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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에필로그 (102/102)

102. 에필로그202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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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9350828462.jpg“정말로 이 결정 후회 안 하세요?”

고요한 회의실 앞. 에드를 향해 묻는 레냐의 목소리엔 옅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정작 중요한 일을 앞둔 에드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16589350828467.jpg“후회할 게 없죠. 제가 그 진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다 알게 됐는데 어떻게 입 다물고 있겠어요.”

마족과 전쟁하던 시절 공작의 정령이 폭주해서 죄 없는 이들을 학대했다고 알려졌던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숨겨진 진실……. 과거의 자신에게 흡수될 뻔했을 때, 그의 방대한 기억을 들여다보다가 그 진실의 파편을 엿본 에드였다. 그가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겠노라고 말했을 땐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던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레냐는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16589350828462.jpg“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황위가 걸린 일이에요. 보장된 황위를 걷어차는 일이잖아요.”

그 말대로 진실을 밝히면 에드는 황위에 오르지 못할 수 있었다. 유일한 황실의 후손으로서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차에, 그의 아버지인 초대 황제가 실은 모두를 속였다는 걸 밝히는 행위였으므로. 에드는 레냐의 말에 가볍게 동의했다.

16589350828467.jpg“맞아요. 앞으론 황제의 사생아가 아니라 사기꾼의 사생아라 불리게 되겠죠.”

16589350828462.jpg“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가―”

16589350828467.jpg“하지만 초대 황제의 죄는 그냥 덮어둘 만한 게 아니에요. 마족과의 전쟁 당시 아주 중요한 순간에 공작의 정령을 폭주시켰던 거니까. 그것도 철저하게 금지된 술법이던 흑마법을 써서요.”

16589350828462.jpg“…….”

16589350828467.jpg“그로써 몬트 공작이 어떤 불명예를 끌어안았는지 생각해 보세요.”

레냐는 더 대꾸할 수 없었다. 물론 에드를 정말로 사랑하기에, 그녀로서는 그의 핏줄에 한 점의 오점도 없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대도 친부가 억울하게 끌어안은 불명예를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서 에드가 초대 황제의 죄를 밝히지 않는다면, 한때 제국의 영웅으로서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몬트 공작은 영영 오명을 벗지 못한 채 학살자로 기록될 터다. 머뭇거리는 레냐에게 에드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16589350828467.jpg“제가 그렇게 양심이 충만한 편은 아니긴 한데, 고작 제 입지를 지키려고 아내를 죄인의 딸로 만들 만큼 못난 인간도 또 아니라서…….”

레냐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회의실에 들어서서 진실을 밝히면 그곳 모두가 그를 죄인의 아들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할 것인데도. 그의 그런 올바름이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마음을 아리게 만든 까닭에, 레냐는 핏기가 서리도록 제 입술을 깨물었다.

16589350828462.jpg“옆에 있어 줄게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네텔라 님의…… 저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웅이라 불리셨던 그분의 아들이라는 걸 잊고서 감히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꽈악. 더욱 강한 의지를 담아서 에드의 손을 붙잡으며 레냐가 말을 이었다.

16589350828462.jpg“입을 함부로 놀린 죗값을 치러야 할 거예요.”

둘은 함께 문을 열고 회의실에 걸음을 들였다. 영영 밝혀지지 못했을 뻔한 어떤 진실이 긴 세월 끝에 비로소 밝혀진 날이었다. 6년 전의 기억을 보여주던 기억의 구슬이 영상 재생을 멈추었다. 재생이 멈추고서 다시 투명해진 구슬 표면에 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하늘색 눈동자에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랑스러운 남자아이. ‘황태자 아론’이 꺼진 구슬을 아쉽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제 아들의 그런 학구열이 기특해진 에드는 아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16589350828467.jpg“이제 충분히 이해됐느냐? 왜 베르크 황조가 무너지고 몬트 황조가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역사 수업 중에 왜 갑자기 왕조가 바뀌었는지 잘 이해 안 된다고 하기에 에드는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주었다. 황조가 바뀌는 그 순간을 직접 겪고 지켜본 자신의 기억을. 아론은 구슬에서 눈을 떼곤 에드에게 답했다.

