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조정에서 살아남는 법 81화>
Chapter 19. 훈련 혹은 단련(1)
깜빡!
세상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아스팔트 도로는 카펫 깔린 바닥이, 막 노을이 지려던 하늘은 높은 천장이 되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주인도, 손님도 없는 텅 빈 가게들은 마찬가지로 희고 푹신한 벽이 되었고.
[대상자 '이은호.' 교육원 이동 완료!]
'여긴 어디지?'
지난번 왔던 교육원과는 다르다.
그땐 그리 넓지 않은 강의실 정도였는데.
여긴…….
'강당?'
우선 상당히 넓다.
인테리어로 따지자면 대학교 캠퍼스에 하나씩 있는 대강당이 떠오르는 공간.
가장 앞쪽에 백 명은 족히 올라설 수 있을 단상이 놓여 있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좌석이 쭉 놓여 있다.
500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누구를 위한 의자인지는 모르겠다만, 규모가 꽤 크네.
거기다 단상 뒷벽을 가득 채운 스크린도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고.
저벅.
단상으로 걸어 내려가면서 동시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안전한 곳에 도착했으니 일행들의 안위부터 챙기자 싶어서.
[확인하지 않은 선물이 12개 있습니다.]
[모두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12개나 되는 메시지였으나, 내용은 대체로 비슷했다.
걱정된다. 어디냐. 여긴 어디다. 누구와 있다. 답장 기다리겠다.
다들 마지막 순간에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본 모양이다.
──── ────
ㆍ수신 : 이은호
ㆍ발신 : 최재혁
ㆍ형님 괜찮으십니까 율이도 삼촌 괜찮냐고 걱정 많이 합니다 보시면 꼭 답장 부탁드립니다!!
──── ────
그나저나 재혁이가 율이네와 같이 떨어졌나 보네.
그렇다면 안심이지.
──── ────
ㆍ수신 : 이은호
ㆍ발신 : 이예지
ㆍ이은호 씨! 괜찮죠? 일단 욕쟁이랑 마포역 안에 들어와 있어요. 목적지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 ────
이예지는 욕쟁이와 마포에 있고.
그나저나.
──── ────
ㆍ수신 : 이은호
ㆍ발신 : 송현숙
ㆍ김 씨! 이거 일케 보내는 거 맞남?
──── ────
이 씨에게 김 씨를 찾는 송현숙이 누군지 한참 고민했는데.
"오오- 송 씨! 보통이 아닌데? 송 씨라서 솜씨가 대단한 건가? 허허!"
생각해 보니 경비 아저씨가 청소 아주머니를 송 씨라고 불렀었다.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물어본다고 한 말이 그대로 입력된 건가.
어쨌든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줄 없는 번지점프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걱정했는데.
'지은 씨가 고생했겠어.'
이 많은 사람이 땅에 고꾸라지지 않도록 컨트롤 해야 했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고 마지막 메시지를 열었다.
지은 씨에게서 온 두 번째 메시지를.
──── ────
ㆍ수신 : 이은호
ㆍ발신 : 김지은
ㆍ광흥창 쪽으로 떨어진 것 같아서 찾고 있는데 안보이네요. 무사한 거죠? 답장 기다릴게요!
──── ────
이런.
모두에게 걱정을 끼쳐 버렸다.
의도치 않게.
빨리 답장해 줘야겠다 싶으면서도, 이런 생각 자체가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 찾는 사람이 많아졌을까.'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진 업무 외에는 전화고 문자고 받을 일이 없었는데.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어쨌든 정리해 보자면.
재혁이, 율이, 한울 씨가 망원 유수지.
지은 씨가 광흥창역.
이예지와 욕쟁이가 마포역.
청소 아주머니와 경비 아저씨는 소재 불명이나 무사함.
이 정도인가.
어르신 두 명이 어디 떨어졌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근처 어딘가라고 봐도 될 거다.
나머지가 모두 강북, 특히 한강 변에 몰려 있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먼저 재혁이에게.
'오늘 저녁 7시, 홍대입구역 8번 출구에서 만나자. 위험한 상황이면 나랑 지은 씨에게 알려 줘.'
