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감정위원 (3)2021.09.11.
사건 이틀 전 포장마차. 고개를 숙인 채 한지감이 말했다.
“소책자 자체보다 제가 경매에 초대한 것이 결정적으로 빈정을 상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계획이죠?”
“주인탁 교수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한지감은 되돌려 놓겠다는 말을 만복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드니, 김도균이 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런 어설픈 거짓말을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요?”
“네……?”
“그렇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으면 나에게 애써 숨기려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 사고를 칠 생각이니까 숨기려는 거겠죠. 그래야 잘못되어도 내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김도균의 말이 맞아 뜨끔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어날 일은 총괄인 나와 대표님께 반드시 공유되어야 합니다. 회사 밖에서 일어날 일이라면 상관없어도 말입니다.”
김도균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고민을 하던 한지감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주인탁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입니다.”
“어떤 식으로요?”
“저에게 갑질을 하는 영상을 찍어서 올릴 계획입니다…….”
요즘 높은 분들의 갑질 뉴스가 심심찮게 퍼지곤 한다. 심지어 영상까지 떡하니 찍혀서 발뺌할 수 없게 올라온다. 그들처럼 주인탁도 만들 생각이었다. 학계라는 세계 안에서의 그는 식민사관을 주장해도 아무 문제없는 황제였지만, 국민들 앞에서 그 민낯이 드러나면 분명히 타격이 있을 거다. 천천히 김도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질이란 프레임을 갖지만, 실질적인 목표는 주인탁이 가진 식민사관을 대중에게 폭로하는 거군요.”
“그렇죠. 거기에 이수지가 도와준다면 경제적인 압박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흐음…….”
생각에 잠긴 그의 표정이 한지감을 불안하게 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결정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판을 키워 보죠.”
“판을 어떻게……?”
“요새 라방, 그러니까 라이브 방송이라는 것이 인기라죠?”
“설마…… 인플루언서를 초청하자는 겁니까.”
“맞아요. 한지감 씨도 생각하고 있었군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렇게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암묵적으로라도 회사의 동의가 필요해서, 잘못하면 회사까지 책임을 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회사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이건 지감 씨만의 일이 아니에요. 어떤 이유든 우리 쪽 감정위원 6명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주인탁은 탑 옥션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대표님이…… 허락하실까요?”
“허락하게 만들죠. 그러니 한지감 씨는 프리뷰에 관심 있을 만한 인플루언서들과 접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장하게 한지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한지감과 헤어진 김도균은 그 길로 황덕현을 찾아갔다. 밝은 표정으로 황덕현이 김도균을 맞았다.
“이 밤에 웬일이야?”
“중요하게 상의할 것이 있어서.”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황덕현은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김도균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황덕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돼. 그냥 조용하게 넘어가.”
“형. 왜 안 된다는 건데?”
“왜 안 되냐고? 주인탁의 학계 영향력을 몰라서 그래? 감정위원들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어. 다음은 뭘까?”
“그러니까 더 물러서면 안 돼. 이번에 이런 식으로 물러나면, 그 사람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그런 짓을 할 거야!”
김도균의 설득에도 황덕현은 입장을 고수했다.
“옥션 일을 하면서 학계와 등을 돌릴 수는 없어.”
명예를 가진 학자들은 옥션의 미술품의 가치를 높여준다.
“주인탁은 역사학자야. 미술을 뿌리로 한 학자들은 영향을 덜 받을 거야."
미술사는 크게 인문을 뿌리로 한 학자들과, 미술을 뿌리로 한 학자들로 갈라진다. 한국대의 경우에는 사학과에서 미술사학과가 갈라져 나왔기에 사학과인 주인탁의 영향이 짙었다.
“영향을 덜 받는다는 거지, 안 받는다는 건 아니잖아. 이번에 계약 해지한 두 명은 미술이 뿌리인 교수였어. 절대 영향을 안 받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 아는데…….”
“막말로 임병규, 강정휘 질 나쁜 거 우리가 모르냐? 그런데도 겉으로는 낯붉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잖아.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서. 같은 업계에 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거야.”
