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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우린 아마 악역일 거야 (98/102)

98. 우린 아마 악역일 거야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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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앎에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친절하게 직접 칼을 쥐여줘 가며 본인을 찌르는 법을 가르치는 남편이라니. 그리고 그걸 또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던 나는…….

16589350034044.jpg“전하께서 짚어주신 지점을…… 그러니까, 심장을 찌르라고 하셨나요?”

16589350034049.jpg“실수해선 안 돼요. 한 번에 끝내야 합니다.”

16589350034044.jpg“대체 뭐죠? 제가 그런 짓을 해야 하는 이유가.”

16589350034049.jpg“……설명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16589350034044.jpg“아뇨. 그렇게 어물쩍 넘기지 마세요. 최소한 이유 정도는 말해주셔야죠, 본인을 검으로 찌르라고 시키려면 말이에요.”

말하기 곤란했던지 에드는 괜스레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원작 에드의 저항은 거세지고 있었고, 까닭에 그는 급박한 기색으로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16589350034049.jpg“녀석의 기억에서 봤어요. 그건 고대의 마법이 걸린 물건이에요. 녀석이 언젠가 긴 삶을 스스로 끊어낼 목적으로 가져다 둔, 단 하나뿐인 자살 도구……. 그걸로 녀석을 죽일 수 있어요.”

16589350034044.jpg“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둘이 융합된 상태로 그를 죽이면―”

16589350034049.jpg“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당신도 죽게 되잖아.’ 그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단언했다. 자신이 죽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없노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빈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논리정연했다.

16589350034049.jpg“녀석의 영혼은 긴 세월 속에서 닳을 만큼 닳았고, 이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마땅한 감정들마저 대부분 소실된 상태예요.”

16589350034044.jpg“…….”

16589350034049.jpg“남아 있는 건 과거에 놓쳐버린 대상을 향한 지독한 집착뿐이고요.”

16589350034044.jpg“…….”

16589350034049.jpg“부인을 향한 그 집착이 얼마나 아득하게 깊은지, 전부 들여다봐서 알아요.”

힘겨운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16589350034049.jpg“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겠죠. 지금 끝내지 않으면 녀석은 훗날 부인의 심장이 멈췄을 때, 태엽을 되돌려서 다시 살려낼 거예요. 그 뒤에 멈추면 또 살려내고, 또 멈추면 또 살려내고…….”

16589350034044.jpg“…….”

16589350034049.jpg“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태엽 인형 신세가 된다는 의미예요.”

거기에 더하여 그가 알려 주었다.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인물인 그 에드를 죽이고 나면 이곳도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며,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의 알려 준 데로 가서 차원의 틈을 열 마법 도구를 찾으면 나는…… 나만은 원래의 세계에 갈 수 있을 거라고.

16589350034049.jpg“서둘……러요, 어서…… 더 버틸 수가…….”

재촉하는 중에도 그의 자아가 흐려지는 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그를 뒤덮고 있는 원작 에드의 마력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다. 정말로 나는 거울이 보여준 운명에 따라야만 하나? 그저 무력하게 순응하여 에드의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어야만 하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그 물음에 대답하듯, 아힌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16589350040878.jpg“미래라는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네가 이미 그 미래를 봤으니, 이제 그걸 피하고자 노력하기만 하면 돼.”

  그가 분명히 말했었다. 미래는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 바뀔 수 있노라고. 그 자그마한 희망을 움켜쥐고서 나는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그때―

16589350040878.jpg“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잖아.”

에드가 억누르고 있었던 최초의 그자가 결국 다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끝내 제 심장을 찌르지 못한 나를 보면서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그거 보라는 듯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아마 긴 세월을 살다 보니 잠깐 잊은 모양이다. 그가 아는 ‘레냐’는 에드에게는 손끝 하나 못 대더라도, 제 목숨은 쉽게도 내던지곤 했다는 걸.

16589350040878.jpg“그러니까 애초에 내게 얌전히 따랐으면……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쥐고 있던 단검을 내 목덜미에 스스로 가져다 대자, 그의 시선에 비로소 당혹감이 서렸다. 나는 원작의 레냐가 그랬듯 여상스레 대꾸했다.

