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멱살 잡고 끌고 갈래2022.03.15.
“……!”
에드의 발언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분을 쪽쪽 빨아먹어 거대해진 림피크 나무만 보면 그 숙주였던 닐스는 그야말로 조각 한 점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닐스의 의식이 아직 남아 있느냐는 그 물음도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던져봤을 뿐이건만, 에드는 계속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닐스의 생존을 주장했다.
“그래서 통로 근처에서 마족들을 처리할 때도 가끔 나뭇가지가 저를 찌를 것처럼 뻗쳐왔었죠.”
“…….”
“림피크가 숙주인 닐스를 충분히 흡수하고 나면 그 녀석 자아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단계는 확실히 아닌 것 같네요. 닐스가 아니고서야 누가 봐도 호감형 인상인 저를 이렇게―”
‘이렇게 공격할 리가 없잖아요.’라고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그전에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그를 노리고서 또다시 매섭게 찔러왔다. 마치 에드가 스스로를 ‘호감형 인상’이라고 표현한 것에 반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쯤 되니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나무 안엔 아직 닐스의 영혼이 남아 있고, 그 닐스는 여전히 에드를 증오하는 듯했다. 즉, 우린 결국 악령이 깃든 나무를 통해서 여길 탈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쿠르릉! 난폭한 형제 싸움이 이어지는 와중에 하늘에선 아까보다 더욱 크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주위 풍경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근처에서 흐물거리는 지면을 피해 옆으로 움직이며 외쳤다.
“시간이 없어요!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제가 주의를 끌고 있을 테니까 부인 먼저…….”
“아뇨! 그런 거 말고요!!”
한 명이 희생하고 한 명은 살아남고. 남은 한 명은 혼자 남아 절망하다가 또다시 그릇된 선택을 하고……. 나는 천 번이 넘도록 반복된 그 지독한 비극의 주인공 역할에서 정말로 벗어나고 싶었다.
“같이 나갈 방법을 찾자고 말하는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지금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까요.”
“화해의 손길이라도 내밀어 보세요. 일단은 닐스랑 형제고, 옛날엔 사이도 좋았다고 했잖아요.”
화해를 청해 보라는 권유에 에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뭇가지가 그 틈에 한 번 더 그를 공격했고, 그제야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꾸했다.
“화해의 손길……이라니. 붙잡을 손도 없는 상대한테요?”
“아뇨, 그냥 은유적 표현이었―”
그냥 은유적 표현이었다고 말하려 했으나,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물체가 있었다. 나무 둥치에서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있는 수상한 물체. 나는 그것을 멍하니 살피다가, 에드에게 말했다.
“……손이 있는 것 같아요.”
“……?”
“저쪽에요.”
나는 방금 발견한 그 삐죽 튀어나온 그것을 가리켰다. 덕분에 그 물체를 발견하게 된 에드 또한 할 말을 잃은 듯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그 물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무 둥치에 삐죽 튀어나와 있을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에드가 이윽고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 팔뚝……?”
아무리 마계의 식물이라지만 그래도 나무인데, 나무에서 사람 팔뚝이 삐죽 자라날 리는 없을 터였다. 그것도 그냥 팔뚝도 아니고, 화려한 금색 수가 놓인 옷소매에 감싸인 팔뚝이. 에드 또한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긴 듯 한참이고 그 팔뚝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것 같았다.
“저 옷자락에 놓인 자수―”
에드가 무언가 말하려던 차에 다시 나뭇가지가 이쪽으로 뻗어져 왔다. 나무를 아예 불태워 버렸다간 우리가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게 되기에,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나뭇가지를 피하고만 있었다. 정체불명의 팔을 관찰해볼 여유는 없어 보이는 상황.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확인해봐야 해.’
어쩌면 림피크에 삼켜진 희생자 같은 게 아닐까? 식인 나무라는 소린 못 들었지만…… 여하간 조난자라면 그냥 지나쳐선 안 될 터였다. 다행히 림피크는 에드를 공격하는 일에만 열중이라, 내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얽혀 있는 림피크 나무의 뿌리를 타고 올라갔다. 팔뚝이 삐져나와 있는 곳까지 올라선 뒤, 비로소 그 안쪽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닐스?!”
팔뚝의 주인은 닐스였다. 전신을 나뭇가지로 칭칭 묶인 그가 팔뚝 하나만 밖으로 빼낸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아, 림피크 나무에 붙어 있는 상태라서 그런가?’
아까 에드가 말하길 림피크 나무가 세계를 잇는 문 한가운데에 있고 어쩌고 해서 나무를 이쪽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같은 원리로 나무에 붙어 있는 닐스 또한 여기서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붙어 있는 상태…… 그러고 보니 이 상태에서 닐스가 나무와 분리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무가 얌전해지나?’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림피크 나무가 에드를 자꾸 공격하는 건 그 안에 닐스의 의식이 남아 있어서인 듯했으니까. 나는 일단 목을 큼큼 다듬었다.
