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혈육이 안겨준 모욕2022.03.11.
“이제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잠깐 기절했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에드가 나를 보며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나는 아직 몽롱한 정신이 똑바로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그에게 물었다.
“다 끝났다는 건…….”
“아예 사라진 것처럼 자취를 감췄어요, 그 녀석. 다행히 부인 상처도 다 치료됐고요.”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빈 치유의 물약 병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림피크를 불태우다가 체력이 동날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물약을 에드가 내 상처 치료에 쓴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손 안에는―
‘그 에드가 마지막에 쥐여준 구슬……. 무슨 의미이지?’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레냐의 진심을 외면하고, 부탁을 무시하고, 결국엔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긴 세월에 마모되고, 헛된 집착에 집어 삼켜지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레냐를 위하는 마음…… 그 마음에 따라 내 결말을 바꿔준 뒤 스스로 반복의 굴레를 끊은 것이다. 그 뒤에는…….
“이젠 괜찮아. 이게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 속삭이곤, 내 손에 기억의 구슬 하나를 쥐여주었다.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곧장 그것의 앞부분을 조금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구슬이 보여주는 영상엔 레냐가 없었다. 다른 수많은 구슬과 달리 그 안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과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험한 일 겪게 해서 미안해요. 과거의 제가 미련 하나 제대로 못 놓는 한심한 놈이라.”
문득 건네진 에드의 사과에 나는 고갤 내저었다.
“아뇨……. 저는 그냥…….”
심정을 표현할 말을 찾고자 머뭇댔으나, 실패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를 포옹했다. 원망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무사히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된 지금 순간이 마냥 기쁘고도 행복할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가능하면 이 재회의 순간을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쿠구궁. 어디선가 천둥소릴 닮은 굉음이 들려오는 바람에 그의 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금 뭐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무너지는 소리 맞아요, 애석하게도.”
“네……?”
마침 또다시 콰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는 그 소음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전해주었다. 퍽 불길한 소식을.
“이 세계의 마지막 영혼, 즉 과거의 제가 사라지는 바람에 이쪽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에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방금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말한 거 맞나?’ 하고 의아했을 정도였다. 한순간 찾아온 인지 부조화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되게 심각한 상황인 것처럼 들리는데…… 어서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셨죠?”
“사실 그게 말이죠…….”
그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원래는 여기에 보관된 고대의 유물 중 하나를 써서 부인을 내보내 줄 계획이었어요.”
“잠깐,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다는 건……?”
“이젠 그 첫 번째 계획 말고 새 계획이 필요해졌다는 의미죠.”
나는 에드가 곁눈질로 가리킨 주변 파편들을 살펴보았다. 죄다 부서진 기억의 구슬 조각들 사이에 뭔지 모를 물건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까 두 명의 에드들이 마법으로 난동을 부린 탓에 이 근처의 모든 물건이 부서졌는데, 에드의 이 난감한 표정을 보니 저 부서진 게 그 ‘탈출구’ 아닐까 싶었다. 내 입술 사이에서 절로 탄식이 흘렀다.
“아…….”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긴 해요.”
“……?”
“다만 그게 약간은 위험―”
“괜찮아요. 위험하든 뭐든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잖아요, 이 상황에선.”
마침 또다시 먼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는 상황. 지푸라기든 뭐든 일단은 잡고 봐야 할 때므로 에드에게 급히 말했다.
“그 방법이라는 게, ‘죽을 날 기다리기,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앉아서 울기’ ……이런 것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어요.”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각각 3번째, 4번째, 5번째 방법이고, 제가 생각해둔 2번째 방법은 여기서 확실하게 나가는 방법이니까.”
그가 그런 다소 불안한 소릴 하면서 내 손을 붙잡았다. 그 뒤 이동 마법을 쓴 듯, 어느 순간 우린 함께 마탑의 바깥에 나와 있었다.
“아…….”
이쪽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마탑을 나와 본 나는 아찔한 기분에 신음했다. 마탑 바깥의 하늘은 이 세계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의 한쪽 귀퉁이는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웠고, 다른 쪽 귀퉁이는 또 대낮처럼 환했다. 마치 꿈속 세계인 양 기본적인 물리적 법칙마저 전부 무시된 광경이었다. 에드는 그 엉망진창 된 하늘 아래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림피크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가 만들어낸 통로를 통해서 나가면 될 거예요.”
“……그런데 림피크 나무가 왜 저깄죠? 저건 분명 황성 근처에 있었는데…….”
“저 나무를 기준으로 시공간이 연결된 거라서 그래요. 간단하게 말하면, 각 세계를 잇는 통로 한가운데에 나무가 있는 셈이죠.”
“통로의 가운데…….”
멍하니 되짚는 내 목소리에 그가 설명을 덧댔다.
“그래서 본래 있던 세계에서도 저 나무를 볼 수 있고, 그 반대편인 이쪽 세계에서도 보이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아까 그 녀석 머릿속에 있던 정보를 끄집어내서 말하는 거라.”
“여하간 저길 통해서 나갈 수 있는 거죠?”
“그건 확실해요. 그 녀석이 우릴 여기로 데려온 것도 저 통로를 통해서였으니까.”
