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는 법-212화 (210/317)

<구조 조정에서 살아남는 법 212화>

Chapter 46. 제보(3)

[……그럼, 금일 전략 보고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콜로세움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회의실.

1인용 단상 뒤에서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기나긴 보고의 마무리를 지었다.

노성도 혀 차는 소리도 없었던 무난한 보고였다.

영업국 실적 발표 중간에 숫자 하나가 틀렸다는 걸 회장님께서 발견하시긴 했지만.

[쯧.]

인사국장은 회장님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영업국장을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더 있어 봤자 꼴 보기 싫은 국장들 면상이나 봐야 한다.

그 생각에 서둘러 회의실을 떠나려는 순간.

[승기(僧祇).]

뒤통수를 덮치는 꺼끌한 음성.

관리국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관리국장은 그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속 또한 묵직한 사내.

용건 없이 말문을 트는 가벼운 인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스슷-

저도 모르게 손끝에 어둠을 불러 모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회장님께서 떠나지 않으셨다.

그걸 알면서도 긴장이 되는 까닭은, 눈앞의 사내가 그만큼 강한 적수라는 걸 알기 때문일 터.

모두가 손에 꼽는 호적수.

하늘의 하늘.

그가 꺼낸 용건은.

[노사협력팀…… 이었나?]

움찔!

[내 눈여겨보던 아이가 있었거늘.]

[…….]

누구냐 물을 것도 없다.

그놈이겠지, 분명.

[그대 밑으로 갔더군.]

이은호.

지독하게 끈질기고 지독하게 건방진 놈.

그러나 곧 그 천박한 고개를 숙이고 제 발바닥을 핥게 될 놈.

……이거늘.

[넘기게.]

[뭣이?]

관리국장이 헛소리를 해 댔다.

[그따위 소꿉장난이나 하며 썩을 인재가 아님을 알지 않나.]

[……소꿉장난이라니?]

하마터면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소리칠 뻔했다.

[무례가 과하군.]

[어차피 그대 조직은 그놈을 온전히 품기 힘들 터.]

[허?]

[감당할 수 없는 걸 삼키려 들면 속만 터지는 법일세.]

힘겹게 표정을 꾸며냈지만 얼굴 근육이 참지 못하고 절로 꿈틀거린다.

이를 꾹 참으며 답했다.

[헛물켜지 말게. 내 선에서 해결할 터이니.]

그렇게 이를 빠득 갈며 답한 순간.

[이런.]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음성.

꽉 막힌 실내에 불어올 리 없는 봄바람이 공간을 휘감았다.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긴장감에.

[!!]

[회장님.]

늘 온화하던 인사국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늘 딱딱하던 관리국장의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신사는 둘의 생존전략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물어 온 건.

[궁금하군. 그대들이 이리 탐내는 아이가 누군지.]

[!!]

몇 번의 대립 후, 좀처럼 언쟁을 피하던 국장들이 나서서 찾을 정도의 인물.

그치가 누구냐는, 그런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비서.]

[예, 회장님.]

[노사협력팀의 이은호라는 친구가 있다더군. 조사해 보게.]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내린 지시였다.

뛰어난 인재라면 초장부터 잡아 두는 게 맞으니까.

엉뚱한 생각을 하는 놈이라면 더더욱 잡아 둬야 맞고.

[……회장님께서 하사하신 부서 선택권으로 신생 팀을 만든 것만 봐도 상당한 모략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덕체를 두루 갖추고 있어…….]

인재냐, 반골이냐.

그건 아랫것들의 평가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날 좋을 때 한 번 불러도 괜찮겠군.]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장은 수많은 세월, 수많은 인사를 봐 온 노장이었다.

인재라 믿었던 치가 등에 칼을 꽂은 적도.

반골이라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던 치가 결국 든든한 오른팔이 된 적도 있었다.

[보면 알겠지.]

그렇기에 노장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만을 믿었다.

그런데.

[……어딜 들어가 있다고?]

팀장 부임 일주일도 안 돼서 옥에 들어가 있는 놈은…….

어찌 판단하면 좋을꼬?

*   *   *

감찰국.

지금껏 비리를 저지른 놈들을 고발만 했지, 조사 대상으로 끌려온 건 처음이다.

[이은호 씨,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불법 영업을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것도 이런 멍청한 이유로.

"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새끼가, 좋게 좋게 말하니까…… 여기 증언도 있어! 이래도 발뺌할 거야?]

까만 정장 차림의 감찰관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조사실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모르긴 몰라도 밖에 있던 직원들이 미어캣처럼 죄다 목을 쭉 빼고는 눈치를 살피고 있을 게 분명하다.

[쟤가 이은호야?]

