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진 회장 (4)2021.08.23.
바로 결과를 말해주지 않고 황덕현은 차를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김도균은 몹시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지 그조차 결정을 못한 상태였기에, 황덕현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어서 말해줘.”
“하기로 했어.”
“정말 할 거야?”
픽 웃은 황덕현이 반문했다.
“그럼 가짜로 하는 것도 있어?”
“왜 그렇게 결정했는데?”
“사실 어제 저녁까지는 안 하기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어.”
“그럼 왜 한다고 마음을 바꾼 거야?”
황덕현은 마음을 잘 바꾸는 사람이 아니기에, 김도균은 그 이유가 더욱더 궁금했다.
“어제 진 회장이 나를 찾아왔어.”
“진 회장이?”
“응.”
황덕현은 어제 밤을 떠올렸다. 진 회장은 황덕현의 자택으로 직접 찾아왔다.
-황 대표.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그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어서 놀랐어요.
황덕현이 처음 탑 옥션을 시작했을 때 진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5-6년 전에 그가 대리인을 통해 그림을 구매하면서 연락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진 회장이 물끄러미 황덕현의 얼굴을 봤다.
-이젠 정말 옥션 업계를 이끌어가는 대표 같아.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내가 한 것이 뭐가 있어서. 난 그때도 우리나라 옥션은 이르다고 생각했어.
-그럼 왜 저를 도와주셨어요?
계속 궁금했지만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자네에게 투자한 거야. 옥션은 안 돼도 자네는 잘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 눈이 아주 틀리진 않은 모양이야. 이렇게 잘되었지 않나.
-회장님 눈은 늘 정확했습니다.
씁쓸한 미소가 진 회장의 입가에 스쳤다.
-딴 소리가 너무 길었군. 특별경매를 꼭 열어주었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왔네.
-회장님이 저에게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다른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다른 선택지야 얼마든지 있어. 스카이 옥션을 비롯해서 많은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곳도 있었네. 하지만 난 탑 옥션에서 하고 싶어.
-이 비서 때문입니까?
굳이 탑 옥션이어야 하는 이유는 딸 같은 존재인 이 비서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이 비서가 아니었다면 진 회장이 위탁을 결정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묘한 미소를 지은 진 회장이 말했다.
-처음에는 시연이 때문에 위탁할 생각을 했지. 하지만 지금 결정은 한지감 때문이네.
-한지감 씨요?
-많은 사람들이 날 미술 투기꾼으로 불렀지. 내 투자에 잣대가 없고, 그냥 내가 사서 작가가 떴다는 사람도 많았어. 찰스 사치처럼.
-질투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어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에 대해 사람들은 동경하기도 하지만 깎아내리기도 한다. 진 회장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가 아니라는 것도 이런 현상을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다른 급의 사람이 돈을 좀 벌더니 미술 작품을 사들여 그 작품의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구매한 작가는 반드시 시장에서 성공한다. 얼마나 배알이 꼴렸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힘들었어. 그런데 한지감이 찾아와 그러더군. 내가 미술품을 보는 눈이 있다고……. 그 말에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었어.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의외의 순간이 있다. 진 회장에게는 한지감이 해준 말이 그런 순간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듯 진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맡기고 싶네.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황덕현은 ‘한때의 영광’이란 그 부분이 걸렸다. 그 부분을 바꾸지 않겠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기에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아! 그리고 ‘한때의 영광’은 빼버려도 돼.
-진심이세요?
-진심이야. 마음대로 해. 재벌들이 비웃을까 봐 내가 먼저 지르려고 한 거야.
그제야 황덕현은 마음 놓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양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마음에 드시도록 잘해 보겠습니다.
-그래. 기대해 보지. 한지감이 자네가 발굴한 사람이라며?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죠.
-괜찮은 애더군. 우리 시연이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진 회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김도균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한지감 덕분에 진 회장이 고집을 꺾었다, 이 말이네.”
“그렇지. 한지감이 물건은 물건이야.”
