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예술가의 초상 (3)2021.09.04.
나는 목을 가다듬고 영어로 전화를 받았다.
“터너 씨, 잘 도착하셨나요?”
[네. 덕분에 잘 도착했어요. 내리자마자 지감 씨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기분이 좋네요.”
[위탁에 대한 답도 해 주어야 할 것 같구요.]
나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말씀하시죠.”
[탑 옥션에 위탁하도록 하죠.]
“정말 그러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네. 정말이에요. 지감 씨 덕에 여행이 아주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결정 내려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바로 메시지가 떴다. [미션에 성공하셨습니다. 5단계 정보인 특이사항이 공개됩니다.] 통화를 마친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안쓰러운 듯 나를 보는 경환이 보였다.
“왜 그래?”
“형……. 병원 가자.”
“갑자기 병원은 왜?”
“조울증 같아. 지금 가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거야.”
“에라이! 아니거든! 위탁받아서 기분 좋은데 꼭 초를 쳐야겠냐?”
“아……. 난 또. 마음이 아픈 줄 알았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며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게?”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며. 가 봐야지.”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낮다고 하지 않는가. * 점심시간이 되자 다영이 일어섰다.
“전 오늘 약속이 있어서 따로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팀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다영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벌떡 일어나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점심 잘 먹어요.”
“네. 선배님도 맛있게 드십시오.”
인사를 하고 재빨리 다영 뒤를 따라갔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다영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해 내려갔다.
“정다영! 정다영!”
내가 쩌렁쩌렁하게 부르는데도 다영은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내려갔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좀 멈춰 봐!”
그렇게 말하는데도 다영은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뛰다가는 넘어져 다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 확 속력을 내서 다영을 막아섰다.
“다친다고! 서라고 했잖아!”
“…….”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놀라니까 더 뛰게 되잖아요!”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다영을 데리고 나는 근처 카페로 갔다. 마주 앉았는데도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딴청을 부렸다. 난데없이 고백을 하더니 이제 와 피해 다니는 건 무슨 심리일까. 피해도 내가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럴 거, 고백은 왜 했냐?”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질끈 눈을 감은 다영이 중얼거렸다.
“저…… 차인 거죠.”
“아직 말 안 했거든?”
“찰 거잖아요.”
불만인 듯 꿍얼거리는 모습에 슬며시 약이 오른다.
“차이는 것이 무서웠으면 고백 안 하면 됐잖아.”
“안 그래도 후회중이거든요.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회사 동료에게 고백하다니, 내가 미쳤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다영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왜?”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잖아요. 뭐 좀 창피하긴 하지만. 그렇게 내가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아니라기보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 티 좀 내지 그랬어. 그러면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티 엄청 냈거든요! 오빠가 둔해서 못 알아차린 거예요.”
“나 그렇게 안 둔하거든?”
기가 막히다는 듯이 다영이 웃었다.
“오빠, 엄청 둔해요. 그날 이수지한테도 고백받았죠?”
“어…… 어떻게 알았어?”
놀란 나와 달리 다영은 태연하게 다리 쪽으로 팔을 쭉 뻗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까.”
“어떻게 몰라요. 이수지 성격에 주말 저녁에 단둘이 밥을 먹는다는 건 당연히 특별하단 이야기일 텐데…….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그래, 생각해 보면 1년 전쯤에도 이수지와 그런 자리가 있었다. 나는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수지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호감 있다는 정도는 알았어. 하지만 선을 충분히 그었다고 생각했지.”
“그런 걸 착각이라고 하죠.”
1년 전 이수지와의 식사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최근 들어 생긴 풋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문득 나를 언제부터 좋아한 건지 궁금해졌다.
“언제부터였어?”
“사람을 차면서 잔인하게 그런 걸 물어봐요. 매너 없어.”
“궁금하단 말이야.”
“1년은 더 됐어요. 더 이상은 말 안 해 줄 거예요!”
“알았어.”
내가 눈치를 보자 다영은 눈을 흘겼다.
“그러지 말아요.”
“내가 뭐.”
“지금 내 눈치 보고 있잖아요. 나는 고백했고, 차였고, 그래서 그냥 예전 같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어요. 정리 끝. 됐죠?”
숨도 쉬지 않고 말해서 래퍼인 줄 알았다.
“알았어. 정리 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네. 전 맛있는 밥 먹으러 갈 거거든요. 한우 먹으러 갈 거예요.”
“점심부터?”
“고기를 점심에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없긴 하지. 그럼 같이 가자.”
일어서려는데 근엄한 표정을 한 다영이 손을 내밀어 하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같이 안 갈 거예요.”
“설마 혼자 가게?”
“네. 실연당한 기념으로 혼자 한우를 뜯어 보려구요. 그럼 이만!”
아주 도도한 표정으로 다영은 홱 돌아서 가버렸다. 다영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인데도 어쩐지 좀 서운한 기분이 든다. * 강정휘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본 주인탁이 미소로 반겼다.
“어서 오세요. 강정휘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탁 교수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신을 오라 마라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주인탁 교수의 영향력을 그림을 파는데 활용할 수 있겠다는 얄팍한 생각 때문이다.
“제가 가야하는데, 늙은이가 몸을 운신하는 것이 힘겨워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근처에 사는 작가가 있어서 오는 김에 들렀습니다.”
근처에 사는 작가 따위는 없었지만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었다. 강정휘의 얕은 수를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주인탁은 더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제가 그림을 사고 싶은데, 미술을 모르다 보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은 수행원을 시키지, 이렇게 집으로까지 부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정휘는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은 드러낸 목적에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한다.
