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두 명의 남편2022.02.25.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무언가……. 그 무언가가 나를 말 한마디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단지 보고 있는 것뿐이건만, 손끝이 잘게 떨려 왔다. 삐약이조차 어째선지 소환이 안 되는 상황. 나는 내 유일한 무기인 나이프만을 생명줄처럼 꽉 움켜쥐었다. 그런 나에 비해 그는 퍽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더니, 나이프 끝을 장난치듯 ‘톡’ 두드렸다.
“처음으로 준 디저트를 기억 못 한 게 칼까지 들이댈 일인가? 사랑싸움치곤 좀 과하잖아.”
“……흔해 빠진 디저트가 아니었으니까. 그때 에드가 그걸 얼마나 신기하게 여겼는데, 그걸 잊는다고?”
“그래 봤자 옛날 기억은 얼마든 헷갈릴 수 있―”
그가 말을 잇던 도중이었다. 그의 팔에서 한순간 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 정전기?’
처음엔 그냥 조금 요란하게 튄 정전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반짝임을 시작으로, 그의 팔 전체가 곧이어 마력이 깃든 스파크에 휘감기게 되었다.
“……!!”
놀란 나는 그를 위협하고 있던 것도 잊고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혼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내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스파크에 휩싸여 있던 그의 팔에서 갑자기 기묘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기묘하게 움직이던 그 팔이 제 본체의 목을 꽉 움켜쥐었을 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꼭 팔에 별개의 자아라도 깃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쪽 팔로써 제 목을 조르던 팔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그러곤 빙결 마법을 사용하여 그 팔 전체를 얼려 버렸다.
“……뭐지? 방금 당신 팔이…….”
좀전의 상황은 당황스러운 걸 넘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유령이라도 씐 건가 싶어 긴장한 내게 그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야. 아까 통로 근처에서 마족 한 마리를 잡았거든. 제법 쓸 만해 보이길래 흡수했는데―”
“흡…수……?”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역시 내 눈앞의 이건 에드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던 중, 그가 더욱 신경 쓰이는 말을 뱉었다.
“안에서 좀 말썽을 부리네. 흡수된 이상 결국 해체돼서 사라지겠지만.”
단지 마족 하나를 해치웠노라고 말한 것뿐인데, 끔찍하리만치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왜였을까. 나는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어떤 마족이었―”
“그보다 지금 좀 쉬고 싶은데, 이야기는 다음에 나눌까?”
“…….”
“넌 이만 침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부드러운 말투로써 권했다고는 해도 거의 강제적인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의 마법으로 인해 침실로 이동해 온 뒤였다. * * *
‘반항이 심하군. 다른 녀석들과 달라.’
레냐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에드가 제 얼어붙은 팔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별개의 자아가 깃든 팔은 얼음을 녹이려는 듯, 지금도 계속 화염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지만 이래서야 쓸데없는 소모전이 될 터였다. 그는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이 직접 내면에 가둬 놓은 자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을 차단해야만 했다. 이윽고 온 사위가 새카만 벽으로 둘러싸인 듯한 그곳, 그의 영혼이 있는 깊은 곳에 그는 도달했다. 그곳의 유일한 죄수는 역시나 사방으로 화염 마법을 쏘아 대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의 팔을 멋대로 조종하고 있는 자였다.
“에이드리언.”
부름을 들은 에드가 펼치고 있던 화염 마법을 잠시 접곤, 저를 부른 에드를 돌아보았다.
같은 생김새,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에이드리언이 서로를 응시했다. 에이드리언을 부른 에드…… 즉, ‘원본’은 제 안에 갇힌 ‘복제’를 향해 싸늘한 멸시의 시선을 내비쳤다.
“무의미한 발악 관둬라. 내가 원본이고 네가 복제품인 이상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그의 복제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원본을 잠깐 신기하다는 듯 살폈다. 그러곤 황당한 마음을 담은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하.”
