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진짜는 네 바로 앞에 있잖아2022.03.01.
문 너머에 있던 것은 족히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기억의 구슬들이었다. 그 넓은 공간의 벽면을 전부 채우고도 모자라, 도미노처럼 죽 늘어선 선반 구석구석에까지 들어찬 구슬들……. 나는 그 안에 잠들어 있을 방대한 기억의 양에 미약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구슬 하나에 30분 길이의 기억만 집어넣는다고 쳐도 이렇게 개수가 많으니까…… 다 합치면 저장된 기억이 몇백 년 어치는 되지 않으려나?’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토록 방대한 기억을 여기에 보관해 두었는지 의문이었다.
‘원래는 이걸 보려고 온 게 아니긴 한데…….’
출구를 찾는다는 목적은 잠깐 제쳐 두고, 나는 기억의 구슬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쩌면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한 단서를 그 안에서 찾을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저는 당신 눈앞에서 몇 번이나 죽었을까요?”
구슬 속에서 보게 된 건 놀랍게도 내 모습이었다. 몹시도 지친 낯빛의 내가 단검을 나 자신의 목에 댄 채, 아주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것도 에드에게.
“…….”
“대답하기 힘들면 질문을 바꿀게요. 당신은 몇 번이나 이 일을 반복했나요?”
에드는 무엇을 반복했던 걸까? 나는 왜 곧 죽으려는 사람처럼 목에 칼을 대고 있을까? 게다가 구슬 속에 오롯이 담겨있는 이 기억이, 왜 내겐 떠오르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에드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의아함에 젖어갈 즘, 구슬 속 과거의 에드가 대답했다.
“그믐달 태엽을 되돌린 횟수를 묻는 거지? 이번에 되돌린 것까지 더하면 정확히 759회겠네.”
“…….”
“횟수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10번째든, 아니면 759번째든……, 나에게 있어서 너는 전부 ‘레냐’니까.”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복되는 삶은 도저히…….”
나는 아마 ‘도저히 버틸 수 없다. 그러니 끊어내겠다’라고 말하려던 것 같았다.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단검을 본인의 목에 더 깊숙이 눌렀으므로. 그러나 에드가 그보다 더 빠르게 손을 뻗어 칼날을 움켜쥐었고, 결국 나는 죽음으로 도망칠 기회를 박탈당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부디 이런 식으로 떠날 생각은 하지 말아줘.”
나를 달래며, 에드는 맨손으로 단검을 빼앗느라 피가 뚝뚝 흐르게 된 제 손을 내보였다. 마치 보라는 듯이. 그리고 새파랗게 질려가는 레냐를 향해 거절할 수 없을 애원을 건넸다.
“멈춘 시간 속에 혼자 남아서 계속 태엽을 돌려야 했던 내 처지를 가엾게 여겨서라도…….”
거기까지 본 나는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기억의 구슬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깨져서 바닥에 흩어진 구슬 파편을 뒤로한 채 황급히 다른 구슬들도 살폈다. 그 수많은 구슬 중 어느 것을 집든, 그 안엔 전부 ‘레냐’와의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설, 설마…….’
에드의 모습을 했으면서도 묘하게 에드 같지 않았던 그 남자― 꼭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아까부터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이곳 세계― 그리고 방금 기억의 구슬을 통해서 보게 된 레냐와 에드의 대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떤 불길한 가설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설마 그믐달 태엽을 돌렸나? 에드가……? 그것도 수백 번을……?’
아힌이 말해준 적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태엽을 돌리면 그를 제외한 시간이 전부 과거로 돌아간, 세계 A’가 생겨난다고. 그리고 태엽을 돌린 이는 가엾게도 멈춰버린 세계에 영원히 혼자 남게 된다고. 내가 세운 가설이 옳은지 확인하고자 구슬들을 다시 살펴보려던 때였다.
“남의 기억을 함부로 보면 어떡해.”
익숙한 에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긴장감으로 삐걱거리는 몸을 간신히 돌려, 어느샌가 와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 충격적인 가설이 진짜라면 저 남자는 아마도 평범한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아득한 세월을 살아왔을 터다.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입술을 더듬더듬 움직였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래.”
“혹시, 시간을 되돌렸어요?”
“…….”
이어지는 그의 침묵이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759번째 레냐가 던졌던 물음을 나 또한 그에게 던지고야 말았다.
