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결정2021.09.15.
김도균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가운데에 섰다.
“어제 한지감 씨를 만나 이야기를 했고, 성 교수님과도 연락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리뷰 전시장에서 나왔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놀란 직원들이 웅성대자 김도균은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한지감 씨가 퇴사를 결정한 이유는, 교수 출신의 감정위원이 다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자신으로 인해 회사가 힘겨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매팀 총괄로서 이런 상황을 사전에 미리 확인하지 못한 책임감을 통감합니다.”
지 팀장이 손을 들고 물었다.
“입장을 어떻게 취하실 생각입니까?”
“아침 일찍 대표님을 뵙고 의논을 드렸습니다. 주인탁 교수의 행동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원상복구와 사과를 요구할 생각입니다.”
이 팀장이 걱정을 표했다.
“정당한 요구이지만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일은 한지감 씨의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주인탁 교수가 학계에서 우위적인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탑 옥션의 업무를 방해했습니다.”
숨을 고른 김도균이 말을 이어갔다.
“그 상황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으면 모를까, 노출된 상태에서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건 탑 옥션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강민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도균의 말에 동의했다. 지 팀장을 보고 김도균이 말했다.
“지 팀장님.”
“네. 총괄님.”
“우리 입장을 정리해서 보도자료를 만들어주세요.”
“네. 읽은 사람은 모두 우리 편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이 팀장을 봣다.
“이 팀장님, 마케팅 팀에서 기자 연락처, 이메일 받아서 보도자료 나오는 대로 돌릴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은 서정선의 차례였다.
“서 팀장님은 인플루언서들에게 직접 우리 입장을 전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인플루언서들이 우리 입장을 대변하는 컨텐츠를 만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김도균은 경매팀 전원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네.”
“넵.”
“예!”
“네!”
함성에 가까운 대답을 들으며 그는 싱긋 미소 지었다. 자리로 돌아간 그가 서류를 보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서정선이 있었다.
“한지감 씨…… 괜찮던가요?”
진심으로 서정선은 한지감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팀의 직원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질을 당했다고 여기니 당연했다. 의도적으로 벌인 상황이기에 괜찮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힘들지만 담담하게 이겨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울컥한 서정선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김도균은 마음의 찔림을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감 씨, 단단한 사람이니 잘 이겨낼 겁니다.”
“네…….”
그녀가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김도균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경환이 나를 봤다. 어제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 부담스러워서 참기가 힘들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속상하니까 그러지…….”
“그건…….”
“그건 뭐?”
내가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말해버릴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런 예민한 상황에서는 발걸음 하나라도 조심해야 한다.
“나 괜찮으니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너 때문에 더 기분 다운돼.”
“알았어.”
시무룩한 경환의 표정을 보니 양심 한쪽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경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입에서 훅 나와 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오늘은 경환이 면접 보는 날이어서 반차를 낼 작정이었으나 나 때문에 아예 월차를 냈다.
“얼른 면접 갈 준비나 해.”
“형……. 내 앞에서까지 덤덤한 척할 것 없어. 나는 늘 형 편이니까. 혹시 회사에서 압력 넣으면 말해.”
비장한 얼굴에 절로 웃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말하면 어쩔 건데?”
“어쩌긴 언론에 떠벌리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야지. 직원을 보호해주지 않다니 최악이잖아. 나 그냥 오늘 면접 보지 말까?”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 면접을 위해 경환이 시간을 쪼개가며 얼마나 공부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면접을 안 보긴 왜 안 봐?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빨리 가서 한 자라도 더 공부해.”
“공부는 이미 완벽하게 했어.”
경환이 어깨를 펴며 자신에게 심취한 표정을 지어 웃음이 터졌다.
“자신하지 말고 더 공부해.”
“알았어.”
내가 정리한 노트를 경환이 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ART TV' 홍 기자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슬쩍 일어나 방으로 가서 최대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홍 기자님.”
[지감 씨. 마음이 안 좋을 텐데 전화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어제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홍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나서 대화하는 거 어때요? 지감 씨 마음이 어떤지 솔직하게 듣고 싶어요. 지감 씨도 회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잖아요.]
“……네. 필요하죠.”
지금 홍 기자가 한 제안이 딱 내가 원하는 바였고, 김도균과 이미 이야기도 된 상태였다. 하지만 바로 덥석 무는 것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나는 지금 부당하게 갑질을 당한 ‘을’이니 말이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 입장이라 좀 무섭네요.”
[아직 연락 못 받았어요? 탑 옥션에서 주인탁 교수에게 지감 씨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어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안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집 근처 카페에서 뵐 수 있을까요? 제가 멀리 나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요…….”
[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 침을 튀기며 주인탁이 화를 냈다.
“학술지에서 이름을 빼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수행원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현성재단에서 연구비를 다 끊겠다고 했답니다…….”
“장사치들 주제에 돈 좀 준다고 주인 행세를 해! 도대체 누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부릅뜬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공포스러웠다. 눈치를 보던 수행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현성 미술관 이수지 관장의 지시였다고 합니다…….”
“그 계집애가 왜?”