홍대 근처면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고, 남은 사람들도 썩 위협적이지 않음을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곧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동하는 도중에 위험에 빠지지 말아야 할 텐데.'
재혁이나 지은 씨야 문제없을 거다. 사람이든 마물이든 마주쳐도.
다만 능력을 개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걱정이긴 한데…… 일단 지금까지 무사하다는 점에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근처에는 큰 위험이 없다는 증거일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가자.'
마음을 다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자보가 가득 붙은 대학교 공개 게시판처럼 각종 강의 계획서가 빽빽하게 떠 있는 스크린 앞으로.
그리고 눈을 비벼 가며 읽어 내리는 순간.
저벅.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
내가 아닌 누군가의 발소리가.
* * *
저벅. 저벅. 저벅.
저 위에서부터 계단식 강당을 거슬러 내려오는 남자.
까만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처음엔 욕쟁이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녀석이라기엔 너무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 곧장 그 생각을 지웠지만.
'나 말고도 있었네.'
입사 시험을 S+로 통과한 사람이.
[입사 시험 우수자를 위한 특별 강의가 준비되었습니다.]
[교육 이수 포인트를 소비해 다양한 강의를 수강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교육 이수 포인트의 지급 조건은 단순했다.
평가 등급 S+를 받을 것.
S등급이었던 지은 씨도 교육 이수 포인트는 받지 못했으니 확실할 거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용산구 출신은 아니다.
어딜까. 가까이에 있을까.
신경이 쓰인다기보단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
"사람이 있었네."
저벅, 저벅, 저벅.
날 발견하자 멈칫하며 느려졌던 발걸음이 찡그린 눈썹과 함께 되레 빨라진 걸로 보아.
키는 185cm 이상.
얼굴은 모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까만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다부진 어깨와 가슴팍, 그리고 우람한 팔뚝이 말해 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운동선수거나, 적어도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임을.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이 낯이 익은데.'
모자 속에 가려져 언뜻언뜻 드러나는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반갑게 통성명이나 할 만큼 평화로운 상황은 아니니까.
'강의 별로 수강 인원 제한이 있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 먼저 고르자 싶어, 강의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 기초 검술 (수강 완료)
▣ 카리스마 리더십
▣ 잡식 요리 교실
지난번, 그러니까 '예비 선별자'였을 때도 있었던 과목은 여전히 떠 있었다.
'기초 검술' 제목에 가로줄이 그어져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수강한 과목을 한 번 더 들을 순 없는 모양.
시스템이 참 정확하다 생각하며, 이어서 나머지를 읽어 내려갔다.
▣ 명상(冥想)
- 마음이 어지럽나요? 분노, 회한, 질투, 그리움…… 끝없는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으신가요?
그런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을 가져 보세요!
- 수료 보상 : 명상(Lv.1) 스킬 개방
그중에는 이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처음 보는 과목들도 있었고.
▣ 극한의 인내
- 변해 버린 세상, 익숙한 곳이 아니라 본능을 억눌러 왔나요?
강의 한 번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더 이상 참지 마세요!
- 수료 보상 : 배변 욕구 제어(Lv.1) 스킬 개방
이런 게 꼭 있어야 하나 싶은 과목도 있었으며.
▣ 기초 창술
-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무기, 창(槍)!
- 자세부터 활용법까지 한 번에 습득해 보세요.
단, 보유한 무기가 있어야 수강 신청 가능합니다.
- 수료 보상 : 기초 창술(Lv.1) 개방
꽤 유용해 보이는 과목도 눈에 띄었다.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 잘 먹고 잘 자는 법
▣ 기초 방패술
▣ 어린이 음악 교실
……
많다.
너무 많다.
대부분 '기초'니 '초급'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긴 하지만, 강의 한 번으로 스킬을 받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석화처럼 운 좋게 얻은 것도 있지만, 가속처럼 특수한 조건이 필요한 능력들이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스킬이 아니다.
창술이나 사격술 따위의 스킬보다는…….
'가진 스킬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그걸 찾고 있다.
특히 하늘을 깨트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던 '반격' 스킬.
