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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칼날을 가슴과 수직이 되게끔 세우고 (97/102)

97. 칼날을 가슴과 수직이 되게끔 세우고20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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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당신이 최초의 ‘에이드리언’이었을지 몰라도, 나의 ‘에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고개 저을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이 내 턱을 붙들어 자신을 보게끔 했다.

16567329854173.jpg“내가 진짜야. 널 비극에서 구하려고 시간을 1029회 되돌린, 진짜 에이드리언.”

자신 외의 다른 존재는 에이드리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순간 그 말을 부정하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16567329854178.jpg“아니야.”

16567329854173.jpg“…….”

16567329854178.jpg“나는 당신의 레냐가 아니고, 당신도…… 당신도 내 에드가 아니야.”

16567329854173.jpg“…….”

16567329854178.jpg“당신의 레냐는 그날 마탑에서 당신의 품에 안긴 채로 죽었어. 그 사실을 이젠 받아들여야 해.”

그는 부정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쉬기도 불편할 만큼 싸늘한 침묵. 그 침묵 끝에 그는 입꼬리를 당겨서 조소했다.

16567329854173.jpg“그래, 너는 확실히 내가 사랑했던 레냐가 아니구나. 어떻게 해야 나는 레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6567329854178.jpg“이미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

16567329854173.jpg“한 번 더 되돌리면 되나?”

그의 섬뜩한 물음에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서 얼어붙었다.

16567329854178.jpg‘시간을 또 되돌려……? 잠깐,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나와 함께 온 에드는?’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했다. 두려움으로 옅게 떨려오는 내 입술을 달래듯이 부드럽게 제 엄지로 쓸어 만졌다.

16567329854173.jpg“그럼 나는 시간을 되돌아온 1030번째 레냐를 만나게 되겠지. 너는 그대로 소멸하게 될 거고.”

16567329854178.jpg“…….”

16567329854173.jpg“그 전에 마지막 선택권을 줄게.”

그가 허공에서 손을 휘젓자, 이 창고 어딘가에 놓여 있던 낡은 물건이 날아와서 그의 손에 안착했다. 도통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납작한 판. 그리고 그 위에는 톱니바퀴처럼 생긴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이어지는 에드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그 물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16567329854173.jpg“선택해 봐. 지금 당장 소멸하거나, 아니면 나를 너의 에드로 받아들이고 함께 여기서 떠나거나.”

그가 방금 가져온 그것은 그믐달 태엽, 즉 시간을 되돌리는 것으로 나를 당장 소멸시킬 수 있는 그 물건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16567329854178.jpg“함께 떠나……? 하지만 당신은 여기 갇힌 신세 아니었어?”

16567329854173.jpg“이제까진 그랬지. 그런데 해 보니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더라고.”

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그 마력 안에 퍽 익숙한 기운이…… 그러니까, 내 남편인 에드의 기운이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넘실거리는 에드의 마력을 드러내며 그가 웃었다.

16567329854173.jpg“타인의 영혼을 흡수하고 그 몸을 빼앗으면 그가 살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같거든. 특히나 지금은 힘이 넘쳐서.”

16567329854178.jpg“당신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어째서 에드가 갑자기 사라진 건지, 아까 이 남자가 ‘흡수했다던 마족’이 누굴 말하는 거였는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567329854178.jpg‘그럴 리가 없어. 에드가… 에드의 영혼이 사라졌을 리가…….’

두려운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원작의 에드가 내게로 가까워졌다. 아니, 이젠 이 존재를 에드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긴 세월 속에서 깎여나갔고, 이제 인간다운 면모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16567329854178.jpg“…….”

그 오래된 무언가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것을 나는 말없이 내버려 두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로 에드는 사라졌나?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하지만 거짓말이라기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너무도 에드의 그것과 똑같은데…….

16567329854173.jpg“레냐…….”

목덜미에 머물던 그의 입술이 내 뺨으로, 그리고 귓불로 서서히 옮겨갔다. 긴 갈증 끝에 원하는 것을 얻은 것처럼, 그는 황홀에 젖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16567329854173.jpg“이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줘. 내가 겪어온 고통을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16567329854178.jpg“…….”

16567329854173.jpg“……제발, 레냐. 제발…….”

점차 힘이 빠졌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에드가 정말로 사라졌다면…… 지금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절망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16567329854178.jpg‘이제 어떻게 해야 해? 에드, 좀 도와줘…….’

혼자 이해하고 감당하기 버거운 이 상황 속에서 힘없이 눈을 감았을 때였다.

16567329898713.jpg“부인.”

16567329854178.jpg“……!”

익숙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이 도로 번쩍 뜨였다. 갑자기 눈을 뜨고서 제 두 뺨을 붙잡자 그도 당황한 낯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영혼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기세로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16567329854178.jpg“방금 나를 ‘부인’이라고 불렀어?”

16567329854173.jpg“……?”

16567329854178.jpg“원작의 당신은 나를 항상 레냐라고 불렀잖아.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건 내 남편뿐이야.”

16567329854173.jpg“……내가 너를 그리 불렀다고?”