“되돌렸다면 몇 번을 되돌렸죠? 당신은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반복했고…… 저는 지금 몇 번째 레냐인 거예요?”
“너는 항상 그걸 묻는구나. 매번 똑같이.”
마치 장난을 치듯이 그가 미소 지었다. 장난 같지 않은 섬뜩한 대답을 건네며.
“그믐달 태엽을 되돌린 횟수를 묻는 거지? 이번에 되돌린 것까지 더하면 정확히 1029회겠네.”
그의 걸음이 내 쪽으로 움직였다. 어느덧 앞까지 다가온 그는 내 잔머리를 자상하게 넘겨주며, 아마도 천 번을 넘게 반복했을 그 대답을 이번에도 똑같이 들려주었다.
“횟수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몇 번째든, 나에게 있어서 너는 전부 레냐니까.”
이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그믐달 태엽으로 1029번이나 시간을 되돌린 에드였다. 그 행위를 통해 일천 개가 넘는 복제된 세계를 만들었고, 일천 명이 넘는 레냐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나는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멈춰버린 세계에 홀로 남은 에드가 레냐를…… 아니, 레냐‘들’을 만난 순간의 기억이 구슬에 박제된 채 여전히 이곳에 가득했다. 애석하게도,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것이다.
“대체 왜…….”
“왜 그랬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귀를 의심케 할 말이 나왔다.
“한번 멸망한 세계.”
“……!”
“기억나? 네가 이쪽 세계로 오기 바로 직전에 읽었던 이야기.”
일순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한번 멸망한 세계’는 내가 레냐에게 빙의하기 전 메일로 받았던 텍스트 파일…… 즉, ‘원작’의 제목이었다.
“어떻게 그 소설을……. 소설 내의 인물인 당신이…….”
“애초에 소설이 아니었거든. 실제로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적은 거니, 따지고 보면 수필에 더 가까워.”
“무슨…….”
“이렇게 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까?”
그가 제 귀를 감싸 쥐더니 무언가 마법을 썼다. 손을 뗐을 땐 그의 귓가에 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원작에서 그가 레냐를 떠나보낸 뒤, 전투를 치르다가 화살에 맞아서 생겼던 상처와 같은 위치의 흉터였다.
“아주 먼 과거에 나는 이시스를 만났고, 그를 통해 그믐달 태엽을 알게 됐어.”
“…….”
“처음 목적은 마계로 가는 문을 연 다음 태엽을 찾아서 어머니를 되살려내는 거였지. 배신당하고 외롭게 죽어간 그분이 안타깝고,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그랬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랑하는 이를 잃었어.”
“……설마 그게 레냐였다고 하진 않겠죠. 제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레냐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네가 읽은 그 이야기에 그렇게 적혀 있던가?”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황당하다는 듯이.
“하긴, 그럴 만도 해. 그 이야기는 내가 직접 적은 게 아니고 네 친구가 적은 거라, 조금 왜곡돼 있거든.”
“친구……?”
“너와 함께 환생했던 백작 영애 말하는 거야.”
레냐의 친구인 백작 영애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타라가 적었다고요? 한번 멸망한 세계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
“보다시피 나는 뭣 모르고 태엽을 처음으로 돌렸을 때부터 쭉 여기 갇혀 있는 신세인데, 이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한정돼 있었거든. 기껏 가능한 거라고 해봐야 이렇게―”
중간에 말을 멈춘 그가 문득 마력을 움직여, 우리 사이에 화면을 띄워 올렸다. 타라와 루카스, 그리고 닉 오빠까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그들의 현재 모습이 그 화면을 통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네 삶을 멀리서…… 네 남편도, 연인도, 심지어는 친구도 아닌 존재로서 지켜보는 게 전부였어.”
아릿하게 이어지던 그의 말끄트머리에 문득 씁쓸한 감정이 배어들었다.
“한동안은 이러는 걸로 만족했지. 네가 전생과 똑같은 생을 반복한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불길한 서두에,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곤 다시 에드를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곧 이어진 것은 결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해. 미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내가 이곳에 갇혔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만 과거로 되돌아가면 다들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그 당시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행동을.”
“…….”
“복제된 나는 똑같이 복수심에 불타서 똑같이 이시스와 손을 잡았고, 똑같이 네게 솔직하지 못했으며, 너는 똑같이―”
말하기 괴롭다는 듯 일그러진 그의 눈가를 보고, 내가 대신하여 끊어진 말을 이어붙였다.
