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감정위원 (2)2021.09.08.
수행원에게 한지감이 사표를 냈다는 말을 전해들은 이수지의 눈이 커졌다.
“한지감이 사표를 냈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남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 이수지였지만, 한지감의 일이여서인지 자못 심각해졌다. 수행원은 당연히 사표를 낸 이유를 궁금해하리라 여겼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설마…… 나 때문인가?”
“관장님 때문에요?”
느닷없는 말에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수행원은 되물었고, 이수지는 이런 것도 알아듣지 못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별 이유도 없이 사표를 낸 거잖아.”
“그렇죠.”
“한지감이 나한테 하필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들켰잖아.”
그제야 수행원은 이수지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아들었다.
“성적 취향이 들킬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만두었다는, 그런 말씀이시군요.”
“시기가 누가 봐도 그렇잖아.”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이 말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수행원은 맞장구쳤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어쩔 수 없이 불러서 안심시켜야겠네. 한지감 좀 불러와.”
“불러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말해줘야지. 나는 누군가의 성적 취향을 아웃팅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지감과 입을 맞춰놓기는 했지만 괜히 만나서 좋을 것은 없었다.
“관장님 안 그래도 바쁘신데, 굳이 그러실 필요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바빠도 오해는 풀어야지. 나 같은 사회 지도층이 그런 거지같은 오해를 받을 수는 없잖아.”
단호한 이수지 때문에 수행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그……그렇죠. 오해 받을 수 없죠.”
“그러니까 연락해서 식사 약속 잡아.”
“네.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수지가 직접 연락을 하지 않고 수행원에게 시켰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말은 잘 맞췄으니 별일이 없을 거라 믿고 싶었다. 관장실에서 나온 수행원은 비상계단으로 가서 한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만남을 거절할 테지만 한배를 탄 사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어떻게서든 오게 할 작정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그는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관장님께서 보자고 하시네요.”
[제가 사표를 냈다는 것이 알려졌나 보군요.]
“맞아요. 관장님은 그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의아한 한지감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수지를 몇 년간 보좌한 수행원이 보기에도 이상한 논리 전개였다. 그 이상한 논리 전개를 설명하자, 한지감은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겨우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랬군요.]
“그래서 지감 씨가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생각보다 긍정적인 답이 빨리 나와 수행원은 놀랐다.
“그럼 언제 오실 수 있나요?”
[내일 점심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뵐게요.”
* 서정선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한지감 사원은 탑 옥션에 필요한 인재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서 팀장.”
가라앉은 김도균의 목소리에도 서정선의 흥분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시는데 아까 왜 그렇게 말리신 겁니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그래도…….”
“오늘 일 끝나고 제가 한지감 씨를 따로 만나서 설득해 볼 겁니다. 그러니까 서 팀장은 나서지 마세요.”
그 말에 서정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지감 씨는 저희 팀원이에요. 어떻게 안 나서요.”
“서 팀장이 나서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까 봐 이러는 거예요.”
“제가 나서는 것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총괄님이 나선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김도균은 욱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눌렀다. 서정선도 같은 감정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참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내가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서 팀장에게 더 소속감을 가지고 있겠죠. 하.지.만. 그래서 더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준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지감 씨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
그제야 서정선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고, 김도균은 부드러운 미소로 마음을 녹였다.
“서 팀장. 부탁해요. 조금만 나를, 그리고 한지감 씨를 믿어줘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 팀장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 또한 한지감 씨가 탑 옥션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미안해졌는지 서정선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총괄님. 제가 버릇없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다는 듯 김도균은 웃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 김도균과 함께 회사를 나서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집으로 갔다. 포장마차 여자 사장이 김도균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게 누구야. 요새 왜 이렇게 뜸했어?”
“정신없이 살아서 그렇죠.”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김도균의 모습은, 날카로운 면모를 보이는 예술인이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 같았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잘 어울려, 나는 포장마차에 처음 오는 사람처럼 두리번댔다. 그런 나를 보고 김도균이 말했다.
“안 앉고 뭐해요.”
“아……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메뉴판을 빠르게 스캔하고는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우동을 골랐다.
“우동으로 하겠습니다.”
사장을 보고 김도균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여기 우동 둘, 오돌뼈 하나 주세요.”
“알겠어. 맛나게 해서 줄게.”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수저를 놓으면서 슬쩍 물어봤다.
“자주 오시는 곳인가 봐요.”
“이 팀장 덕분에 오게 된 곳인데, 괜찮더라구요. 그래서 퇴근하면 가끔 왔죠.”
“포차 좋아하세요?”
“런던으로 가기 전까지는 안 좋아했는데, 가고 나니까 이런 곳이 그립더라구요. 지감 씨는 포차 별로예요?”
“저는 맥주파라 호프를 더 선호합니다.”
가볍게 김도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번에는 내가 사니까 다음번에 호프에서 지감 씨가 사요.”
“네?”
“설마 받아먹기만 할 생각은 아니죠?”
“아……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요.”
씨익 웃는 얼굴을 보니, 이거 내가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퇴사를 하더라도 한 번은 김도균에게 호프집에서 술을 사야 하는 것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이 바닥을 드러내도록 김도균은 술을 시키지도, 퇴사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술 안 시키세요?”
“술 마시고 싶어요? 그럼 시켜줄게요. 맥주로 시킬까요?”
“그게 아니라…… 취기가 오르면 물어보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풉, 김도균이 웃었다.
“그게 포차에 데려온 진짜 이유일 것이다, 뭐 이런 거죠?”
“네에……. 그렇게 멋대로 생각했습니다.”
“뭐 나름 재밌는 추론이지만, 나는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취중진담이란 말이 있지만, 취중헛소리가 더 많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그럼 여기는 왜……?”
