신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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