교수들 입장에서도 학계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과 등을 돌리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형…….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동영상 올리는 것에서 끝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험성을 감수하는 거야.”
“형, 정말 이대로 괜찮아? 옥션 일은 둘째치고,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이 저렇게 학계에서 압도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괜찮냐고.”
“나도 괜찮지 않아. 하지만 회사를 지키는 것이 먼저야.”
마른 침을 삼킨 김도균이 간절하게 말했다.
“나도 회사가 타격받는 거 원하지 않아. 인플루언서들은 그냥 프리뷰 공개 전에 홍보 목적으로 오는 걸로 만들 거야. 만약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게.”
“김도균……!”
“형도 마음에 걸리잖아. 그러니까 허락해줘. 응?”
인상을 쓴 황덕현이 자신의 머리를 흩트렸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알겠어. 해.”
“형……! 고마워!”
“고맙고 뭐고, 절대 회사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우연의 일치처럼 보여야 한다고. 알았지?”
“걱정하지 마! 정말 고마워.”
“말이나 못하면…….”
삐져서 딴 곳을 보는 황덕현을 향해 김도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사건 당일. 경매팀 회의실에는 10명의 인플루언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보며 김도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탑 옥션 경매팀 총괄 김도균입니다. 급한 연락에도 와주신 인플루언서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상 지금부터 찍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동영상 찍어도 되고 라방하셔도 됩니다.”
20대 여자 인플루언서가 까르르 웃었다.
“어머! 총괄님, 라방이라는 단어도 아시네요.”
“여러분들 모시려고 공부 좀 했습니다.”
“하하하!”
“재밌는 분이네에.”
인플루언서들은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영상을 찍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섯 명은 동영상을 촬영했고, 네 명은 라방을 시작했다. 라방을 시작한 인플루언서들은 각자 자신의 스타일대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탑 옥션에서 인플루언서들을 초대해주셔서 와 있습니다.”
“인플루언서 자격으로 프리뷰를 먼저 보게 됐어.”
30대 남자 인플루언서가 다소 공격적인 태세를 취했다.
“급하게 저희가 초대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탑 옥션은 그동안 사회 고위층만 상대하느라 저희 같은 인플루언서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관심이 없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인플루언서들과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 왔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공격적인 말에도 김도균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진상 고객들을 많이 대한 그로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 거죠?”
“인플루언서를 초대하는 오늘 같은 형태의 홍보는 아직 옥션에서는 낯선 형태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경매는 메이저 경매가 아닌 특별경매입니다. 메이저 경매는 많은 위탁자분들이 계십니다.”
자연스럽게 숨을 고르며 김도균은 말을 이어갔다.
“일일이 이런 홍보를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여태까지 매번 무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탁자분이 진영대 회장님 한 분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매끄러운 설명에 납득한 듯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핸드폰이 울려 김도균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주인탁이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였다. 이제 슬슬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곧 프리뷰 전시장에 가서 둘러볼 건데요, 몇 가지 조심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처음 전시장 한 바퀴를 돌 때는 함께 설명을 들으시면서 조용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됩니다.”
“유치원 현장학습도 아니고,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던 20대 여자가 이번에는 까칠하게 말했다.
“아직 설치가 다 끝나지 않았다 보니 혹시 모를 사고를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김도균의 깔끔한 설명과 깍듯한 태도는 모든 인플루언서의 마음을 녹였다. 좋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김도균은 타이밍이 잘 맞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 그는 다영을 비롯한 몇 명의 직원들과 함께 프리뷰 전시장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주인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변명은 필요 없어. 용서받고 싶다면 이 그림을 나에게 주게. 아니면 무릎 꿇고 제대로 된 사죄를 하든가.”
“이게 무슨 소리야?”
“가 봐요.”
“움직이지…….”
김도균이 컨트롤할 틈도 없이 인플루언서들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우르르 가버렸다. 다행히도 직원들이 이미 웅성대고 모여 있었고, 다영을 비롯한 직원들이 인플루언서들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서, 그들의 등장을 주인탁이 눈치채진 못했다. 지시받은 대로 다영은 다급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소극적으로 인플루언서들을 제지했다.