“그냥 지감 씨랑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흐르던 말이 갑자기 퍽 급소를 찔렀다. 고개를 떨구었지만 지그시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끈질겼다.
“지감 씨. 원해서 그만두려는 것 아니잖아요. 그럼 지감 씨가 말을 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
“감정위원 6명이 한 번에 계약을 해지한 것과 연관이 되어 있죠?”
움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도균에게 숨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서둘러 표정을 지웠다.
“연관…… 없습니다.”
“지감 씨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알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해요?”
“알아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힘겨워하는 나와 달리 김도균은 차분했다.
“왜죠?”
“제가 저지른 일이니만큼 제가 책임지고 싶습니다. 원래대로 다 돌려놓겠습니다…….”
“해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요?”
“네……?”
나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봤다.
“지감 씨가 나서면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
“만약에 일이 틀어졌을 때 다른 사람한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상황을 알아야 도울 수 있고, 그래야 일이 틀어질 확률도 낮아져요.”
“총괄님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면 명확하게 선을 긋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만에 하나 도와주시더라도, 외부적으로 드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알았어요. 약속하죠.”
그 약속을 듣고서야 나는 감정위원의 계약해지 뒤에 주인탁이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주인탁의 신경을 내가 어떻게 긁어놓아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도.
“그러니까 쌍룡검 소책자가 주인탁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거죠?”
“소책자 자체보다, 제가 경매에 초대한 것이 결정적으로 빈정을 상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계획이죠?”
“주인탁 교수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되돌려 놓겠다는 말을 만복했다. * 다음 날, 한지감은 점심시간에 이수지를 만나기 위해 현성 미술관에 들렀다. 이수지는 늘 그랬듯이 도도한 표정으로 맞았다.
“어서 와.”
“네.”
“탑 옥션을 그만둔다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한지감이 안쓰러워,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신 차려. 이수지. 상대는 게이야!’
그런 충동을 느끼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턱을 더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은데,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누군가의 성…….”
성적 취향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한지감을 배려해 좀 더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기로 했다.
“……개인적인 일을 업계에 터트리는 그런 허접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으로 나를 봤다니, 정말 기분 나빠.”
“알고 있습니다. 관장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걸.”
“뭐……?”
별 말도 안 했건만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에 이수지의 가슴은 나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럼 왜 퇴사하는 건데?”
“그냥 좀 복잡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한지감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관장님께 염려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정리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목요일부터 특별경매 프리뷰가 시작합니다. 탑 옥션 나가기 전 마지막 경매인 만큼 관장님을 직접 모시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직접 모신다는 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야겠네. 소원이라는데 들어줘야지.”
“감사합니다. 괜찮은 날에 연락주세요.”
수수한 한지감의 미소를 보면서 이수지는 잠시 넋이 나갔다. 머리로만 한지감을 정리했을 뿐, 마음속 그는 점점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 프리뷰 전시장에 가벽이 세워지고 그림이 차례로 전시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 보람과 동시에 경매가 가까워졌다는 긴장감을 느끼곤 했지만, 오늘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되어 나는 프리뷰 전시장을 떠나 로비로 갔다.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나는 주인탁에게, 프리뷰가 공개되기 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수행원과 함께 로비 안으로 들어서는 주인탁이 보여, 나는 잰걸음으로 가서 저자세로 인사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인탁은 인사도 받아주지 않은 채 딴청을 부렸다. 불쾌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프리뷰 전시장에 내린 주인탁은 자신의 집처럼 휘저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림들을 힐끗대면서 세상 못 마땅한 투로 말했다.
“별 같잖은 것을 보고 예술이라고 씨불이는군.”
준비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있던 직원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주인탁은 개의치 않았다. 10분도 되지 않아 구경을 끝낸 그는, 가장 큰 그림인 이기환 작가 그림 앞에 섰다.
“이런 건 얼마나 되려나?”
“삼십억 정도 됩니다.”
“그래?”
“사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살 의향은 없고, 이 그림을 받고 싶구만.”
“네?”
“지금 들었지 않나. 그림을 받고 싶다고.”
나는 멍하게 그의 탐욕스런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이건…….”
“변명은 필요 없어. 용서받고 싶다면 이 그림을 나에게 주게. 아니면 무릎 꿇고 제대로 된 사죄를 하든가.”
직원들이 모이면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명이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데도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선들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반면 주인탁은 자신을 과시하듯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업계 사람들이니, 이렇게 대놓고 강짜를 부려도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이러기 싫었다면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됐지.”
“쌍룡검 소책자를 만든 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까?”
“죄지.”
“죄라고 치더라도, 소책자 원고를 써주신 교수님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감정위원들이 모두 그만두도록 꼭 그렇게 만드셔야 했습니까?”
같잖다는 듯 주인탁이 나를 비웃었다.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그놈들도 같은 것들이니까 책임을 져야지.”
“교수님…….”
“이 나라의 중심은 신화에 가까운 그딴 검 따위가 아니야.”
“그럼…… 뭡니까?”
“일본이 베풀어준 은혜, 바로 그거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그의 눈에는 이 사람들이 은혜도 모르는 짐승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저항했다.
“도대체 일본이 무슨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까?"
“이러니까 무지하다는 소리를 듣지. 도로, 전기 그 어떤 것도 일본의 은혜가 없는 곳이 없어!”
그때 난데없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저 할아버지 노망났죠?”
그 소리를 들은 주인탁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지금 누구야?”
주인탁의 거친 반응에 놀란 직원들이 양옆으로 흩어지자, 핸드폰을 든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인탁은 당황했다.
“이……이것들, 뭐하는 거야?”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것들이라뇨. 인플루언서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