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조정에서 살아남는 법 298화>
Chapter 61. 격의 증명(4)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들어온 탑.
철저한 계산하에 시작한 시험이었다.
「1. 불가살(不可殺) - 51.9%」
주식 증권을 찾는다.
전 회장이 갖고 있던 지분 51.9%를 획득한다.
그리고, 마지막 계획을 수행한다.
회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다신 주주들 손에 휘둘리지 않을 ‘마지막 계획’을.
[네가 바란 상이 이것이더냐.]
하지만 이 상자는.
‘너무 큰데?’
전 회장의 기억 속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봤다.
얇고 평범한 봉투였다. 이렇게 커다란 상자가 절대 필요할 리 없는.
그래서 안에 뭐가 들었나 했더니.
끼익-
이유가 있었다.
[받거라.]
상자를 열자 처음 보인 건 덮개.
상자 내부가 아닌 덮개 안쪽에 서류가 있었다.
고급진 유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갈색 서류 봉투.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군청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상자 내부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속에 움푹 파여 있는 일곱 개의 홈과 그 속에 알알이 박힌 무언가.
‘!!’
자세히 보니 그건 붉은 비단 따위로 싸여 있는 손바닥보다 작은 원통과 그 속에 자리 잡은 구슬이었다.
“이건…….”
일곱 개의 원통.
일곱 개의 구슬.
그중 붉은색 구슬을 집어 들자 반투명한 창이 뜬다.
▣ 까다로운 불꽃
아이템창은 빈약했다.
이름만 간신히 보여 줄 뿐, 설명도, 효과도 없었다.
그래도 이름이나마 보고 짐작해 볼까 했지만…….
▣ 까다로운 불꽃
▣ 교만한 늪
▣ 억센 벼락
▣ 발 빠른 신록
▣ 성마른 폭우
▣ 몰아치는 파도
▣ 경쾌한 죽음
‘……전혀 모르겠는데.’
“이게 뭡니까?”
[탑의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자 굴레이니라.]
선물이자 굴레라.
얼핏 양립하기 힘든 두 단어가 같이 나오자 좀 찝찝하긴 하다만.
[기도하라. 그리하면 힘을 빌려줄 것이다.]
‘기도.’
이어진 말을 듣고 단박에 이해했다.
[다만 아이야.]
“예.”
[한 번으로 족할 것이니, 부디 취하진 말지어다.]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양반들이 널 빌리게 될 것이니라.]
기도하면 힘을 빌려준다는 존재는, 지금껏 몇 번이고 등장했던 고대의 신들일 터.
다만 그 힘에 매료되었다간 나 자신을 잃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눈앞의 수호룡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의 힘이란 분명 넋이 나갈 만큼 강렬할 테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수호룡의 입장에선 굳이 해 주지 않아도 될 조언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일곱 개의 구슬을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하나하나의 구슬들이 스르륵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 내 손이 향한 곳은 뚜껑.
달칵-
서류가 들어 있는 유리판을 꺼냈다.
▣ 주식 증권
- 소유주 : 불가살(不可殺)
- 지분율 : 51.9%
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서류.
꽤 고급스러운 소재에 테두리에 금박이 발려 있으나 별것 없어 보이는 단순한 종이.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별것 없지 않았다.
[회사가 진정 너희들의 것이 되겠구나.]
“……예.”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혁명의 마지막 방점.
이게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갈 때다.
그리 다짐하며 마찬가지로 인벤토리에 보관한 뒤, 상자를 닫으려는 찰나.
달그락-
서류가 들어 있던 유리판 뒤, 움푹 파인 공간에 들어 있던 동그란 구체가 달그락거렸다.
▣ 태초의 기억 구슬
- 죽지 않는 자가 남긴 기억의 편린.
지구를 본떠 만들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지구본이었다.
푸른 바다와 녹지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고, 그 위에 희뿌연 구름들이 연기처럼 감싸고 있는 행성.
지구.
‘그 꼬맹이 구슬은 이것보다 훨씬 작았는데.’
수호룡의 시선이 지구본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심층 면접 - 종료】
【평가 - 입력 중……】
잠시 후,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메시지.
[축하합니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열쇠를 획득합니다.]
기다렸던 이야기.
그리고 길었던 시험의 마지막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느릿한 숨을 토해 냈다.
[자, 이제 다 끝났다. 남은 건…….]
일렁-
순간, 또 다시 떠오르는 부연 연기.
