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조정에서 살아남는 법 162화>
Chapter 37. 관리자 이은호(2)
AM 09:37.
다음 미션을 20분가량 앞둔 시각.
【ROK-145구역 미션 종료】
파앗-!
미션이 끝나고, 안전구역이 사라졌다.
저기 있는 모두가 짧은 휴식과 저마다의 보상을 받았을 거다.
우리가 줄곧 그러했듯이.
하지만 스크린 속 생존자들은.
"……어? 왜 저러시는 겁니까?"
오히려 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방황했다.
"저, 저…!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재혁이의 말이 맞다.
생존자들이 모인 안전구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물들의 서식지가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저마다의 이빨을 드러내고, 급기야는 저들끼리 싸우기까지 하는 포식자들.
"포효 소리를 들었을 텐데…… 왜 안 움직이는 거지?"
생존자들은 상처와 알 수 없는 검댕이 뒤덮여 새까매진 얼굴로 고개만 들었다 숙였다 했다.
그리고.
털썩!
하나둘 눈치를 살피더니,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 폭삭 내려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폐건물 속으로.
"왜 저길……."
"어…… 저거 무너지면 위험할 텐데 말입니다!"
재혁이가 안타까움 반, 당혹스러움 반으로 하릴없는 손만 뻗었다 내렸다.
그러자 답을 해온 건.
"……비."
지은 씨였다.
"예?"
"비를 피하려고 하는 거예요!"
"예에?"
"뭔가 알고 있는 겁니까?"
갑자기 비라니.
무슨 소린가 싶어 묻자,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입을 떼는 지은 씨.
"조사국 OJT 때… 보고서를 봤어요. 바로 뺏겨서 다 읽진 못했지만, 분명 13지구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OJT 첫날, 조사국에서 첫 번째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보고서 복사라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다른 이들은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등 갖가지 잡일을 도맡아 했던 그날.
"저도 보고서…… 썼어요."
그때 분명 지은 씨가 보고서를 썼다 말하며 말꼬리를 흐리긴 했다.
얼굴이 좋지 않아서 언제고 물어봐야겠다 싶긴 했는데.
"지은 씨가 간 팀이 13지구 담당이었습니까?"
"…네."
"근데 일부러 말을 안 했다는 건…… 상황이 안 좋아서였고요?"
아랫입술을 깨문 지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 조정이 끝나면 검은 비가 내린다고 했어요. 문명을 부식시키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릴 비가."
"모든 걸 되돌린다뇨? 뭘로 되돌린다는 겁니까?"
"그것까진 잘……."
나도 모르게 쏘아붙인 질문에 지은 씨가 죄지은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아…! 대신 미션이 진행되는 동안은 괜찮다고 했어요. '경기장'이 더 우선이라고."
그래서였나 보다.
미션을 성공시킨 이들의 얼굴이 더 흙빛이었던 이유가.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어요."
잔해 속에서 기절한 듯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지만, 다들 바람만 불어도 금세 깨어나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
언제 또 마물이 들이닥쳐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겠지.
꾸벅꾸벅 졸다가도 홱 고개를 치들고는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그간 어떻게 지내 왔는지 비추는 듯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네요."
착잡한 심정으로 말하던 지은 씨가 '앗!'하며 스크린 속 누군가를 가리켰다.
넝마 사이로 드러난 팔다리며 갈비뼈가 앙상하고, 거뭇한 수염이 조선 시대 상놈처럼 자란 남자.
"저기, 주방장님도!"
"예? 아니지 않습니까? 주방장님은 살집이 꽤 있으셨지 말입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야위셨네요."
지은 씨의 말에 재혁이가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일주일 만에 저렇게 변한다는 건 죽어서 해골 병사가 되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처럼 보였으니까.
"말도 안 됩니다……."
남산 테러 때 처음 만났던 주방장.
그때 생각 없이 유리나 편을 들긴 했지만, 확실히 사과하고 나름대로 여론까지 만들어 줬다.
하늘 섬에서 날 도울 때도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모두 매끼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 주며 쌓은 신뢰 덕분이었을 거다.
하아.
먹을 걸 무엇보다 좋아해서 참관 미션 때도 먹방을 시도했던 놈인데.
지금은 저렇게 비쩍 말라서 해골 병사들보다도 못한 몰골이라니.
그것도…….
【다수의 참관자가 무난한 생존에 지루함을 느낍니다.】
【참관자가 이탈하였습니다.】
【참관자가 이탈하였습니다.】
……
이런 놈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희생되는 재료 따위가 되다니.
【'조사국 매의 눈'이 나약하고 쓸모없다며 혀를 찹니다.】
【'영업국 상남자'가 떨거지들만 남았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며 비웃습니다.】
"나약……."
속에서 열이 끓어오른다.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지금 뭐라고……!"