또다시 순간이동을 위해 나는 먼저 에드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작은 문제가 있긴 한데, 뭐 부인 말대로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라고, 그가 말하는 바람에 한순간 멈칫했으나, 이번에도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봤을 땐 이미 림피크 나무 앞이었던 것이다. * * * 까만 어둠 속에서 닐스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난 가운데 홀로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의식 한 조각. 그것이 바스러져 가는 그의 영혼을 가까스로 버티게 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한때 황제로 불리었던 그가 지금은 팔다리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더듬어 보다가, 그는 떠올렸다.
‘아, 림피크 씨앗……. 그걸 심장에 심었었어.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심었더라……?’
그는 이번에도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그렇게 안개 낀 기억의 숲을 헤매길 수 분 뒤, 증오스러운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에이드리언 그 자식……! 그 자식을 죽여버려야 해……!!’
에이드리언 폰 베르크. 그건 기억이 소실돼가고 있는 중에도 정확히 기억나는, 몇 안 되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의 이복동생이자, 선대 황제의 탐욕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 그런 주제에 황태자였던 닐스 자신보다도 더 빼어난 재능과 외모를 갖추어서 항상 속을 끓게 했던 존재. 한때는 그것을 진짜 동생처럼 여기고 잘해 주었을 때도 있었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여기저기서 냉대받는 게 가여워서, 그것의 어미가 죽었을 때 시체조차 없이 텅 빈 묘지를 직접 만들어 그곳에 데려갔던 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가엾게 여겼던 동생이 보답이랍시고 안겨준 것은 존경심도, 우애도 아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감……. 언제인지 모를 과거에 황실 연회에서 그는 에드로부터 그 모욕감을 선물 받았다.
“태자 전하, 저쪽의 저분은 누굴까요? 황실 연회에선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닐스의 파트너로서 연회에 참석했던 어느 영애가 그리 물었었다. 이름이 리제였던가? 라리사였던가?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엔 사랑에 빠진 소녀 특유의 간지러운 설렘이 담겨 있었다. 닐스를 부를 땐 그녀가 한 번도 담아내지 않았던, 그런 봄꽃 같은 감정이었다.
‘대체 어떤 새낄 말하는 거야?’
그는 속이 들끓는 기분을 삼키며 그녀의 시선이 향해 있는 방향을 보았고, 자신의 이복동생과 눈 마주치게 되었다. 온갖 값비싼 선물을 가져다 바쳐도, 매주 연정을 고백하는 서신을 보냈어도 무덤덤하기만 했던 그의 연회 파트너. 그랬던 그녀가 시골 소녀처럼 순진한 얼굴로 바라보던 건 다른 이도 아닌, 에드였다.
사생아인 까닭에 제대로 된 세력도, 자본도 갖추지 못한 그의 동생은 그럼에도 첫 연회에서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받았었다. 게다가 그 연회가 끝나갈 즘, 그 두 연놈은 발코니로 가서 서로 시시덕거리며…….
‘그래, 그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였어. 마계의 씨앗을 가슴에 심은 것도, 내가 이런 꼴이 된 것도……!!’
오래토록 가슴 속에서 묵혀 온 강렬한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그 아늑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나가서 이복동생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의지가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그때, 바르작거리던 그의 팔다리를 단단한 뭔가가 구속하듯 휘감았다. 나무의 줄기 같기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뭔가가. 목질의 촉수는 그의 반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전신을 더욱 단단히 휘감았다.
‘놔……!! 지금 당장 가서 그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압박감에 숨이 막혀오며, 그로 인해 잠깐 또렷해졌던 닐스의 정신도 차츰 다시 몽롱해졌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는 아까 던졌던 물음을 똑같이 던졌고,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를 이어갔다. 더 정확히는, 같은 방식으로 사고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쉽사리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다 떠나서…… 나는 누구지?’
아까보다도 더욱 깊은 망각의 강 속으로 그의 정신이 천천히 잠겨 갔다. 그대로였다면 필시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로 림피크와 온전한 하나가 됐을 터나―
“……?”
순간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자기 자신조차 잊은 닐스의 기억 속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복동생의 목소리가. * * *
“림피크 나무에서 갑자기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요?”
분명 방금까진 그냥 식물같이 느껴졌을 뿐이건만. 왜인지 우리가 여기 도착하자마자 나무를 중심으로 흉흉한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파스슥……. 파스슥……. 나뭇가지가 그 끄트머리를 날카로이 세우고서 우리 쪽으로 뻗쳐오기 시작했다.
‘꼭 우리를 찌르려는 것처럼 보여……. 아까 에드가 말한 작은 문제가 설마……?’
나는 걸음을 슬쩍 뒤로 물리면서 에드에게 물었다.
“아직 저 안에 닐스의 의식이 남아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왠지 저 뾰족뾰족한 나뭇가지가 전하 쪽으로 향해 있는 기분이라 불안해서요.”
“사실 제가 아까 말한 ‘작은 문제’가 그거예요.”
“……네?”
그때 불길하게 꿈틀거리던 가지가 결국 예상대로 에드를 꿰뚫을 듯 뻗쳐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몸을 살짝 움직여 피했고, 애꿎은 허공만 스친 나뭇가지는 다시 기괴한 소릴 내며 움츠러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이어서 공격하려는 듯 가지를 날카로이 세우는 나무를 가리키며 에드가 마저 설명했다.
“아직 닐스의 의식이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