“그러게, 물건은 물건이네. 알았어. 위탁계약서 쓰고 특별경매 준비할게.”
“그래. 그런데 6월달 메이저 경매, 물량 딸리는 거 아니야?”
“딸리지. 그렇지만 걱정할 건 없어. 내가 있잖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김도균이 일어섰고, 그 모습을 보고 황덕현은 히죽 웃었다.
“하여간 한결같은 자신감이야.”
“나는 자신감을 실체로 만드는 사람이야. 봐왔으니까 잘 알잖아.”
“어련하시겠어요. 기대하겠습니다. 총괄님.”
“기대 많이 하세요. 대표님.”
이런 자신감이 황덕현이 김도균을 아끼는 이유기도 했다. * 사무실 중앙에 선 김도균이 경매팀 직원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소식을 알렸다.
“대표님이 경매 진행하기로 하셨습니다.”
반대했던 일이기에 팀장급의 얼굴이 어두웠다. 하지만 이미 결정에 따르기로 합의된 상태여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위기라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겉으로 티낼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슬로건은 우리 마음대로 지을 수 있어요.”
휘둥그레진 서정선이 바로 물었다.
“‘한때의 영광’ 넣지 않아도 됩니까?”
“네. 됩니다.”
한결 표정이 밝아진 이 팀장이 질문했다.
“총괄님이 진 회장님 설득하신 거예요?”
“아니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득을 한 건 한지감 씨예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고, 서정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지감 씨,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글쎄요.”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갸우뚱했다.
“겸손할 거 없어. 요샌 일한 티 잘 내는 것도 필요하다니까.”
겸손한 것이 아니라 정말 이유를 몰라서 이러는 것이다. 만났을 때 진 회장의 얼굴은 썩어들어갔지 않았는가. 팀장들이 잘했다는 말 한마디씩 던졌고, 덕분에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특별경매를 한다는 것은 고된 일이었지만 새로운 일이 주는 에너지가 있었다. 이 일을 좋아하기에 가질 수 있는 에너지였다. 흥분이 가라앉자 김도균은 경매를 잘 준비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공지를 마무리했다. 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나는 김도균에게 다가갔다.
“정말 진 회장님이 저 때문이라고 말하셨습니까?”
“네. 칭찬 받고 싶어서 왔어요?”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때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보고도 안 했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데, 김도균이 괜찮다는 듯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놀란 내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봤다.
“잘했습니다. 그래도 다음엔 꼭 보고하고 움직이세요. 휴가 낸 날은 확실히 쉬구요. 알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빙그레 웃은 나는 그제야 자리로 돌아갔다. * 기모노를 입은 주인탁이 일본식 다도를 즐겼다. 차를 충분히 즐긴 그가 뱀 같은 눈으로 수행원에게 물었다.
“쌍룡검 원고 써준 놈들 연구비 끊고, 폐강시켰나?”
“네. 다 확인했습니다. 학술지에도 전화 돌렸으니, 앞으로 해당 교수들 논문이 게재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했어. 미꾸라지 같은 놈들이 꼭 물을 흐린단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새 주인탁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눈치를 보던 수행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때 말씀하신 한지감 말입니다.”
“알아봤어?”
순식간에 미소를 사라지고 쥐를 잡아먹으려는 뱀으로 돌아왔다.
“네. 그때 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가 골동상이고, 1년 전 아버지를 따라 골동상을 시작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풋내기구만.”
“그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는 것이…….”
“없는 것이?”
주인탁이 노려보자 수행원은 흠칫했지만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재벌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큽니다. 상위 10%에 드는 재벌들 중에 한지감과 연이 닿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봤자 재벌의 하수인밖에 더 돼?”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랑 연이 있어?”
재벌의 하수인밖에 더 되냐면서도, 누구와 연이 닿아있는지는 궁금한 모양이다.
“도강 그룹 강 회장, 현성 미술관 이 관장, 화이트 백화점 권 대표, 한서 미술관 신 대표가 주요 고객입니다.”