16589350034044.jpg“당신의 레냐가 당신한테 떼쓸 때 썼던 방법을 나도 써보려고.”

16589350040878.jpg“……자결하겠다고?”

16589350034044.jpg“응.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서.”

16589350040878.jpg“…….”

16589350034044.jpg“이 굴레는 여기서 끊어져야 해. 이제 그만하고 전부 원래대로 되돌려 줘.”

그의 동공이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당장에라도 내 칼을 빼앗으려는 것처럼 손을 움찔거렸으나,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내부에 아직 남아 있을 에드의 자아가 그의 모든 행동을 봉하고 있는 듯했다. 몇 번 움직이려 시도하던 최초의 그자는 이내 포기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16589350040878.jpg“네가 죽으면 시간을 또 되돌리면 그만이야.”

16589350034044.jpg“정말로 그래?”

16589350040878.jpg“……?”

무슨 의미냐는 듯 삐뚜름하게 나를 응시하는 그를 향해, 나는 짧게 물었다.

16589350034044.jpg“그럼 759번째 레냐가 죽으려 할 땐 왜 막았어?”

이곳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본 기억의 구슬……. 759번째 레냐와의 기억이 담긴 그 구슬 속 에드의 모습이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났다.

16589350034044.jpg“구슬 안에서 봤어. 759번째의 레냐가 당신 앞에서 자결하려 할 때, 당신이 맨손으로 칼날을 잡으면서까지 멈춰 세운 거.”

16589350040878.jpg“…….”

16589350034044.jpg“생각해보니 이상하더라고. 방금 당신 말대로면 759번째가 죽든 말든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이었잖아. 왜 그렇게까지 했어?”

대답하지 못한 채로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상관없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16589350034044.jpg“사실은 무서운 거겠지. 당신의 레냐가 품 안에서 죽어가는데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먼 과거의 그때처럼 괴로워질까 봐…….”

16589350040878.jpg“…….”

16589350034044.jpg“그렇지? 그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다가 시간까지 되돌린 당신이잖아.”

나는 칼날을 내 목에 더욱 가까이 댔다.

16589350034044.jpg“마지막 부탁이야. 그를 돌려줘.”

그에게선 여전히 어떤 대답도 없었다. 원작의 레냐가 독약을 삼키면서까지 건넨 ‘여기서 멈춰 달라’는 부탁을 무시했던 그때처럼 그는 침묵했다. 어쩌면 그 과거를 똑같이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노라고 생각하고 있을 즘―

16589350040878.jpg“부탁……? 협박이겠지.”

그가 날 선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를 억누르고 있던 에드의 힘이 사라지고 있는 건지, 차츰 과격한 마력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강렬한 노기로 인하여 일어난 마력은 아까처럼 자연재해의 형상을 띤 채로 주위를 휩쓸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기억의 구슬들마저 파장을 못 견디고서 터져나가며, 그 날카로운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16589350040878.jpg“감히 내 앞에서 목숨으로 협박을 해……?”

그의 섬뜩한 음성을 들으면서도 나는 고갤 숙이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시선조차 피하지 않았다. 마침 깨져나간 구슬의 파편 하나가 내 눈 쪽으로 날아왔지만― -파스슥. 내게 닿기 직전, 그가 마력으로 만든 무형의 장벽에 가로막혀서 부서졌다. 이토록 돌풍이 휘몰아치고 파편이 날아다니는데도 내게는 작은 조각 하나 와닿지 않는다. 그 파편이 내게 스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가 나를 비호하고 있기에.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내 죽음을 다시 볼 용기가 없다.

16589350040878.jpg“그거 내려놔.”

16589350034044.jpg“…….”

16589350040878.jpg“내려놔!!”

그의 필사적인 외침을 들으며 나는 단검을 더욱 가깝게 목에 들이댔다. 예리한 칼날이 여린 피부에 파고들었다. 전에 에드의 꿈속에서 이런 식으로 다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꿈이었다. 지금 순간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명백한 현실. 그때와 비할만한 게 아니었다.

16589350034044.jpg‘아파…….’