“저, 저기…….”
“…….”
“잠깐 정신 차리고 거기서 나와 보시는 게…….”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눈. 나는 닐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닐스 태자 전―”
그 순간,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나무 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손으로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
그가 나를 소름 끼치는 악력으로 붙잡고 있는 사이, 닐스의 심장에 파고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뿌리가 꿈틀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손목을 타고서 올라오던 그것은 차츰 팔뚝으로, 어깨로, 그리고 최종적으론 심장을 향해서 움직였다. 닐스로는 모자라 나까지도 제 숙주로 삼으려는 것처럼.
[그 녀석이 나를 비웃었어. 나한테 모욕감을 안겨 줬어.]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나는 순간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닐스의 독백에 멈칫했다. 분명 귀로 들은 건 아니었다. 마치 뇌에 대고 속삭인 듯, 닐스의 생각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자식을 잘 돌봐주려 했었는데…….]
[에이드리언 그 개자식이 나를 배신하고 조롱한 거야.]
[황태자는 나였는데, 왜 그딴 자식이 더 주목받는 거지?]
열등감, 배신감, 모멸감……. 닐스가 지녔던 온갖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림피크 뿌리를 타고서 내게 전해졌다. 그 뿌리가 내 상체를 거의 뒤덮었을 즘, 뒤에서 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꺼내 줄 테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함부로 움직이면 다칠 수 있어요!”
내가 삼켜지는 걸 보고 달려온 것 같았다. 마법을 쓰려는 모양인지 뒤에서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림피크 나무를 파괴하면 우린 이곳에 영영 갇히고 말 터. 나는 에드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 아직 움직일 수 있었던 왼쪽 팔을 필사적으로 휘저어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 그래도 방금 막 수수께끼가 풀린 차였으므로.
‘원작의 에드가 주고 간 그 기억의 구슬. 이제야 쓸모를 알겠어.’
원작 에드가 사라지기 전에 남겨준 그 구슬을 보았을 땐, 조금 의아했었다. 다른 구슬들과 달리, 그 구슬 안에는 레냐와의 추억이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오직 레냐에게만 목매던 에드가 유일하게 남겨둔, ‘닐스와의 기억’……. 나는 그 기억이 담긴 구슬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지금 이때 쓰라는 의미였던 거야.’
어려운 건 없었다. 나는 그저 그 구슬을 꺼내서 닐스의 방향으로 내밀었다. 그 뒤 나뭇가지가 스스로 움직여서 그 구슬을 닐스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
이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닐스의 눈동자가 구슬을 무력하게 응시했다. 마침내 구슬에서 그가 몰랐던 과거가 낡은 비디오처럼 삐걱이며 재생되었다.
“처음 뵙겠어요, 에이드리언 황자 전하. 저는 태자 전하의 파트너로서 참석한 리제 폰 에스텔이라고 해요.”
“아, 형님의 파트너? 그래, 연회는 잘 즐기고 있나?”
“물론이랍니다. 너무도 완벽한 파트너와 함께인걸요. 그런데 잠깐 뭘 좀 여쭈어도 될까요?”
“뭐지?”
에드의 물음에, 자신을 닐스의 파트너라고 소개한 그 ‘리제’라는 소녀가 대답했다.
“실은, 제가 곧 다가올 태자 전하의 생신일 때 드릴 선물을 찾고 있답니다.”
“뭘 선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지?”
“네, 두 분께서 우애가 깊으시니, 태자께서 좋아하실만한 선물도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구슬이 드러낸 과거를 응시하던 닐스의 눈이 경악하듯 서서히 커졌다. 동시에 그의 당혹감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이게… 이게 뭐야…….]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과거를 보게 된 그는 나뭇가지에 묶인 채로도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아니야! 그 두 연놈이 그날 나 몰래 시시덕거렸던 건 서로 붙어먹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자신의 파트너였던 영애와 이복동생을 끝까지 악인으로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가 어떻든 구슬은 그날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형님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게 없으니, 추억을 선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여행이라든가…….”
“여행 말씀이신가요?”
“응, 전에 시에른 지역에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던 것 같아. 그쪽이 볼거리도 많고 낭만적인 가게가 잔뜩―”
[닥쳐! 이건 진짜가 아니야!!]
구슬에서 에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중, 비명과도 같은 닐스의 외침이 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것들이 그날 나를 배신한 게 아니었으면,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건 전부 뭐였는데!]
[이때까지 내가 고통받은 건 전부 뭐였냐고!]
[에이드리언 그 개자식이 분명 그날 나를 무시하듯이 웃었다고……!!]
지금껏 증오에 쏟아부은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을 터다. 저 날 이후로 쭉 에드를 증오하며 살았을 테니. 그 시간이 헛것이었노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게 당연했고, 실제로도 한참이고 그는 본인이 본 장면을 부정했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무시하듯이 웃었던가……?]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 안 것이었을지도 모른단 의심의 독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