「반격(Lv.1) : 저항 스탯을 소모해 상대에게서 입은 피해량 일부를 돌려준다.」
「반격량=(소모한 스탯)%.」
그리고 아직 쓸 일은 없었던-그리고 앞으로도 없길 바라는- '소생' 스킬.
「소생(Lv.-) : 생명력이 모두 소진될 경우, 총 체력의 10%를 회복한다.」
「한 번 사용할 경우, 충분한 피를 흡수해야 충전되니 주의.」
「사용 가능 횟수 : 1/1」
상황을 뒤집어 줄 만큼의 위력을 가진 두 스킬을 가장 잘 쓰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총 체력이 많아야 돼.'
반격의 '피해량'도, 소생의 '10% 회복'도 모두 총 체력이 많을수록 점점 늘어나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 기초 체력 단련
- 무예의 첫걸음은 기초 체력!
강인한 신체에 강인한 정신이 깃든다.
천릿길도 한 걸음, 아니 한 바퀴부터!
- 수료 보상 : 체력 스탯 증가
미션 보상을 쓰지 않고도 체력을 늘릴 수 있는 '기초 체력 단련'이었다.
스윽!
[선택 완료.]
주저 없이 손을 뻗어 골라 버렸다.
문제는…….
스윽!
옆에 있던 남자도 똑같은 강의창을 선택했다는 것.
그것도 동시에.
— 파앗!
그러자 스크린에 숨겨진 단상 뒤편에 문이 나타났다.
하나도 아닌 두 개의 문이.
[강의실로 입장하세요!]
하필 이걸 골랐다고?
굳이 체력을 더 단련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체력과 근력에 모두 투자하는 타입인가, 생각하며 발을 떼려는 찰나.
"하."
뒤에서 짧은 한숨이 들려왔다.
"내 팬인가?"
황당한 물음도.
"……네 팬이냐고?"
뜬금없는 질문에 뒤돌아 놈을 살폈다.
그제야 떠오른 얼굴 하나.
'……아!'
생각났다.
저자가 누군지.
* * *
국가대표 축구팀 주장이자, EPL 명문 팀을 프리미어 리그 우승팀으로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평가받는 선수.
축구 선수 박공찬.
'한국 축구의 전설이었고, 전설이며, 전설로 남을 남자'라며 칭송받는 이 시대 최고의 선수인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그것도…….
['박공찬.' 스쿼트 420kg!]
[벤치프레스 300kg!]
[데드리프트 450kg!]
[축하합니다!]
[신체의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나란히 서서 3대 운동을 하게 될 줄이야.
['이은호.' 스쿼트 190kg!]
[벤치프레스 110kg!]
[데드리프트 215kg!]
[축하합니다!]
[기준치를 통과했습니다!]
박공찬이 '신체의 한계를 돌파'할 동안 난 기준치만 겨우 넘겼다.
당연한 결과다.
놈은 처음부터 일반인을 넘어서는 체력과 근력으로 시작했을 거고, 거기다 투자를 쏟아부었을 테니.
하지만.
"기죽을 거 없어. 나야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
……썩 기쁘진 않네.
['스테이지Ⅰ' 클리어!]
[체력의 바탕은 충분한 근력! '기초 체력 단련'의 수강 자격을 충족하였습니다.]
[기초 체력이 증가합니다.]
[체력 스탯(+1)]
미션은 똑같이 클리어했으나, 보상은 달랐으니.
[대상자 '박공찬.' 탁월한 성적으로 추가 스탯을 1 획득합니다.]
'탁월한' 성적이라는 게 상대적인 수치인지 절대적인 수치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둘 중 어느 쪽이건…….
['문'이 개방되었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왠지 오기가 생긴다.
"일반인치곤 나쁘지 않았어."
압도적인 차이에 티끌만큼의 의구심도 느끼지 않는 담담한 표정과.
[주의!]
[수강 도중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며, 원하면 언제든 포기할 수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뭐?"
"아, 오해는 하지 말고. 내 입장에서야 밑에 깔아 주면 좋으니까."
흘끗 보며 읊조리는 놈을 보니 더더욱.
['스테이지Ⅱ'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손……."
"먼저 간다."
가서 보자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