[마무리로구나.]
‘음?’
“은호오오오오오씨이이이이이이…….”
느려지듯 멈춰 버린 사람들.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동굴.
─── !
아니. 세상이 물든 게 아니었다.
내 눈동자가 핏빛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갓 뱉어 낸 핏덩이처럼 시뻘건, 마치 내 손에 명을 다했던 불가살의 그것처럼.
‘!!’
오른쪽 눈이 뜨겁다.
활활 타는 불씨를 눈에 집어넣은 것처럼 타들어 가는 느낌.
동시에 내 몸이 내 몸으로부터 쑥 빠져나와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설마…… 남겨 둔 건가?’
불가살의 망막을 찢어발긴 검강이 용골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갔을 때.
파천검이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 놈의 머릿속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때.
그때 내 눈에 비쳤던 고룡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이은호!]
만약 그때 제 영혼 한 조각을 내게 박아 넣었다면.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안배해 둔 거라면 말이 된다.
[불가살, 그자는…… 이 안에 있단다.]
이름 모를 신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
‘이 안’이 탑이 아니라 내 몸속을 말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간에.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끝을 모르는 저열한 욕망.
죽음 이후에도 놓지 못한 집착과 탐욕에 몸서리치는 사이.
[‘기억의 파편’을 흡수합니다.]
파아아아아아앗-
붉은빛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 * *
빛에 휩싸인 채 돛단배처럼 흘러간 곳은 어느 언덕.
몇 번이고 정신을 잃으려는 걸 겨우 붙들고 선 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긴…….”
[‘기억의 파편’을 흡수합니다.]
불가살의 기억이 날 데려다 놓은 곳.
분명 악귀가 들끓는 지옥도나 다름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천국?”
시냇물에는 물 대신 꿀이 흐르고.
나무의 동서남북에 각기 다른 과실이 맺히고.
내리쬐는 햇빛과 불어오는 실바람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언덕.
옛 신화 속에 나오는 동산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곳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곳 사람들은 기도했다.
““부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신의 자애가 각종 산해진미를 내려 주고.
““부디 아이들이 마음 놓고 꿈꿀 수 있는 잠자리를…….””
신의 관용이 굳건한 지붕을 내려 주며.
““부디 편안한 천과 옷가지를…….””
신의 은애가 몸을 두를 천을 내려 주길 바랐고, 그 많은 기도는 이루어졌다.
언제나.
““오늘도 감사합니다.””
지옥보단 천국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머릿속을 울리는 말소리를 듣기 전까진.
[저놈은 곧 죽는다.]
‘!!’
불가살.
전 회장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흘렀다.
동시에, 기도하던 사내 하나가 풀썩 쓰러진다.
“끄윽…….”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서 기도하던 사내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굳어 간다.
허리가 굽고, 팽팽하던 얼굴이 쭈글쭈글하게 변하고, 팔다리가 뻣뻣해진다.
“갑자기 왜…….”
[정해진 수명이 다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묻자, 불가살이 답한다.
[수명이 삼십 년은 될까. 아이들을 순식간에 자라고, 청년이 되고, 곧 늙어 죽지.]
놈의 말대로였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눈 깜짝할 새 쓰러진다.
제 건강과는 상관없이, 신의 뜻대로 태어나고 신의 뜻대로 살다가 신의 뜻이 다하면 죽는다.
““비나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그저 잠깐 살다 가는 바람.
기도하면 모든 걸 손에 쥐여 주지만, 대신 짧은 생이 끝날 때 먼지 한 톨도 가져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참으로 끔찍한 세상이지 않은가.]
……아.
[내가 바꾸었다.]
알았다.
놈이 하필 이 기억 속으로 데려온 이유.
[최초의 신살(神殺). 윤회를 멈추고, 신을 가두고, 인류를 구원한 최초의 혁명이었단 말이다.]
저 또한 반골(反骨)이었다 말하고 있다.
제가 만든 회사가, 사실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비루한 것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지독한 자기 합리화.
[내 힘은 곧 사라진다. 그리하면 저 멍청한 신들이 다시 깨어날 터. 세상은 미개한 신들의 시대로 돌아가 버린다. 그를 원하나?]
끝없는 변명과 포장.
[나는 너를 안다. 너 또한 이런 세상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설득과 회유.
[이 몸을 되살리거라. 그게 네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지니.]
그리고 협박을 위해.