되묻는 걸 보니 본인도 본인이 나를 무어라 불렀는지 몰랐던 것 같았다. 즉, 무의식중에 그 호칭이 입술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무의식 속에서 나를 ‘부인’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16567329854178.jpg“전하!! 아직 거기 있죠?! 아직 사라지지 않았잖아요!!”

그는 에드를 흡수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직 그 일은 발생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무의식의 아래에 잠겨 있을 뿐, 진짜 에드의 자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고작 나를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 하나로 그렇게까지 추측하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믿고 싶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라도 에드가 아직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16567329854178.jpg“제발 대답해요! 제발!!”

16567329854173.jpg“그만해, 레냐. 그냥 실수로 잘못 불렀을 뿐이야. 그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약간 기억이 뒤섞여서 그랬을 뿐이라고.”

16567329854178.jpg“아직 거기 있잖아요!! 제발 대답해!!”

16567329854173.jpg“……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는구나. 정말로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잇던 그가 갑자기 그대로 우뚝 멈췄다. 내게 말하느라 벌어진 입술을 닫지도 않고서, 그 자세 그대로 그냥 멈춰 버린 것이다. 꼭 넋이 나가버린 것처럼……. 나를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도 지금은 나를 보지 않고 공허한 기색으로 떨리고 있었다.

16567329854178.jpg“전하……?”

내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것 같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른 즉시 마력이 폭발할 것처럼 주위로 흘러넘쳤다. 예전에 에드 혼자서 일으켰던 폭주와는 달랐다. 지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두 종류였고, 그 두 속성의 마력이 꼭 투견처럼 맹렬하게 서로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렇게 나온 마력은 단순히 마력에서 그치지 않고 곧 거센 파도, 바람, 불꽃 등으로 어지러이 구현되어 주위를 휩쓸었다.

16567329854178.jpg“……!!”

나는 내 쪽으로 쓰러지는 구슬 선반을 피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기억의 구슬 수십 개가 전부 바닥으로 추락해서 깨졌다. 과거의 에드가 집착을 놓지 못하고 남겨둔 추억들이 전부 유리 파편으로 흩어졌다.

16567329898713.jpg“부인……. 부인……!”

그 난장판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때, 익숙한 부름이 귓전에서 울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든 순간―

16567329898713.jpg“오래 나와 있을 수 없어! 서둘러야 해요!”

16567329854178.jpg“……전하, 전하가 맞아요?”

16567329898713.jpg“지금 당장 왼쪽 선반 뒤쪽으로 가보세요! 지금 녀석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알아요! 그곳에 꼭 필요한 게 있을 거예요!”

제 팔을 다른 팔로 억누르며 그가 내게 그렇게 소리쳤다. 워낙에 다급한 목소리였고, 지금 순간에도 그의 몸에서 불길한 마력이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는 상황이다. 깊이 생각할 수 없었던 나는 일단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아직 넘어지지 않은 왼쪽 선반 뒤쪽으로 가자, 그가 이어서 소리쳤다.

16567329898713.jpg“거기 붉은색 상자 있어요?”

16567329854178.jpg“앗! 찾았어요! 그쪽으로 가져갈게요!”

내가 지시대로 상자를 가져오는 중에도 에드의 입술에선 다른 자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7329854173.jpg“레냐! 그만해! 어차피 곧 소멸할 녀석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야!”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상자를 가져왔다. 그사이 다시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남편이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16567329898713.jpg“열어보세요. 이 모든 걸 끝낼 물건이 상자 안에 있어요.”

16567329854178.jpg“네! 지금 열었……는……데…….”

호기롭게 상자를 열었던 나였다. 그러나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보고 나선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할 만큼 입술이 굳어 버렸다.

16567329854178.jpg“이, 이거…….”

세상에. 이 물건이 이 순간, 여기서 튀어나오다니.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상자 안에 담겨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16567329854178.jpg‘내가 에드를 찌르는 데 썼던 단검…….’

손잡이부터 날까지 전부 백금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디자인의 단검이었기에 헷갈릴 수 없었다. 이건 거울을 통해서 내가 에드를 찌르는 미래를 봤을 때……, 그 거울 속 내가 사용했던 물건이 확실했다. 비로소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과거에 거울이 보여주었던 그 불길한 미래가, 결국 이렇게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에드가 이다음에 할 말도 알 것만 같았다.

16567329898713.jpg“저는 지금 녀석을 억누르느라 힘을 쓸 수가 없어요.”

16567329854178.jpg“…….”

16567329898713.jpg“그러니까 부인이 이걸 잡아야만 해요.”

내가 멍하니 멈춰 있자, 그가 직접 내게 검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그 칼끝을 제 심장 바로 위에 스스로 가져다 댔다. 내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자꾸만 떨어지려 하는 검을 끝까지 바로 잡아주는 그 친절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하지만 고맙다고 말할 틈은 없었다. 그의 지시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16567329898713.jpg“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붙잡으세요. 생각보다 완력이 필요한 작업이라 대충 잡으면 단검을 놓칠 수 있어요.”

16567329854178.jpg“…….”

16567329898713.jpg“그다음엔 칼날을 가슴과 수직이 되게끔 똑바로 세우고―”

그렇게 마치 악기 연주라도 가르치듯이, 그는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16567329898713.jpg“제가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지점을 조준한 상태에서 최대한 힘껏, 찔러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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