뜨르르한 이름들의 나열에 내심 놀랐으면서도 그는 꼬투리를 잡았다.
“현성 그룹 이재근 회장도 아니고 이 관장은 급이 안 맞지 않나?”
“아……. 그게 이 회장하고도 연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이 회장이 현성 미술관에 전시하고 싶어 하는 물건도 한지감이 구해다 주었다고 합니…….”
주인탁의 눈매가 매서워지자 수행원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탑 옥션에서 입지는?”
“팀장급이 다 예뻐하는 모양입니다. 일을 잘하기도 하고,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과감하다고 합니다. 메이저 경매 때 쌍룡검뿐만 아니라 아만다 우의 유작도 한지감이 위탁받았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그래 봤자지만.”
주인탁은 어떻게서든 흠집을 내고 싶었다. 아니 흠집을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지감의 적을 포섭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적은 없나?”
“있습니다. ‘강정휘 갤러리’ 강정휘 대표입니다.”
“재벌들 비자금 세탁 맡았던 그 여자 말이야?”
“네. 탑 옥션에서 감정위원으로 일하기 전, 한지감을 먼저 발탁한 사람이 강정휘입니다.”
한지감의 틈을 찾은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사이가 틀어졌다, 왜지?”
“정확하진 않지만 업계 사람들은 강정휘가 갑질을 했을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갑질은 무슨. 잘못을 했으니까 그렇겠지. 안 그래?”
“맞습니다.”
“요새 젊은 것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어. 누구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건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호로록 차를 마신 후 주인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강정휘인지 뭔지 연락 한번 잡아봐.”
“알겠습니다.”
음흉한 미소가 주인탁의 입가에 스쳤다. * 핸드폰이 울리자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거기엔 이수지의 이름이 떠있었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후환이 두려워 유리문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나야.’란 말이 통용될 정도로 이수지와 친밀한 관계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러 딱딱하게 굴었다.
“네. 관장님.”
[지난번 식사,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어떨까 싶어서.]
왜 하필 저녁 식사냐고, 밝은 낮에 만나면 안 되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경숙에게 아만다 우의 유작을 따로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A호텔 레스토랑으로 7시까지 와.]
“네. 그때 뵙죠.”
통화를 마치고 나니 어쩐지 힘이 빠져 탕비실로 들어갔다. 당 충전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주변을 살핀 후 서랍장을 열었다. 그곳에 있는 핫초코 봉지를 보자 입꼬리가 싸악 올라갔다. 많이 해본 일이었기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컵에 핫초코 가루와 물을 넣고 휘휘 저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천천히 핫초코를 마시면서 기분을 끌어올리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남의 것을 몰래 먹다 걸린 사람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도끼눈을 뜬 정다영이 서 있었다.
“오빠. 자꾸 내 핫초코 먹으면 어떻게 해요!”
“야.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
“이거 이렇게 보여도 비싼 거란 말이에요. 돈도 나보다 훨씬 많으면서 벼룩의 간을 떼어먹어야겠어요?”
벼룩의 간까지 간단 말인가.
“벼룩치고 너무 통통한 거 아니냐?”
그 말에 정다영이 눈을 치켜세웠다.
“알았어. 알았어. 하나 사주면 될 거 아니야. 10개 사줄게!”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랬어요오.”
언제 눈을 치켜세웠냐는 듯 정다영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핫초코를 찾았어요?”
“이수지 때문에.”
“이 관장이 왜요?”
“아만다 우 유작 때문에 저녁 먹게 됐거든. A호텔에서 먹자네. 그것도 황금 같은 토요일에!”
“그렇게 됐구나…….”
평소였다면 그랬냐고 그냥 말하고 넘길 정다영인데 어째서인지 사뭇 심각했다. 정다영을 살피며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진지해?”
“……불편하지 않아요? 사적으로 이수지 관장 만나는 거.”
“불편하지. 약속한 거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지.”
지그시 나를 보던 정다영이 말했다.
“오빠……. 안 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