식은땀이 나고 손끝이 떨려올 만큼 아팠다. 상처로부터 흘러내리는 핏물의 불쾌한 축축함이 내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 남자의 표정이 다급해지는 것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어느샌가 노기를 지우고서 약해진 시선을 보내오는 그에게, 나는 유언이 될지도 모를 말을 속삭였다.

16589350034044.jpg“아마 당신은 레냐를 사랑했던 게 아닐 거야.”

16589350040878.jpg“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랑한 게 아니면 내가 뭐하러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렸겠어. 나는 네게 이상적인 미래를 만들어 주려는 일념으로…….”

16589350034044.jpg“그것들 전부 당신의 이기적인 소유욕과 집착에서 비롯된 거잖아.”

내 말에 반박할 거릴 찾듯 짧게 침묵하던 그가 다시 대꾸했다.

16589350040878.jpg“……아니. 널 위해서야. 나는 네가 맞이한 괴로운 결말을 고쳐주고 싶었던 거야.”

16589350034044.jpg“정작 레냐가 바라던 건 전부 무시해가면서?”

이번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나 보다. 조용해진 그를 향해 나는 결정적 물음을 던졌다.

16589350034044.jpg“수많은 레냐들이 원했던 게 정말로 이런 결과였어……?”

대꾸하지 못하고 멈춰선 그에게서 깊은 후회와 고뇌가 엿보였다. 그러는 동안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내 옷자락을 흥건하게 적셔가고 있었다. 조금씩 떨려오던 몸이 결국 힘없이 쓰러졌을 때, 그가 내 상체를 두 팔로 조심스럽게 안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과거의 비극……. 그 비극 앞에서 그는 또다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16589350040878.jpg“……내게 왜 이러는 거야. 왜 매번 이런 고통을 주는 거냐고!!”

완전하게 과거에 함몰되어버린 그가 고통스레 우짖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 레냐로서, 최초의 레냐와 그 이후 모든 레냐들이 품었던 한 조각 염원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

16589350034044.jpg“만약…… 우리의 삶이 전부 한 편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고…… 우리도 그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이라면…… 우린 아마 악역이 아닐까?”

16589350040878.jpg“……!”

흉포하게 날뛰던 그의 기운이 그 순간 곧바로 조용해졌다.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그 말을 언제 들었었는지, 역시나 기억해 낸 것 같았다.

16589350040878.jpg“너…… 방금 그 말…….”

16589350034044.jpg“그렇잖아…… 우린 아마 악역일 거야…….”

16589350040878.jpg“그만해.”

16589350034044.jpg“가여운 에드…… 넌 악역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16589350040878.jpg“그만…… 제발…….”

16589350034044.jpg“그러니 내가, 그 역할에서 해방시켜 줄게.”

원작의 레냐가 죽기 전에 에드에게 남겼던 마지막 말까지 힘겹게 끝마친 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에게선 분노의 외침도, 그만하라는 애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큼 짙게 깔린 그 침묵이 오히려 아까의 소란보다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 최후의 호소를 그가 만약 도발로 받아들였다면, 그럼 정말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16589350034044.jpg“……?”

그에게서 들려오는 옅은 흐느낌 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하며 다시 눈을 떴다. 원작에서 독약을 삼킨 레냐가 죽어가는 순간에마저 보고 싶어 했던, 그러나 너무 빠르게 숨을 거두는 바람에 끝까지 보지 못했던 얼굴……. 그 얼굴이 흐릿해진 시야에 어른거리며 비쳤다. 그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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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9350040878.jpg“마지막으로 물을게.”

그러라는 뜻으로 침묵하자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16589350040878.jpg“……정말로 나를 악역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어?”

16589350034044.jpg“…….”

16589350040878.jpg“그게 그때부터 쭉 네가 바랐던 일인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과거의 레냐가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내 마음을 알아챈 그가 이번엔 쓴 미소를 머금었다.

16589350040878.jpg“그렇구나.”

그가 살아온 세월, 품어온 집착, 저지른 죄업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짧은 수긍이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줄곧 무시해온 레냐의 바람을, 그는 비로소 이루어줄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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