"침착해."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 뜨거워지면 날 생각도 안 나."
그럴수록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자, 여기.]
하로나가 떨떠름하게 내민 책자를 받아 들었다.
이어질 내 선택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과 약간의 기대감이 섞인 얼굴.
"감사합니다."
『13지구 구조 조정 미션 가이드북』
언뜻 봐도 몇백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하드커버북.
보고서 따위의 서류를 상상했으나 생각보다 더 자세하다.
미션의 개요. 난이도. 보상.
그 외에도 '경기장'의 조건 같은 사진까지 붙어 있어 풍부하다.
'가이드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
[10분 안에는 입력해야 돼.]
10분.
이 두꺼운 책을 쭉 넘기며 훑어만 보기에도 부족한 시간.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해. 내가 두세 개 추천해 줄 테니까 고르라고.]
"추천도 해 주십니까?"
[당연하지! 신입들 챙기는 게 내 보람인걸?]
이런 상황에서 적합한 미션을 발라내 고르기까지 하겠다니, 영 미심쩍은 모양이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못 한다 선언 하길 기다리는 듯도 하고.
하지만.
'쌍둥이에게서 얻은 제안서와 비슷해.'
세부 자료는 다르지만, 각 미션별로 알아보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거진 같다.
즉.
'대충 다 아는 얘기란 거지.'
펄럭-
▣ (No.17) 사냥
- 개요 : 사냥감을 처치하고 일당을 제출한다.
- 난이도 : 중상(中上)
- 보상 : 미션 보상 3포인트 및 복지 포인트 1,000점
간간이 우리가 직접 치렀던 미션도 보이고.
펄럭-
책장을 빠르게 넘겨 가며 동시에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그래. 뭔데?]
"소속 변경이 왜 페널티입니까?"
움찔!
미션 얘기인 줄 알고 눈을 빛내던 하로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뒤에 있던 남자는 흠칫 놀랐고.
"운영국도 결국 인사국이나 관리국처럼 똑같은 부서 아닙니까? 왜 미션 실패 페널티가 소속 변경인지 궁금한데."
[흐응- 그게 궁금해?]
"예."
페널티를 알아야 얼마나 필사적으로 덤벼들지가 정해지니까.
그래서 묻자 하로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회사에서 하는 업무는 다양해.]
"그건 알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현장에서 뛰는 부서는 힘들지만 그만큼 보상이 확실해. 진급도 가장 빠르고.]
그렇겠지.
영업국이나 관리국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관사니 뭐니, 올해의 사원 혜택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구센터는 몇 날 며칠을 달라붙어야 되긴 하지만, 대신 연구실적만 나오면 탄탄대로야.]
"인센티브가 잘 되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렇고, 센터 안에선 고속 승진도 가능해. 심지어…….]
하로나가 부럽다는 듯 양 갈래머리를 삐죽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특허나 상표권을 등록해서 놀고먹는 놈들도 있다더라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청구서만 내면 되니까. 그러니까 다들 목숨 걸고 연구하는 거지.]
그래서 센터 연구원들이 그리 간절해 보였던 걸까.
조금쯤은 이해가 간다.
[근데 또, 봐서 알겠지만, 조사국처럼 보상은 크지 않지만 업무 강도가 낮고 널널한 부서도 있긴 해.]
"모두 장단점이 있다는 거군요."
[아아, 모두는 아냐.]
"무슨 뜻입니까?"
[단점만 있는 부서도 있거든. 모두가 꺼려 하는 곳.]
모두가 꺼려 하는 부서라면 보통 일이 너무 힘들거나, 그에 따르는 보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그게 운영국입니까?"
하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빛 한 줌 없는 곳에서 대가 없는 노동만 바쳐야 하는 곳. 제 몸을 갈아 넣어야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그게 운영국이야.]
그러니까.
"이 미션에 실패하면……."
그런 곳으로 배치받는다는 거지.
뒷말을 줄였으나 입맛이 쓰다.
그리고 그건 지은 씨와 재혁이도 마찬가지인 모양.
둘 다 생각이 많은지, 그새 얼굴이 잿빛이 됐다.
[걱정 마! 무조건 성공시키면 돼. 팍팍 굴리라고!]
여기서 활기찬 건 이 방의 주인과.
스크린 속 상황을 경쾌하게 알려 대는 시스템 메시지뿐.
어쨌든.
"이걸로 하겠습니다."
탁!
가이드북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뭔데, 뭔데?]
그러자 눈을 빛내며 가이드북을 읽어 내려가는 하로나.
[흐응- 이거 얼마 전에 옆의 섬나라에서 했는데,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어.]
아는 미션인가.
[잘됐네. 안 그래도 한번 해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렇습니까?"
[계약직들 입장에서도 좋지. 몇 놈 잡아서 할복시켜 버리면 그대로 포인트로 돌려주니까.]