[어. 3과 실적 올려 줬다는 신입. 이제 팀장이시란다.]

들어올 때부터 난리였으니까.

뭣 때문에 등장부터 무관심이 아닌 적의를 품고 있는 건가 궁금했는데.

[그 익명으로 포상까지 받은 놈? 저 새끼 맞아?]

[그렇다는데? X발, 그거 땜에 우리 인센 밀린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네.]

감사국 OJT 때 미래연구센터의 비리 연구원들을 깡그리 잡아 처넣은 게 나라는 걸 눈치챈 모양.

그 실적에 밀려서 받기로 한 인센티브를 못 받게 되었던 건가.

이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걸 뺏기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긴 하지, 이해한다.

하지만.

[X발, 내 말 안 들려?]

"그럴 리가요. 이렇게 소리치시는데."

[뭐?! 이 새끼가, 입은 살아 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괘씸하네.

'어떻게 갚아 준다?'

그렇게 감찰관의 윽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빠진 사이.

[건방진 놈, 증언도 있으니 빼도 박도 못…….]

"들어 보죠."

[……어?]

"그 빼도 박도 못한다는 증언, 들어 보겠다고요."

당당하게 묻기에 팔짱을 척 끼며 답했다.

그러자 당당한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잠시 멈칫하던 감찰관이 얼굴에 비웃음을 띠고는 무언가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은호? 그려! 기억하지!]

[아주 돈을 긁어 갔지 그래?]

그리고 흘러나온 노인들의 음성은.

[에잉, 그 코딱지만 한 놈이…… 손이 어마무시하게 맵더라니께?]

[……다른 영감들 안 델꼬 오믄 얄짤없댔지!]

'음?'

짧고, 모호했다.

[들었지? 네놈이 고객들을 협박해서 불법적으로 사게 했다는 증거잖아!]

"……이게 답니까?"

[그래!]

'교묘하게 짜깁기했네.'

증언에서 말했던 에잉, 그 코딱지만 한 놈.

이건 애초에 내가 아니라 웨이다.

어르신이 웨이의 이름을 잘못 알아듣고 부른 것.

그리고 '손이 맵다.'

이건 3만 점 이상 구매 시 서비스했던 '도수치료' 이야기고.

마지막으로 '다른 고객을 데려오지 않으면 얄짤없다'는 건…….

친구 소개 이벤트 혜택을 받으려면 친구를 소개해야 한단 말을 저렇게 갖다 붙인 것 같은데.

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따위 증언이 사실일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둘 중 하나겠네.'

첫째, 증거 같은 건 상관없을 만큼 이미 만들어진 판이거나.

둘째, 겁을 줘서 내 자백을 받아 내야 할 만큼 허접한 판이거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띠링-

지금 나타날 리 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메시지?'

흐음.

감찰 조사에 끌려왔는데 메시지는 자유자재로 주고받을 수 있다라.

'이거…….'

[뭐, 뭐야? 왜 웃어?]

시스템이 시킨 게 아니네.

[어?! 내 말이 우습냐고!]

영장도 없이 끌고 온 거지, 지금?

"목이 타네요."

[뭐, 뭐?!]

"물 좀 마시겠습니다."

[허어? 이 또라이 새끼가!]

잠시 시간을 끄는 사이 메시지를 읽었다.

발신자는 감찰국 사수, 극.

《극》걱정 마라.

《극》일단 우리 과로 사건 가져오려고 얘기 중이다.

옆 팀의 행태에 화가 났는지,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진 모습이었다.

《극》버러지 같은 새ㄲ…… 크흠, 미안하다.

《극》아무튼 그 팀에서 떼를 쓰곤 있는데 곧 과장님이 직접 가신다고 했으니 해결될 거다.

극이 있는 현장감사3과로 사건이 이관되게 되면 일 처리는 술술 풀릴 거다.

아마 이 말도 안 되는 제보 자체가 무효처리 되지 않을까 싶다.

《극》다만 익명의 제보자가 누군지는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군.

《극》공식으로 들어온 제보건 자체가 없어.

하지만.

《나》짐작 가는 놈은 있습니다.

《극》그래? 누구지?

이거, 그냥 없던 일로 하기엔 아깝다고.

그냥 넘어가면 비슷한 짓거리를 또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러니까.

《극》어쨌든 잘 됐군. 그럼 과장님께 말씀드려서…….

《나》근데 아직 물증이 없어서요.

《나》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극》기다려 달라고?

아예 싹을 뽑아 버려야지.

《나》확실하게 가려고요.

《나》다신 이런 일 없도록.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겠다고.

"누굽니까?"

[이 증언을 한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그건 관심 없고.

"사주한 놈이 누구냐고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0.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돌아오는 대답.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너무 빠르잖아.