“한지감 씨와의 관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애인이라도 돼?”
“거기까지는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쓸모없는 놈.”
수행원은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그럼 애초에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머리가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때 수행원의 핸드폰이 울렸고, 저장되지 않은 번호라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성 미술관 이수지 관장님 비서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현성 재단에서 취한 조치는 들으셨겠죠?]
“네. 들었습니다.”
돈을 끊겠다 엄포를 놓은 쪽에서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원하는 걸 들어주면 원상태로 되돌려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하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관장님은 교수님의 사상에 매우 실망하셨고, 미술계 동료인 한지감 씨가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한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사과를…… 원하시는 겁니까?”
[네. 한지감 씨에게 사과를 한다면 취했던 조치를 없던 일로 돌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결정을 하시길 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수행원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꼈다. 주인탁은 평생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과를 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하는 수행원의 표정을 읽은 주인탁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눈을 질끈 감은 수행원이 말했다.
“한지감에게 사과를 한다면 원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합니다.”
씩씩거릴 줄 알았던 주인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이 상황을 이용해 보지.”
“네?”
“한지감이 우리가 협박했다면서 저 난리를 치고 있잖아!”
“그러니까 언론에 이 사실을 흘리자 그런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 이야기야!”
흥분한 주인탁과 달리 수행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주인탁이 식민사관을 주장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이기에, 현성 재단이 돈을 끊는 것은 오히려 정의롭게 비쳐질 수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닌, 재단의 성격과 맞지 않아 결정한 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주인탁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행원을 보며 주인탁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서 전화 돌리라니까 왜 그러고 섰어!”
“네……. 돌리겠습니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행원은 전화를 들 수밖에 없었다. * 황덕현이 핸드폰을 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에는 한지감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인터뷰를 참 잘했어. 피해자인데도 품위와 신념이 있어 보여.”
“한지감이 워낙 잘했지.”
김도균의 칭찬에 황덕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일이야. ‘내가 했는데 당연하지.’ 이럴 줄 알았는데?”
“나를 뭘로 보고. 나는 내가 한 것에 대해서만 그러거든?”
“그래. 김도균은 그렇지.”
그것이 김도균이 스스로에게 심취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언론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야.”
“‘직원을 보호하고 불의에 맞서는 회사’로 프레임이 잡혀서, 이미지 실추는 없었잖아.”
“하지만 주요 고객 몇몇은 분명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 거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불쾌함을 표한 고객은 없었지만 식민사관을 가진 고객도 있거니와,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지감이 주인탁에게 보인 태도가 버릇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 해지를 요구했던 감정위원 모두가 사과하면서 계약을 유지하겠다고 입장을 바꿨고, 쌍룡검 원고를 썼던 교수들이 받은 불이익이 사라졌어.”
“그래 출혈은 있었지만 크지 않았어. 인정해.”
“고마워, 형. 쉽지 않은 결정이란 걸 알아.”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김도균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누가 다 책임지겠다고 해서 들어준 거야. 김도균이 나에게 그 정도 가치는 돼.”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해서 더 감동이 됐다. 핸드폰을 보던 황덕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인탁 교수가 기사 냈네.”
“응. 한지감에 대한 사과 한마디도 없이, 현성 재단이 개인적 관계 때문에 학술지에 연구비를 다 끊었다고 했더라고.”
“이런 악플 투성이네.”
댓글 반응은 싸늘했다. ‘너랑 같은 친일로 찍히고 싶겠냐?’ ‘갑질하고서 입만 살았네’ 등등, 주인탁의 입장을 비난하는 내용이 거의 다였다.
“거기에다 기름 부은 격으로 현성 재단이 공식 입장을 냈거든.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곳의 연구비를 지원할 수는 없다고.”
그로 인해 여론은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이 되었다. 황덕현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스쳤다.
“한지감은 출근했어?”
“응. 출근했어.”
“보조 경매사 어떻게 할지, 오늘 결정되는 거 맞지?”
“맞아.”
황덕현이 서운함을 내비쳤다.
“지난번에 내가 말 꺼냈을 때는 정색하더니, 서 팀장이 말하니까 들어주냐?”
“서 팀장은 경매사잖아. 경매사가 보는 눈이 정확하니까. 그리고…….”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내든 한지감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한지감을 보조경매사로 세우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선에서 없는 일로 만드는 것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이든 아니든 간에 한지감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요상한 믿음이 그를 움직였다. * 나는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서정선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앞에는 김도균과 서정선이 있었다. 보조 경매사에 대한 나의 결정을 말하는 자리여서 그런지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서정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제 인터뷰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아니요. 잘 쉬었습니다.”
“인터뷰 정말 잘했던데? 꼭 시민운동가 같았어. 혹시 정계 진출하려는 건 아니지?”
“하하하. 제가 어떻게 정계에 진출하겠습니까.”
가벼운 농담에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났다. 자연스레 서정선은 이 자리의 목적으로 넘어갔다.
“며칠 동안 정신없어서 더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은데, 이미 프리뷰가 시작한 상태여서 지감 씨 결정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결정, 했어?”
“네.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