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진 회장 (3)2021.08.21.
상황을 지켜보는데 난데없이 진 회장이 나를 봤다.
“한지감 씨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자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면서 혀가 꼬였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진 회장이 더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 나를 채근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허벅지를 꼬집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저는 진 회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단, 파산이 아닌 진 회장님의 투자자로서의 면목을 강조한다는 전제하에서요.”
“내 말이 바로 그런 말이라니까.”
진 회장의 맞장구에 힘을 얻어 말을 덧붙였다.
“前 대통령 추징금 환수 경매 당시, 삼사천에 팔리던 물건들이 삼사억에 팔렸다고 들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였던 사람의 소유였다는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해석됩니다.”
“시연아. 이것 봐라. 한지감 씨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니.”
이 비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사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거기에다 ‘한때’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가릴 수 있는 건 가리는 것이 좋기에, 나도 ‘한때’라는 단어는 뺏으면 한다. 내 의견을 말할 틈도 없이 진 회장이 끼어들었다.
“‘한때’라는 단어는 반드시 넣어야 해.”
“왜 그래야 합니까?”
“…….”
진 회장은 심통 맞은 표정을 지으며 이 비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도균이 끼어들었다.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당장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이니 회의를 한 후 의견을 전달드려도 될까요?”
“그러도록 해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원하는 제목이 아니면 위탁하지 않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도균의 대답을 들은 진 회장이 일어서자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 진 회장이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들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여기들 있어요.”
“그럼 저만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김도균이 나서는데도 진 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럽다고 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저는 배웅하겠습니다.”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도 이 비서는 일어섰고, 진 회장은 그런 이 비서를 말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가자 김도균과 팀장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김도균이 서정선을 보고 물었다.
“서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이 비서님과 같은 입장이에요. 묻어가는 것이 최대한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때’를 뺀다고 해도 묻어가는 것이 최선일까요?”
“오십보백보잖아요. 이미지 타격은 어쩔 수 없어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옥션은 고급스런 이미지를 사고 파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파산했다는 이미지를 광고하듯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 팀장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우리 회사를 이용하는 주요 고객의 연령은 50대예요. 그것도 성공한 50대.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사 이미지까지 나빠질 수도 있어요.”
“이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을 받은 이 팀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저도 반대입니다. 지감 씨 말도 일리는 있지만, 대통령은 최고의 권력자 아닙니까. 하지만 투자자는 그 정도의 입지로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특별 경매로 진행해야 한다면 사전신청을 받아서 제한적 홍보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꼼수를 쓰자는 거군요.”
“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간을 좁힌 서정선이 이 팀장의 말에 반대했다.
“이것 때문에 그동안 저희가 구축해놓은 고급스런 이미지가 흔들릴 바에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도균이 상황을 정리했다.
“어떤 말씀인지 각자의 의견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여러분이 내주신 의견은 제가 다 정리해서 대표님께 보고 드리고 상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김도균은 팀장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올지라도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팀장들이 홀린 듯 모두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예.”
확실히 김도균은 상황을 잘 정리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반발심이 생길 만한 것도, 김도균이 하면 생기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팀장들이 회의실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나가야지. 일어서는데 김도균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한지감 씨, 잠깐 나 좀 보죠.”
“네.”
왜 갑자기 보자고 하지?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태연하게 그 앞에 섰다.
“오늘 반차내고 쉬세요.”
이건 신종 갈구기인가?
“왜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우리 회사에서 오래 일하고 싶습니까?”
“네. 당연하죠.”
“그럼 건강관리 먼저 챙기세요.”
아까 머뭇거렸던 것을 피곤 탓이라 여긴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한지감 씨가 괜찮아도 내가 괜찮지 않아요. 메이저 경매 때문에 계속 무리하고, 끝나고 나서는 진 회장 위탁 진행하려고 또 무리했잖아요.”
“총괄님…….”
이렇게 생각해주다니, 감동이다. 나를 보고 그러지 말라는 듯 김도균이 손을 올렸다.
“한지감 씨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같이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알겠습니다. 월차내고 쉬겠습니다.”
서류를 챙겨 나가던 김도균이 뒤돌아 한마디 더 했다.
“건강관리도 자기 관리의 일환입니다. 젊다고 자만하지 마세요.”
“네. 총괄님.”
언젠가 나도 김도균처럼 말해줄 수 있는 상사가 되고 싶다. * 눈치를 보면서 김도균이 팀장들의 의견을 전달했다.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야.”
“그렇네.”
끄덕이던 황덕현이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이 비서를 봤다.
“근데 이 비서,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야?”
김도균이 눈치를 본 사람은 황덕현이 아니라 이 비서였다. 마른 침을 삼킨 이 비서가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저도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지?”
“어쨌든 저와 진 회장님의 인연으로 인해서 이 일이 시작된 거지 않습니까.”
“맞지. 하지만 결정에 이 비서의 의견은 영향을 미치지 못해. 그러니까 그만 나가주겠어?”
부드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최후의 경고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비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이 비서가 대표실을 나가자 김도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눈치 보여서 죽는 줄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이 비서 뒤끝이 긴 편은 아니거든.”
“글쎄. 그건 형의 착각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싱긋 웃으며 차를 마시는 황덕현을 보며 김도균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팀장급 의견은 알겠어. 네 의견은 어때?”
“부정적이었는데…….”
“었는데?”
“지감 씨 이야기 들으니까 일리가 있어서 좀 흔들리네.”
“지감 씨?”
풉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황덕현 때문에 김도균은 인상을 썼다.
“뭐가 웃겨?”
“언제 그렇게 한지감과 친밀한 사이가 되셨을까아?”