1658935083526.jpg“네. 제대로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 뒤에 베르크 황조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무너졌지만, 아버지께선 몬트 가문에 편입되셨고, 그 후 황위에 오르셨다는 거죠?”

16589350828467.jpg“그래, 아주 힘든 과정이었지.”

먼 과거를 돌이켜본 에드가 미간을 구겼다. 그날, 귀족들은 당연하지만 초대 황제의 실체를 알자마자 그 아들인 에드를 가만두지 않으려 들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절이 개국공신 중 한 명인 네텔라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아내가 몬트 가문의 금지옥엽인 레냐가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물론 공작의 용서 또한 역할이 컸다. 뒤늦게라도 진짜 영웅인 몬트 공작이 다음 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에 공작은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에드를 사기꾼의 아들이라 질타하는 대신 장인으로서 감싸는 편을 택한 것이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도 정직하게 나서서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었으니 그 점을 기특하게 여기기도 하였고. 그리하여 황제가 된 에드는 현재 황태자의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6589350828467.jpg“그럼 이걸 보고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도 들어볼까?”

레냐를 닮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아론의 눈동자에 깊은 고뇌의 기색이 서렸다.

1658935083526.jpg“으으음……. 아내 말을 잘 듣자?”

기대했던 것과 영 다른 대답을 듣고 에드는 다소 당황스러워졌다.

16589350828467.jpg“……그것도 일단 인생의 진리가 맞기는 하다만, 수업 시간에 배운 ‘군주의 자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아라. 그것 말고 얻은 다른 교훈은 없느냐?”

1658935083526.jpg“장인어른께 잘하자……?”

16589350828467.jpg“아니…….”

1658935083526.jpg“거짓말은 나쁘다……?”

16589350828467.jpg“……그래, 아직 열 살도 안 되었으니 그 정도 교훈을 얻었으면 되었다. 지금은 그냥 실컷 뛰어노는 게 미덕일 때지.”

그쯤에서 만족하기로 한 에드는 픽 웃으며 아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레냐를 닮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론이 이렇게 레냐와 똑 닮은 눈동자를 열의로 반짝이는 걸 보다 보면 어느샌가 그 아쉬움이 사라지곤 했다. 아버지로서 그리 애정을 담아 아론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때, 아론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1658935083526.jpg“그럼 오늘 오후 수업 안 하고 사냥터 가서 놀다 와도 돼요?”

16589350828467.jpg“…….”

1658935083526.jpg“뛰어노는 게 미덕이라고, 방금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까…….”

벌써 어느 정도 영악해진 아이는 어른에게서 원하는 걸 받아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황당해진 에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16589350828467.jpg“너는 누굴 닮아 그리 잔머리를 얄밉게―”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멈췄다. 레냐가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이긴 해도 잔머리를 굴린 적은 없었으니, 아론의 잔머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뻔했다. 날 닮았던 건가…… 하고, 새삼 반성하는 시간 가지다가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16589350828467.jpg“쯧, 그래. 놀다 와라. 대신 궁에서 뛰어놀지 말고 꼭 사냥터로 가거라. 저번에도 정령이랑 날뛰다가 황궁 외벽을 무너트렸잖느냐. 재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궁인데 누더기가 되겠다.”

폭삭 무너져 내렸던 황성의 터에 인력과 재력, 마법의 힘까지 쏟아부어 재건한 웅장한 황궁……. 그 아름다운 궁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못하고 뛰어노는 태자와 그의 정령 탓에 보수공사를 몇 번이고 거쳐야 했다. 물론 그 파괴의 당사자는 정작 놀 생각에 마냥 해맑을 뿐이었지만.

1658935083526.jpg“네! 이번엔 아무것도 안 망가트리고 사냥터에서만 놀다 올게요! 어머니께는 잘 말씀해주세요!”

16589350828467.jpg“그래, 그래.”

에드는 신나서 달려나가는 아론의 등 뒤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정신없이 뛰어간 까닭에 아론은 알지 못했다. 에드가 자신의 뒤에서 은밀하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16589350828467.jpg‘순조로워…….’

평소 엄격한 아버지던 에드가 수업을 빼먹어도 좋다고 허락한 데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보낸 뒤, 그도 그 목적을 위해 천천히 자료 보관실을 나섰다.