“복제품은 아무리 애써도 원본을 넘어설 수 없지.”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복제된 에드 또한 알았다. 원래라면 마계로 통했어야 할 통로…… 즉, 시공간이 찢어진 틈새로 원본이 갑작스레 난입하여 자신을 납치하고, 집어삼켜 준 덕분이었다. 과연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원본의 영혼에 통째로 흡수되어 의식 밑바닥으로 가라앉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원본의 기억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복제품이라기보단, 구닥다리였던 원본의 결함이 보완돼서 출시된 개선품에 가깝지 않은가 싶은데.”
“…….”
“적어도 레냐한테 막 대하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미련한 짓은 안 했으니까.”
원본은 레냐를 잃었다. 그 뒤 제 행동을 후회하여 그믐달 태엽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그러나 태엽은 정작 시간을 되돌리기를 바랐던 이를 버려둔 채, 나머지 이들만이 과거로 되돌아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거기까지 엿보았을 때, 에드는 인정했다. 자신이 살던 세계는 저 원본이 태엽을 돌리는 바람에 생겨난 복제…… 즉, 한 번 멸망한 세계의 리부트 버전이며, 자신 또한 그의 복제라는 것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혼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원본이 살지 못한 삶을 살았고, 이미 원본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원본의 의식 밑바닥에 그대로 가라앉을 뻔했던 그가 간신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아를 오롯이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사실을 위안 삼아 버틴 덕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너무 오래 묵었어. 적어도 천 년…… 아니, 수천 년은 됐나?’
저 원본에게서 가늠하기도 어려운 긴 세월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멈춘 이 세계에 갇혀 아득한 세월을 고여 있었던 듯, 그에게선 무한한 마력이 느껴졌다. 대체 그간 얼마나 독하게 힘을 갈고닦았을까. 그리고…… 몇 명이나 되는 복제품들을 흡수해서 그들의 힘을 제 것으로 만들었을까. 여하간 그의 마력은 고작 반오십 년도 살지 못한 자신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이 탈출에 상당한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였다.
‘시간을 끌어야 해.’
원본의 기억을 통해서 레냐가 이쪽 세계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상황. 그는 우선 레냐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원본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어도 못 가졌던 걸 나는 이미 가졌어. 평화로운 삶, 그리고 ‘살아 있는’ 레냐 말이야.”
“…….”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실은 내가 몇 번의 시도 끝에 완성된 성공작이고, 너는 실패작으로서 이 쓰레기통 같은 세계에 버려진 거라고.”
“내 말이 더 그럴듯하지?”
마지막으로 던진 그 도발이 신호탄이 되었다. 둑이 터지듯, 원본의 전신에서 불길한 마력이 공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이 수상한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쁘던 차에 갑자기 잠이 올 줄이야. 어쩌면 아까 먹은 식사에 수면제 같은 거라도 들었던 걸까? 그랬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잠기운으로 흐려진 머릿속에서도 설핏설핏 떠올랐다. 그렇게 원치 않는 수마에 삼켜졌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웬 환한 빛줄기가 눈꺼풀을 찔러 왔을 때였다.
‘눈부셔…….’
뒤척거리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부인, 지금 한가롭게 낮잠 잘 때가 아니에요.
“……!!”
에드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어디예요? 어디 계세요?!”
―손목을 보세요.
그의 말에 따라 살펴본 손목에는 처음 보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아까 눈가에 어른거렸던 새하얀 빛도 지금 보니 이 마법진에서 발해진 것이었다.
“……이게 뭐죠?”
―제가 예전에 걸어 둔 통신 마법이에요. 만약에 부인이 납치를 당하거나, 길을 잃거나, 그럴 때 쓰려고 했죠. 다행히 제대로 작동하네요.
“통신 마법? 그럼 지금 멀리에 계신 건가요?”
―네, 아주 멀리 있어요.
“멀리…….”
―미안해요, 당장 못 가 줘서.
꼭 곁에서 속삭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그걸 들은 순간 나는 확신했다.
‘확신할 수 있어. 이번엔 진짜 에드야.’