“……그러니까, 네가 사라졌기 때문에 고대의 신들이 깨어나게 생겼다, 이건가?”
[그렇다. 그리되면 이 세상 또한 미개한 신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글쎄.”
하지만 듣지 않는다.
놈의 회유고 협박 따위가 먹힐 리 없다.
“그건 모르지.”
이제 이 회사를 이끄는 건 놈이 아닌 나.
놈과 내가 다르고, 직원들의 마음가짐이 다르고, 지금껏 살아왔던 양식이 다르다.
그럴진대 신들이 깨어난다 하여 여태 우리가 쌓아 온 역사와 지식이 없던 것이 될까.
들끓는 자유에의 갈망이 한순간에 사라질까.
[아둔한 것. 아랫것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그런 이들도 있겠지.”
물론 있을 거다.
놈의 말처럼 기도만 하면 달콤한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그를 위해서라면 잠깐 살다 바람처럼 흩어져도 상관없다 여기는 자들이.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내 결정은 같다.
“어떤 삶을 선택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다.”
[그런……!]
“신들도, 너도, 그리고 나도…… 그걸 강제할 권리는 없어.”
강제로 배부른 삶도, 강제로 배곯는 삶도 거부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놈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은 삶을 거부한다.
“그러니까.”
밭을 갈아도 내 손으로.
밥을 지어도 우리 힘으로 하겠다 말한다.
“이만 꺼져라.”
[……!]
목소리가 멈춘다.
분노를 삭이는 것도, 마지막 남은 무언가의 끈을 끊어 내는 것도 같은 침묵.
[망할 것이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너 또한 멍청한 신들의 종이 되어 발바닥을 핥을 것이다.]
느껴진다.
마지막 남은 불가살의 영혼 조각이 스스로를 활활 불태우는 감각이.
“쓸데없는 걱정을 오지랖이라고 하지, 보통.”
그러나 상관없다.
[……네놈은 변함이 없군.]
“내가 좀 일관성이 있는 편이라.”
[늘 뻔뻔하고, 늘 당당해. 그 낯짝을 내 오래전에 찢어 놨어야 했거늘…….]
조각만 남은 힘.
고작해야 눈동자 하나에 의탁하고 있는 상태로는 내 상대가 못 된다.
[네놈은 강하다. 지금 내 상태론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할 만큼. 허나…….]
눈동자에서 시작된 불꽃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뇌 내의 회로가 불타는 듯, 탄내가 코를 찌른다.
[나는 죽지 않는───]
“10포인트로 석화 강화.”
하지만, 그뿐.
콰드드드드득-
눈동자에서부터 시작해 두개골을, 그 위의 피부를 타고 흐르는 금강석을 느낀다.
단단하게 굳은 머리.
정확히는 오른쪽 눈동자에 손바닥을 대고, 방출한다.
“청천벽력(靑天霹靂).”
번뜩이는 빛. 손바닥에서 눈동자까지를 관통하는 벼락. 혈관을 질주하는 스파크.
“사라져라.”
[……!]
파아아아아아앗-!
놈의 세상이 눈을 감았다.
완전히.
* * *
[은호 씨?! 괜찮으세요?]
다시 눈을 떴을 땐 지은 씨의 품속이었다.
[제가 쓰러졌습니까?]
[네, 잠시……. 어지러우시면 좀 더 누워 계세요.]
[아닙니다.]
[그래도…….]
누워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격(格)이 상승합니다.]
[80 → 100%]
[승격(昇格) 완료.]
다시 태어난 듯 심장이 뛰고.
[고유 능력이 경지를 넘습니다.]
[심안(心眼)을 개안합니다.]
[미래시(未來視)를 얻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두웅-
귓가를, 머릿속을 때리듯 울리며 점점 다가오는 큰북 소리와.
두웅-
잘게 울리는 종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 낸 하모니가, 얼른 일어나라며 재촉하는 것 같아서.
[마지막도 어떻게든 잘 이겨 냈군.]
태초의 수호룡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거라. 너의 세계로.]
그리곤 ‘문’을 열었다.
들어올 때와 똑같이, 벽이 아닌 바닥에 그림처럼 그려진 문을.
‘나의 세계.’
그 말에 뒤돌자, 지은 씨와 재혁이가 말없이 끄덕이며 시선을 맞춰온다.
[가요, 우리.]
[이제 돌아갑시다!]
그래.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 될 ‘회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