“똑같이 독약을 삼켰나요?”
“……그래. 그걸 알고 나서 나는 긴 세월 동안 여러 방법으로 마력을 모으고 성장시켰어. 이곳에서 탈출은 어렵더라도, 마력이 모이면 네게 꿈이나 계시의 형태로 내 기억을 전해 줄 순 있겠다 싶어서. 그럼 기억을 받은 너는 반복되는 비극의 굴레를 벗어날 테고, 언젠간 나도 그런 네 곁으로 갈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제가 정보를 얻은 건 꿈이나 계시의 형태가 아니었어요.”
“그게 문제였지. 너는 안타깝게도…… 너무 둔했어. 영적인 감각이.”
한숨을 흘리는 그의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어졌고, 그는 한탄을 계속했다.
“이 세계에 갇힌 내가 다른 세계에 간섭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거야. 나는 그 힘든 일을 반복하며 네 꿈이나 무의식에 접근해 정보를 주려 했지만, 너는 내 목소릴 듣지 못했어.”
“…….”
“환생하기 전에도 못 들었고, 심지어는 죽은 다음 웬 해괴한 세계에서 환생한 후에도 못 들었고……. 별수 없이 네가 그 해괴한 세계에서 환생했을 때, 너와 함께 환생한 백작 영애에게 접선하는 수밖에 없었어. 그쪽은 다행히 내 목소릴 들었거든.”
“타라에게…….”
“그래. 내가 그녀에게 우리의 괴로운 과거를 알려 주면, 그녀는 그걸 글로 적는 식으로.”
“……그리고 당신의 지시에 따라 제게 그걸 보냈다는 거군요. ‘한번 멸망한 세계’라는 제목을 붙여서.”
이제 다 알 것 같았다. 타라의 손을 빌려서 파일을 전송한 뒤, 그는 시간을 다시 되돌렸다. 다만, 이번엔 내가 읽었던 ‘책 내용에 대한 기억’만은 어떻게든 온전하게 보존해서 시간을 되돌아온 나에게 도로 전달해준 것이다.
‘그게 가능할 정도라면…….’
그렇다면 눈앞의 이 남자는 이미 인간의 선을 아득히 넘어섰는지도 몰랐다. 마침 그 인간을 넘어선 이가 내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그 소설에 내 감정이 왜곡돼 적혀 있던 거야. 철저하게 백작 영애의 관점에서 쓰인 글이니 어떨지는 뻔하지. 본인이 주인공이고, 나는 너를 이용하는 몹쓸 악역이고…….”
나는 밀려드는 충격에 미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레냐를 사랑했다고?’
믿기 힘들지만 사실일 것이다. 그가 레냐를 비극의 굴레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천 번을 넘게 시간을 되돌린 흔적이 이곳에 구슬의 형태로써 보관돼 있지 않은가.
‘그렇구나……. 원작에서 레냐가 떠난 뒤 에드가 한 일은 전부…….’
에드가 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죽어버린 레냐를 괘씸하게 여겨서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고 세상을 멸망시킨 줄 알았다. 그러나 반대였다. 그는 레냐를 사랑하여 어떻게든 되살리길 바랐고, 그걸 위해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마계로 통하는 통로를 열었다. 황실을 무너트려야 가질 수 있는 그믐달 태엽의 열쇠, 그리고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야 가질 수 있는 그믐달 태엽……. 그 두 개가 있어야만 레냐를 되살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살려내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사고였던 거다. 그래, 이젠 알겠다. 그가 레냐를 얼마나 아꼈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진짜 에드 전하께선 지금 어디에 계세요?”
“뭐?”
“제 남편 말하는 거예요.”
“…….”
“어디에 계신지 당신은 알고 있죠?”
에드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와 그의 인연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1029번째 에드였다. 의심하고, 집착하고, 두려워하다가, 그 끝에 서로 이해하게 된 이는 ‘리부트 된 세계의’ 에드였다. 눈앞의 남자가 아니라. 하지만, 내 앞의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진짜’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 설핏 광기가 비쳤다. 입가에 머금은 유려한 미소마저도 지금은 두렵게만 느껴진 까닭에, 나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벽에 닿아 있었고, 그는 내 의미 없는 몸짓을 비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 목덜미에 스칠 듯이 가까워진 그의 입술…….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속삭임이 내 심장을 터트릴 것처럼 옥죄었다.
“정신 차려, 레냐. 진짜는 네 바로 앞에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