1658935083526.jpg“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1658935083526.jpg“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복도를 지나는 길에 마주친 황실 기사단장과 궁중 마법사가 경외심 서린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제국 최초로 마법사이면서도 황위에 오른 자. 인류를 지키는 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마족인 네텔라의 피를 이은 이……. 범접하기 힘든 그의 배경에 제국인들은 마음을 다하여 충성했고, 그 또한 이상적인 황제의 모습을 보이고자 위엄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위엄 서린 표정이 황후의 앞에 서면 무장해제 되듯 흐물흐물해지고 만다는 건 물론 극소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16589350828467.jpg“황후.”

16589350828462.jpg“아, 폐하. 오셨어요? 태자가 보여 달고 했던 건 잘 보여줬나요?”

들어오는 동시에 황후의 집무실 문을 닫아 잠그며, 에드가 끄덕였다.

16589350828467.jpg“네, 도움이 됐다던데요.”

16589350828462.jpg“아아, 다행이네요, 역사에는 그나마 흥미를 보여서. 그래서 지금은 어딨죠? 빼먹을 생각 말고 오후 수업 준비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16589350828467.jpg“그게…….”

에드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레냐가 제 뒤쪽에 있던 창을 돌아보니, 허공을 멀찌감치 날아가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정령을 타고서 사냥터로 향하는 중인 아론의 뒷모습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에드를 향해 입술만 씩 끌어당겨 웃었다.

16589350828462.jpg“설명…… 해주실래요? 곧 수업 들어가야 할 태자가 왜 저기서 날아가고 있는지, 납득 가능하게끔.”

16589350828467.jpg“왜냐면―”

어느덧 가까이 온 에드가 레냐에게 속닥였다.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이.

16589350828467.jpg“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니까.”

16589350828462.jpg“……아!”

깜짝 놀란 나머지 책상 위 잉크병을 손등으로 쳐서 넘어트리고 말았다. 에드가 곧장 마법으로 되돌려주지 않았다면 서류를 전부 망쳐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혼기념일 같은 중요한 기념일을 여태껏 깜박하고 있다가 방금 떠올린 참이었으니까.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에드는 놀라는 그녀의 앞에서 으스대는 미소를 지었다.

16589350828467.jpg“이런 날엔 태자를 좀 내보낼 필요가 있어요. 분위기 좀 잡아보려고 하면 꼭 우당탕거리면서 뭘 부수고, 깨트리고…….”

16589350828462.jpg“아아, 그렇죠. 저번에도 분위기 좋았는데 갑자기 황궁 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중간에 급히 뛰어나왔었잖아요.”

16589350828467.jpg“그래서 저도 벼르고 있습니다. 태자가 나중에 신붓감 데려오면 눈치 없는 척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서 오붓한 시간 못 갖게 방해하려고요.”

16589350828462.jpg“와, 무려 10년의 설계 끝에 이루어지는 복수인가요? 근데 그런 짓 하면 황태자비한테 미움받는 시아버지 될걸요?”

“아하하, 그건 좀 싫은데요.” ―라고 장난스레 한탄하는 에드를 따라서 레냐도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이고 이어지던 미소가 잦아들고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분위기는 은밀해졌고, 에드가 마법으로 먼저 책상을 깨끗하게 치웠다. 그 뒤엔 레냐를 번쩍 들어 그 위에 앉혔다. 그녀가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자, 그가 제 반듯한 이마를 레냐의 이마와 맞댔다. 장난스러운 미소는 어느덧 사라졌고, 애욕의 열기가 대신하여 그의 입술을 물들이고 있었다. 천천히 둘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1658935083526.jpg“어머니! 아버지! 두 분 여기 계세요? 밖에 비 와서 도로 왔는데 그냥 궁에서 공놀이해도 돼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아론의 목소리가 둘의 분위기를 파스스 식혔다. 에드는 황당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법으로 소음을 차단해 버리자 아론의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16589350828467.jpg“진작 이럴 걸 그랬네요.”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어투. 레냐는 그런 그에게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목덜미를 안았다. 방해 탓에 잠깐 멈추었던 부드러운 입술이 비로소 그녀의 입술 위에 오롯이 맺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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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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