아까의 그 수상한 에드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럼 언제 오실 수 있어요? 사실 저 아까부터 되게 이상한 일들을 겪고 있거든요. 왜인지 삐약이도 소환되지 않고요.”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지금처럼 연락하는 것도 조금 힘들 수 있어요.
연결이 불안정한 듯 그의 음성에 잡음이 섞여 들렸다. 지지직대며 떨리는 게, 왜인지 슬픔을 머금고 건네는 작별 인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걱정… 마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려… 줄 테니까. 분명 잘… 수 있을 거예요.
“잠깐만요, 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자꾸 끊겨서 들리는데, 괜찮은 거 맞죠?”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에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단 한 음절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듣는 것…….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 * * 과거와 현재의 싸움은 쉽게 판가름 나지 않았다. 금방 현재를 흡수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과거 에드의 예상과 달리, 고작 반오십 년도 살지 못한 현재의 에드는 신기할 만큼 잘 버티고 있었다. 길어지는 싸움에 피로해진 과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더 해 봤자 의미 없는 소모전―”
예고 없이 쏟아진 마법이 그의 말을 또다시 어중간하게 끊어냈다. 물론 피하는 건 이번에도 어렵지 않았다. 둘 모두 같은 ‘에이드리언’이기에, 현재의 공격 패턴은 과거에게도 익숙했다. 단지 이토록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 짜증스러울 뿐.
‘의미 없고 불필요한 소모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과거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약 올리듯 치고 빠지는 짓만 반복하고 있어. 왜 전력을 다하지 않지?’
현재는 과거를 쓰러트릴 생각이 없는 듯 굴고 있었다.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나, 죄다 생각을 방해하기만 하는 수준의 얕은 공격이었다. 마치 다른 목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
이상함을 느낀 과거가 마력을 눈에 집중했다. 힘이 깃든 눈동자는 그에게 원래라면 볼 수 없었을 먼 곳, 레냐의 침실 광경까지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곳엔―
‘없어……?’
있어야 할 레냐가 없었다. 마력을 더욱 끌어올려서 마탑 전체를 샅샅이 훑고 나서야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접근해선 안 될 곳으로 한 치의 헤맴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그 당당한 발걸음……. 그제야 그는 현재의 에드가 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며 버티고 있는지 눈치채고 물었다.
“뭘 한 거냐, 지금.”
“봤으면서 뭘 또 물어.”
현재의 에드는 과거의 에드가 지을 수 없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도발하듯 지어 보였다.
“집 가는 길 알려 줬지.”
“…….”
현재와 과거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그들은 기억 일부를 공유했다. 과거가 감추고 있던 이 세계의 유일한 출구에 관한 정보 또한, 현재에게 공유되었다. 당연하게도 현재는 그 정보를 다시 고스란히 레냐에게 전달해 준 상황.
‘시간 끌기였군.’
얕은 술수에 말려들었는데도 되레 웃음이 나왔다. 긴 세월 느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쭉 느낄 일 없으리라 여겼던, 모멸감이라는 감정이 그를 전율시킨 까닭이었다. * * *
“……?”
에드가 지시한 곳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나는 걸음을 문득 멈췄다. 과거에 에드가 감정적으로 격해졌을 때와 비슷한, 그러나 그 농도는 훨씬 더 짙은 기운이 방금 느껴졌었다.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대체 아까 본 에드는 뭐였는지, 그리고 지금 에드는 어디에 있는 건지. 무엇 하나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에드가 알려 준 방법대로 여기서 어서 탈출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
나는 멈췄던 두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그가 말했던 붉은색 복도를 지나, 그 끄트머리의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에 숨겨져 있던 비밀스런 통로를 지나갔다. 원래라면 제대로 찾아갈 수 없었을 복잡한 길. 하지만 가는 방법을 미리 듣고서 온 덕분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포도 넝쿨이 양각된 하얀색 문……. 여기다.’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확신한 나는 그 문을 힘껏 열었다. 에드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탈출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막상 눈에 보인 것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이, 이게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