“그림 투자를 시작하시려고 하시는군요. 갤러리 대표로서 교수님의 이런 모습이 정말 흐뭇합니다. 미술에 대한 이해도 없이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것도 적지 않아요. 잘 모르지만 그럴듯한 그림을 걸어놓고, 미술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 보면 마음이 아프죠.”
공감하듯 주인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술에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군요.”
“교수님의 분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나요?”
“있다뿐이겠습니까. 내가 적폐인 것처럼 그렇게 날 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머.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 감정도 없으면서 강정휘는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반응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인탁은 심취해서 말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시작에 일본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부정하려 하죠.”
“그렇죠. 그런 면들에 대해서 요새 젊은 사람들은 부정하려 하더라구요.”
주인탁이 주장하는 식민사관에 대해서는 사전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강정휘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녀에게 역사의식이란 빵 한 점보다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주인탁은 오랜만에 깨인 사람을 봤다는 듯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한 분야에서 최고인 분의 눈은 다르군요.”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한 것뿐입니다아.”
애교 섞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강정휘는 지금이 바로 그의 속내를 끄집어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히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터이기에, 조금 더 파고 들면 알 수 있으리라는 것도.
“어떤 사람들이 교수님의 이런 생각을 부정하려고 하던가요?”
“최근에 탑 옥션에서 진행한 ‘이순신의 쌍룡검’ 경매 봤습니까?”
“네. 봤어요.”
어떻게 안 볼 수가 있겠는가. 한지감이 그걸 위탁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아만다 우의 유작처럼 유찰되기 바라고 또 바랐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검이라고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 외에도 10명 정도 됩니다. 이순신이 썼다는 확실한 근거조차 없어요!”
“한마디로 사기극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경합을 벌여 20억 가까이 되는 가격에 강 회장은 샀고, 기증까지 했군요.”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강정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겁니다. 국민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죠. 나서고 싶었지만, 퇴직한 마당에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습니다.”
“잘하셨어요.”
“그 사기극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탑 옥션 담당자인데, 아주 되바라졌더군요. 돈에 눈이 멀었어요.”
주인탁은 힐끗거리면서 강정휘를 살폈고, 희번덕거리는 눈을 볼 수 있었다.
“혹시 그 담당자 이름이 한지감인가요?”
“맞아요.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주인탁이 자신을 부른 이유임을 강정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곤, 비련의 주인공 같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 친구를 미술계에 발 들이게 했답니다. 그때는 반짝거리는 재능이 보였죠. 나중에서야 인성까지는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도 그 친구는 아주 위험합니다. 이러한 사기극을 그 친구는 계속 만들어낼 생각이에요.”
몹쓸 사람들 사이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미술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미술계에 피해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요. 그 피해를 도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악의적인 미소가 두 사람의 입가에 피어났다. * 회의실로 들어서니 김도균과 서정선이 보였다. 무슨 일로 부른 걸까? 궁금해하는 나를 보면서 서정선은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궁금하지?”
“네. 궁금합니다.”
서정선이 허락을 구하는 듯 김도균을 보자, 그가 끄덕거렸다.
“지감 씨, 이번 특별경매에서 지감 씨가 보조 경매사 역할을 맡아 줬으면 해.”
“보조 경매사요?”
“응. 사정상 희정 씨가 못하게 되어서 말이야.”
지켜보던 김도균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됩니다.”
“하고 싶지 않다기보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서정선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당연하지. 이번 주까지 시간 줄 테니까 생각을 좀 해 봐. 시간 많이 못 줘서 미안해.”
“아니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긍정적인 답변 기대할게. 지감 씨.”
그런 서정선을 김도균은 나무라듯이 봤다.
“왜 부담은 주고 그러세요?”
“부담이 아니라 기대를 말한 거예요.”
“그게 부담입니다.”
두 사람은 꼭 아이를 두고 싸우는 엄마 아빠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 한쪽 편을 들면 다른 한쪽 기분이 상할 것 같아 나는 무마용 미소를 지었다. 투닥거리는 것을 끝내고 김도균이 나를 봤다.
“아직 경매 번호를 정하는 일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죠?”
“네.”
경매 순서가 막 정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그렇지 않았다. 미술품의 추정가격, 중요도에 따라 분위기가 고조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번에 경매 순서, 지감 씨라면 어떻게 했을지 만들어 봐요.”
경매 순서는 이미 나와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싱긋 웃으면서 서정선이 덧붙였다.
“잘하면 6월 메이저 경매 순서는 지감 씨한테 맡겨 보려구.”
새로운 일에 가슴이 설레어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네. 해 보겠습니다!”
6월 메이저 경매에 내가 정한 순서대로 경매가 된다면 날아갈 듯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자리로 돌아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3년간 순서를 다 확인해 보자.”
경매 번호는 그냥 매겨지지 않는다.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작가, 그림의 양식, 추정가 등 모든 것을 계산해야 했다.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아.”
다른 요인들보다 추정가가 인상적이었다. 비슷한 가격대가 이어지다가 한번 가격대가 확 오른다. 이후 확 오른 가격대보다 낮은 가격대로 이어지다 비슷한 형식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천만 원대가 쭉 나오다 삼천만 원대가 나오고, 이후 이천만 원대가 이어지다가 억대가 나오는 것 같은 그런 흐름이다. 일단 나는 이번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을 추정가가 낮은 가격으로 정렬하고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했다. 그때 심각한 정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왜 갑자기 감정위원을 그만두신다는 거예요? 교수님? 교수님……!”
심각한 것은 정연주뿐만이 아니었다. 김 책임도 전화기를 붙잡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수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교수님……!”
상황을 지켜보던 지 팀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저벅저벅 김도균에게로 걸어갔다.
“총괄님, 고미술 감정위원 중 교수 6명 전원이 계약 해지 의사를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