"보통 무슨 소리냐고 물을 텐데. 대답이 빠르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니까 그렇지.]

이번엔 너무 느리다.

대처하는 것을 보니 이 자식, 연차도 애매한 것 같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점에서 이미 공식적인 행사도 아닌 듯하니.

뭐, 좋다.

제대로 된 답은 입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꿰뚫는 눈빛' 활성화!]

[지속 시간 – 00:00:03]

[재사용 대기 시간 – 12:00:00]

번쩍-

내 속에서만 느껴지는 열감.

그와 동시에 내 눈에만 보이는 빛기둥이 놈에게로 쭉 뻗어 나갔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머릿속에 울리는 말.

— 알고 묻는 건가? 역시 모호 놈 말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네. 이거, 좀 더 받았어야 했나?

모호라면…….

'전대 올해의 사원.'

소에주가 말한 대로다.

[거기다 그놈 밑에 있던 치들이 실적 가로채기다 뭐다, 신고해 버린 통에 솟아날 구멍도 없어 보이더군요.]

그 멍청한 놈이 제가 올해의 사원 자리를 뺏기 위해 불법 영업을 해 놓고, 내게 똑같은 죄목을 뒤집어씌운 거다.

혼자선 못 죽겠다 이거지.

'미리 준비해 두길 잘했네.'

그나저나…….

—이거, 좀 더 받았어야 했나?

좀 더 받았어야 했냐는 건, 뭔가 받긴 받았다는 뜻.

그 말인즉슨 눈앞에 이 자식도 한패란 소린데.

그럼…… 한번 흔들어 볼까?

"감찰국 현장감사4과 막(漠)."

[……!]

"맞지?"

흠칫!

처음부터 끝까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막(漠)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제3의 눈'으로 스킬까지 깡그리 털었다고 말할 순 없으니.

"글쎄."

조금 겁을 줘 볼까.

"어떻게 알았을까?"

《민여진》아저씨 괜찮아요?

《민여진》우선 지금 정리한 거 먼저 드릴게요!

추가 지령을 내릴 동안 시간은 벌어야 하니까.

《나》조사해 줄 놈이 하나 더 있어.

《나》감찰국 현장감사4과 막(漠). 직급은 대리.

《나》주로 봐야 할 건…….

*   *   *

영업국 VIP영업4팀 팀장…… 이었던 모호(模糊)는 기다렸다.

그 오만한 낯짝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직관하는 순간을.

'오기만 하면…… X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몇 번이고 생각했다.

권력에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본인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어쩌다 이런 꼴이 되고야 말았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은호.

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에게 잘못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철컥-

문이 열렸다 닫히고.

[증인들 불렀으니까 진술 마칠 때까지 들어가 있어.]

감찰관이 드디어 놈을 끌고 왔을 때.

'아.'

모호는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마침내 찾아온 복수의 순간.

희미한 불빛에 비친 이은호가 차가운 돌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야- 이거, 엄청난 우연인데 그래? 감빵에서 만나다니.]

얼굴.

얼굴을 보자.

그리 생각하며 다가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황량한 유치장 풍경만을 둘러보는 이은호.

겁나는 걸 감추고 싶은 거겠지.

그 또한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러했듯이.

"우연, 맞나?"

이은호가 꾸며 낸 게 분명한 침착함으로 물었다.

그래서.

스윽-

주저앉은 놈에게 침을 퉤, 뱉고.

속삭였다.

[아니지, 병신아.]

탄탄대로처럼 펼쳐져 있던 앞날에 재를 뿌려 버린 대가로.

[내가 누구 하나 잘되게 할 순 없어도, 누구 하나 X되게 만들 순 있거든?]

네놈이 쓰고 있는 침착함의 가면을 벗기고.

짓밟고.

산산조각 내 버리겠다.

[기대해.]

네놈이 팀장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혼자 죽으라고?

절대 안 되지.

[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줄게.]

그리 마음먹고 저지른 일이었는데.

"넌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나?"

[……뭐?]

스슷-

쇠창살 밖에서부터 비친 조명이 거둬 낸 그림자.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이은호는…….

"기대해."

웃고 있었다.

"다신 이딴 장난질 못 하도록."

섬뜩하게.

"지하까지 처박아 줄 테니까."

[……!]

부드러우면서도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날아오는 시선 모두를 찢어 버릴 듯 섬뜩한 눈으로.

[미, 미친 새끼…… 이 상황에서도 허세를 부려?!]

'왜…….'

왜 다리가 병신마냥 떨리는 거지?

분명 쥐뿔도 없는 허세일 텐데!

"그래. 확실히 기대되긴 하네."

쥐뿔도 없는 허세…….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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