"할복…… 아아."
▣ (No.54) 지목 할복
- 개요 : 소환된 흡혈검이 세 명 이상의 지목을 받은 대상자의 복부를 관통한다.
전신의 피를 모두 흡수한 뒤 다음 대상을 지목할 수 있다.
단, 30분간 지목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종료된다.
- 난이도 : 하하(下下)
- 보상 : 할복한 인원수 한 명당 미션 보상 1포인트 및 복지 포인트 1,000점
할복의 탈을 쓴 다수결 살인 게임을 말하는 건가.
그거 말고.
"제가 고른 건 그 옆입니다. 55번."
[응?]
▣ (No.55) 반의반
- 개요 : 안전 구역이 반의반 크기로 줄어든다. 생존자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확실하게 인원을 줄일 수 있다.
- 난이도 : 중하(中下)
- 보상 : 미션 보상 2포인트 및 복지 포인트 2,000점
[이걸 골랐다고?]
"예."
[이건 반대쪽 옆 나라처럼 머릿수가 너무 많을 때나 쓰는 미션인데?]
"그렇습니까?"
[하, 이거면 저기 있는 놈들 인원 4분의 1로 줄 텐데. 괜찮겠어?]
괜찮지, 그럼.
왜냐하면…….
"등록합니다."
이게 제일 확실하거든.
다 같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 * *
'……배고파.'
주방장은 괴로웠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게 언제였던가.
하급 상점에서 파는 곰팡이 빵 말고.
머릿속이 하얗다.
빈속이 쓰리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는지, 이제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더 이상은 걷지도, 뛰지도 못하겠다.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어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는데 살아서 뭐 하겠나.
'내가…… 그때 왜…….'
주방장은 후회로 점철된 삶을 반추했다.
참관 미션 때 게걸스럽게 먹다 남긴 스파게티 소스.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남긴 라면 국물.
하다못해 30년 전에 먹다 남긴 어머니의 된장찌개마저 아른거린다.
"음식 남기면 지옥 가. 알지?"
"지옥?"
"그래! 지옥 가면 남긴 음식 다 섞어서 먹어야 돼."
"오! 그럼 아이스크림도 남길래! 지옥 가서 먹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면 그때 왜 볼기짝을 때려 가며 먹이지 않았느냐 원망하리라 다짐할 정도.
하지만.
'중급 상점…… 업그레이드하면…….'
덩치들이 말했었다.
중급 상점에는 하급 상점과 달리 멀쩡한 음식들을 판다고.
더 이상 눈이 돌아가 상한 우유나 곰팡이 핀 빵 따위를 먹고 그대로 게워 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서 상점 업그레이드 비용 1만 점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었는데.
[청구서가 도착했습니다.]
[정산을 시작합니다!]
조금 모았다 싶으면 청구서가 날아오고, 또 좀 모았다 싶으면 날아왔다.
결국 일주일이 지난 지금, 손에 남은 건 고작 3천 점.
'……버틸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는 와중 들려온 안내 방송.
[ROK 구역 계약직 사원분들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10시 정각부터 다음 미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휘청-
주방장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일어섰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시체처럼 힘도, 뭣도 없이.
[안전 구역으로 이동하세요!]
하지만 힘겹게 도착한 안전 구역은.
'원이…… 점점 줄어?'
겨우 들어왔다 싶으면 줄어들고.
또 겨우 비집고 들어가면 또 줄었다.
그리하여 밖으로 떨어져 나가 버린 사람들은.
철컥!
앙상한 팔로 창칼을 들었다.
비키라고, 같이 살자고 위협할 힘도 없어, 말없이 날붙이를 들이밀었다.
'…….'
주방장은 제 목에 들이밀어진 차가운 칼날을 느끼며, 저 또한 손에 쥔 식칼을 바투 잡았다.
찌를까.
살려면 찔러야 한다.
하지만.
'……찌르면 끝이야.'
사람 피를 봐 버린 칼로는 다신 음식을 만들 수 없을 거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을 때.
— 띠링!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
[새로운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꿈결처럼 나타난 상자.
'……어?'
▣ 라자냐 정식
- '서방의 미식 여행' 특제 요리. 얇은 라자냐 면을 여러 겹 쌓고, 그 사이사이에 각종 야채와 소스를 넣어 오븐에 구웠다.
특별한 재료는 없지만 포만감을 높여 준다.
- 섭취 시 1시간 동안 체력 회복 속도 1% 증가
속에 든 도시락을 본 주방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 띠링!
또다시 들려온 알림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은호》엎드리세요.
잠깐만, 누구라고?
아니, 그보다 미션 중에 갑자기 엎드리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으려는 순간 돌아온 대답.
《이은호》라자냐처럼.
'라자냐처럼…….'
……여러 겹 겹쳐서?
'!!'
"주모오오오오옥!"
주방장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