“찍으시면 안 돼요……! 카메라 꺼 주세요.”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인플루언서들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이야깃거리의 냄새를 맡은 그들은 핸드폰을 절대 놓지 않았다. 자신을 과시하듯 주인탁은 고개를 쳐들었다.
“이러기 싫었다면,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됐지.”
“쌍룡검 소책자를 만든 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까?”
“죄지.”
“죄라고 치더라도, 소책자 원고를 써주신 교수님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감정위원들이 모두 그만두도록 꼭 그렇게 만드셔야 했습니까?”
같잖다는 듯 주인탁이 한지감을 비웃었다.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그것들도 같은 것들이니까 책임을 져야지.”
“교수님…….”
“이 나라의 중심은 신화에 가까운 그딴 검 따위가 아니야.”
“그럼…… 뭡니까?”
“일본이 베풀어준 은혜, 바로 그거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고, 한지감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런 그에게 저항했다.
“도대체 일본이 무슨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까?"
“이러니까 무지하다는 소리를 듣지. 도로, 전기 그 어떤 것도 일본의 은혜가 없는 곳이 없어!”
그때 난데없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저 할아버지 노망났죠?”
꺄르르 웃었던 20대 여자였다. 그 소리를 들은 주인탁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지금 누구야?”
주인탁의 거친 반응에 놀란 직원들이 양옆으로 흩어지자, 핸드폰을 든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인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이것들 뭐하는 거야?”
한지감이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것들이라뇨. 인플루언서분들입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20대 여자 인플루언서가 핸드폰을 주인탁에게 가져다댔다.
“할아버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는 거예요?”
“뭐, 지껄여?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계집애가, 말이면 다인 줄 아나!”
“피도 마르지 않은 계집애?”
“그래. 나는 네놈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야. 한국대 사학과 교수라고!”
그 말에 인플루언서들은 술렁였다.
“사학과 교수라는 사람이 식민사관을 주장해?”
“미친 거 아니야?”
“노망난 거지. 설마하니 진짜 사학과 교수일 리가…….”
인생에서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냉대에 주인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20대 여자의 핸드폰을 뺏으려 했다.
“뭐하는 거예요.”
“남의 얼굴 이런 식으로 찍는 거 불법이야!”
“불법? 그쪽 생각은 매국노거든요?”
재빠르게 한지감이 달려들어 주인탁을 제재했다.
“저한테는 막 대하셔도 되지만, 이분들에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옥션에 오신 손님입니다.”
“너 이 자식! 날 함정으로 몰아넣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당할 줄 알아? 이런 잡것들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어!"
소용없는지 두고 보자는 말을, 한지감은 간신히 삼켰다. 어깨로 한지감을 툭 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 주인탁은 노발대발하며 수행원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시장을 떠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수지였다. 뒤늦게 이수지를 발견한 한지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장님, 어떻게 오셨어요?”
“조금 전에.”
하지만 굳은 표정을 보면, 방금 온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 오시기로 했잖아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김도균의 제안으로 인플루언서를 떠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한지감은 이수지가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해서 경제적으로 주인탁을 압박하게 유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수지를 이용하는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려, 이수지를 만나러 갔을 때는 순수하게 프리뷰를 안내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수지는 하루 뒤에 오기로 했기에, 오늘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내일부터 출장이 잡혀 잠깐 들른 것인데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이수지도 몰랐다. 당황한 한지감을 보며 이수지가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괜히 왔네. 그만 가볼게.”
“제가 로비까지 모시겠습니다.”
“됐어. 번잡스러운데 마무리나 잘해.”
단호한 태도 때문에 한지감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이수지에게 겨우 인사만 건넬 수 있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이수지가 이를 악물며 수행원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장학재단에 전화 걸어서, 주인탁 관련된 교수들 다 연구비 끊어버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사랑(?)의 대상이 모욕을 받는 모습이 이수지의 화를 돋우었다. 한지감이 계획하지 않은 호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