놀리는 투가 거슬렸지만 일하는 중이기에 한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형. 일 이야기 안 할 거야?”
“알았다. 알았어. 한지감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투자자인 면모를 강조하자고 했어. 前 대통령 환수 경매를 들면서, 최고의 투자자인 만큼 더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하더라구.”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지.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이지만 투자자는 인식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위험성이 크다는 그런 생각 말이야.”
김도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팀장도 같은 지적을 했어.”
“확실히 위험성이 있긴 하네. 고객들이 반감을 가졌을 때 이미지 추락까지도 이어질 수 있어.”
“그게 걱정이야. 이런 선례가 없었으니까.”
“런던에서도 이런 사례가 없었나?”
“리먼 브라더스 정도지.”
하지만 진 회장은 개인이기에 리먼 브라더스와는 또 다르다. 황덕현이 얕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당장 결정은 못하겠어.”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좀 더 생각해 봐. 형 결정을 믿을게.”
“그래.”
두 사람이 차를 즐기는 바람에 대표실은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을 깬 것은 황덕현이었다.
“한지감, 경매사 시키면 어떨 것 같아?”
“아직 입사 1년도 안 된 사람에게 웬 경매사야.”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하고, 목소리도 좋잖아. 임기응변에도 강한 편이고.”
“글쎄. 그건 좀 두고 봐야 할 것 같은데.”
“보조 경매사 시키면서 천천히 두고 보면 되잖아.”
“너무 일러.”
눈을 가늘게 뜬 황덕현이 장난스레 말했다.
“‘지감 씨’라고 부르는 분이 왜 이러실까?”
“형. 정말 이러기야?”
“알았어. 알았다고.”
김도균이 언짢아 보이자 황덕현은 눈치를 보며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황덕현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지감 씨’라고 놀린 원인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김도균은 한지감이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팀장들 앞에서 팀을 선택해야 할 때도 그렇고, 시선이 몰리는 것을 꽤나 부담스러워했다. 그동안의 그런 반응들이 머릿속에 모아지면서, 어쩌면 그게 하나의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직 반신반의한 상태였지만, 만약 그렇다면 많은 눈이 집중되는 경매대에 세우는 것은 옥션을 위해서도 한지감을 위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 반차를 쓴 나는 곧장 진 회장의 집으로 갔다. 궁전 같던 예전 집과 달리, 10평도 되지 않은 원룸이 이제 진 회장의 집이었다. 나를 보며 진 회장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타협을 없다고 말했을 텐데.”
“회장님을 설득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궁금해서요.”
“뭐가?”
퉁명스런 물음에도 나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한때’라는 단어를 왜 넣어야 하는지 이 비서님이 여쭤봤는데 답 안 해 주셨잖아요.”
“답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거야. 전화로 물어보면 될걸 이렇게 와서 물어야겠어?”
“그래야 회장님이 부담을 느껴서 한번이라도 더 말해줄까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넉살좋은 태도에도 진 회장의 견고한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부담을 느껴서 더 말을 안 해 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봐.”
“말씀해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대표님, 총괄님을 한 번이라도 더 설득하잖아요.”
뭐가 그리 못 마땅한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내 질문에 답해봐. 마음에 들면 답해 주지.”
“그럼 전 솔직한 대답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해야겠네요.”
분위기를 풀자고 한 멘트였는데 더 냉랭하게 만들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네 머리로는 내 마음에 답을 만들어낼 수 없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깨깽, 나는 자세를 낮췄다.
“왜 내 소장품을 위탁받고 싶은 거지?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인가?”
“위탁받고 싶은 이유는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가 맞아요. 작품 수가 많아서 더 그렇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게 특별 경매를 원하는 이유는 아니죠.”
“그럼 뭔데?”
나는 진 회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생각을 전했다.
“진영대라는 투자자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세상은 미술 투자자에 별로 관심 없어.”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렇겠지만, 저희 고객들은 이미 미술 투자자예요. 궁금했을 거예요. 어떻게 회장님의 투자가 항상 적중했는지.”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진 회장 마음에 들기는 틀린 것 같아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한국의 찰스 사치’라고 불리시잖아요. 하지만 저는 어울리지 않은 별명이라고 생각해요.”
“어울리지 않다, 어째서?”
“찰스 사치는 미술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회장님은 영향력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기보다, 예측이 맞아떨어졌어요.”
이를 악문 진 회장이 나를 노려봤다.
“한마디로 영향력이 없다? 돌려 말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
“아니…….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찰스 사치도 하지 못한 걸 진 회장님이 해내셨다구요.”
“이제 와 사탕발림해도 늦었어.”
홱 고개를 돌리는 것이, 60대 노인이 아닌 6살 아이 같다.
“제 말은…… 회장님이 작가의 시장적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셨다는 겁니다. 모든 갤러리 직원들이 목매는 바로 그거요!”
그제야 진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래서?”
“회장님이야말로 미술 투자자들의 롤모델 아니겠냐는 거죠. 이걸 잘 스토리텔링한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정말 입은 잘 터는군.”
입을 잘 털다니! 진심인데 정말 억울하다.
“전 정말 진심이거든요! 이제 말씀해주세요. 왜 ‘한때’라는 단어를 넣어야 하는지.”
“싫어. 네 대답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어.”
이 무슨 미취학 아동 같은 대답이란 말인가! 나는 분개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 김도균이 물끄러미 황덕현을 봤다.
“결정했어?”
“응.”
바로 결과를 말해주지 않고 황덕현은 차를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김도균은 몹시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지 그조차 결정을 못한 상태였기에, 황덕현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어서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