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악역에서 벗어난 사람들2022.03.18.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쉽게 흐려지며, 감정의 변화에 따라 쉽게 왜곡된다. 그렇기에 닐스는 제 낡은 기억을 향해 품기 시작한 의심 조각을 내버리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던 에드를 향한 증오도, 그로 인해 위태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날 보면서 어떻게 웃었지……? 정말로 비웃었던가?]
[틀렸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질 않아…….]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는 왜 지금껏 녀석이 나를 비웃었다고 생각했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내가 무시당한다고 느꼈던 그 모든 건…….]
혼란에 잠겨있던 그에게 구슬이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었다. 리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에드는 자신을 지켜보는 닐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한 조각의 악의도 엿보이지 않는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닐스를 불렀다.
“형!”
아주 오래전이라 부분부분 잊히고 왜곡됐던 닐스의 기억이 그제야 온전해졌다. 그래, 에드는 그날 닐스를 비웃지 않았다. 구슬 속에서 비쳐 보이는 에드의 밝은 미소를 마주한 닐스는 마침내 이때껏 한 번도 도달해본 적 없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전부 내 열등감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움직이던 나뭇가지들이 흐느끼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하던 나뭇가지는 닐스의 신형을 완전히 감싸서 집어삼켰고, 동시에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구속으로부터 풀려나 고개를 들자,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에드가 곧장 물었다.
“괜찮아요? 하지 말라는 것처럼 팔을 막 휘젓길래 일단 지켜봤는데…….”
“네, 괜찮아요. 이제 통로로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한 거예요?”
그는 얌전하게 움츠러든 림피크를 두드려 보며 신기해했다. 나는 그에 짧게 답했다.
“오해를 풀어 줬어요. 닐스가 전하를 많이 오해하고 있길래.”
림피크에는 닐스의 자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아를 지탱하던 것은 에드를 향한 증오심이었을 것이다. 닐스와 접촉한 순간 느껴진 그의 감정 대부분이 증오였기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옛 기억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지탱하던 그 증오를 무너트렸다.
“…….”
내 말을 듣고서 에드는 조용히 닐스의 나무를 살폈다. 그리고 제 손을 움츠러들고 있는 가지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마치 화해의 악수를 청하듯이. 나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나무, 스스로 붕괴할 수도 있어요.”
“혼자서요?”
“네, 혼자서요.”
방금의 일로 닐스의 증오는 사라질 게 분명한데, 보통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후회와 죄책감이 대신 들어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아마―
“닐스가 스스로 물러날 거예요, 아마.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고 어서 나가는 게 좋겠어요.”
나는 아까보다 더욱 이상한 빛깔로 변한 하늘을, 그리고 림피크 나무 위에서 서서히 열리고 있는 통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에드도 이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외출이 너무 길었죠. 돌아가서 쉽시다.”
나무뿌리에 주저앉아 있던 내게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았고, 우리는 함께 통로 너머로 걸음을 옮겨갔다.
* * * 림피크가 저절로 시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일주일 전부터였다. 차기 황제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던 에이드리언 2황자와 레냐 황자비가 그 통로 너머로 사라진 이후로는 통로가 닫혀서 마족도 더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덕분에 집결해 있던 병력도 지금은 상당수 빠진 상황.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남아 있던 몇 병사들만이 아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등불에 의지해가며 림피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타라가 근처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채 물기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레냐가 사라진 그날의 기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타라 폰 슈베어트. 그대는 황자비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그녀를 위험에 빠트렸다. 이에 본 사령관은 군법에 따라 그대에게 즉결 처형권을 행사토록 하겠다.”
타라에게 레냐를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겼던 니콜라스는 검을 빼내 들고 그 자리에서 타라를 처형하려 들었었다. 레냐는 그의 친동생이었고, 동시에 제국의 황후가 될 이였다. 그런 이를 피신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통로에 뛰어들 수 있도록 직접 돕기까지 한 타라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레냐가 떠나기 전 타라에게 ‘닉 오빠한테 전해줘요.’라는 말과 함께 맡긴 쪽지가 없었다면. ―타라에게는 죄가 없어. 전부 내 선택이고, 타라는 황자비인 내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야. 부디 총사령관으로서 이성적이고 현명하게 판단해서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이기도 한 타라에게 부당한 처벌을 내리지 말아줘. 오빠를 믿을게. 레냐의 손편지를 읽은 닉은 타라를 향해 겨눴던 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타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무거운 죄책감을 떠안게 되었지만.
“오늘도 안 자는 겁니까? 어제도 밤샜잖아요.”
혼자 앉아 있던 타라의 옆에 루카스가 앉으며 말을 붙여왔다. 타라는 그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통로가 있었던 허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요. 떠나시기 전에 금방 오겠다고 했거든요.”
“그럼 제가 대신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일단 눈 좀 붙이시죠. 나중에 저한테 선물할 비누 고르러 가야 하잖아요.”
그의 농을 듣고서 타라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매번 힘들 때마다 웃게 해줘서. 고마운데 저 이번에는…… 이번에는 도저히 씩씩하게 웃을 수가…….”
어떨 땐 커다란 고난이 아닌, 작은 위로의 말이 참았던 눈물을 터져 나오게 한다. 루카스의 작은 위로 앞에서 타라는 아주 오래간만에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제 어깨를 위로하듯 감싸 안은 루카스에게 묵혀둔 말들을 꺼냈다.
“떠나시기 전에, 자기를 원망해도 좋다고 말했어요…….”
“황자비가요?”
“네, 그리고 사과도 하셨어요. 항상 나쁜 친구여서 미안하다고……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본인이 먼저 손 내밀어도 매몰차게 뿌리쳐 달라고…….”
닦아내도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그녀의 호소는 죽 이어졌다.
“왜 황자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한 번도 제게 나쁘게 행동하셨던 적 없는데…….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얘기 듣는 순간 제가 정말…… 정말로 슬펐다는 거예요.”
“꼭 옛날에 비슷한 일을 겪어본 것처럼?”
“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요즘 들어 자꾸 그런 기시감이 들어서요. 황자 부부를 볼 때도 그렇고, 당신을 볼 때도 그렇고.”
첫 번째 에이드리언이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들에게 원본 세계의 기억을 일부분 전해주었기 때문임을,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그 익명의 공여자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참 신기한 일이 다 있노라고, 오늘처럼 이따금 잡담거리 삼아 이야기하게 될 뿐이었다.
“흑…….”
타라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루카스는 가만히 토닥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의아함을 느낀 타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차, 루카스가 먼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황자비가 그랬다고요? 다음 생에 본인이 손 내밀면 매몰차게 뿌리치라고?”
“네? 네, 그랬죠.”
“정말로 뿌리칠 겁니까?”
루카스가 물은 즉시 타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만약 다음 생에 다시 만난다고 해도 제가 그분 손 뿌리칠 일은 없을 거예요.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는요?”
“당연히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죠!”
“그럼 말이죠―”
말을 잇던 루카스가 몸을 일으키곤, 림피크 위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손도 지금 잡아주러 갈 겁니까?”
루카스가 가리킨 방향을 살핀 타라는 이윽고 기함하게 되었다.
“통로가……!”
레냐를 탐욕스레 삼키고 사라졌던 그 통로가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도로 생겨난 그 통로에서 삐져나와 있는 정체불명의 손 두 개……. 그 두 개의 손이 무언가 붙잡을 거리라도 찾듯이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그 두 개의 손 중 하나가 왠지 낯익어서 유심히 살피던 중, 타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황자비님의 반지……!!”
레냐가 본인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말했던 반지가 정체불명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그 즉시 둘은 통로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허우적대던 두 개의 손을 각각 잡아서 끌어당겨 주었다. 그리고―
“쯧. 웬 남자 손이 만져진다 했더니만, 또 루카스 경 자네였나?”
“타라! 역시 잡아줄 줄 알았어요!”
기괴한 빛깔로 일렁거리는 통로에서 두 명의 사람이 마침내 빠져나왔다. 헝클어진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와 달빛을 두른 듯 하얀 남자. 한때 악역이었으나 1029번 반복된 삶 끝에 그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