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특별경매 (1)2021.09.18.
가벼운 농담에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났다. 자연스레 서정선은 이 자리의 목적으로 넘어갔다.
“며칠 동안 정신없어서 더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은데, 이미 프리뷰가 시작한 상태여서 지감 씨 결정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결정, 했어?”
“네. 결정했습니다. 보조 경매사 하겠습니다!”
“그래. 결정 잘했어!”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서정선은 흐뭇해했다. 이 제안이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긴장 상태에서 눈앞이 하얘지는 시험 공포증이 있고, 그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보조 경매사는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고, 경매 현장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다. 갑자기 그림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 임기응변에도 강해야 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코앞에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김도균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니, 어떻게든 잘 해내서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싶었다. 그가 서정선을 보고 말했다.
“서 팀장님, 며칠 남지 않았으니 잘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서정선은 바로 프로그램을 가르쳐주었다.
“보면 경매번호, 그림, 세부정보, 시작가가 입력되어 있어.”
“네.”
“그리고 아래에 보면 원화, 달러, 엔화, 유료화 등이 있어.”
“네.”
쭉 늘어선 숫자들의 향연에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서정선이 풉 하고 웃었다.
“원화만 제대로 넣어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입력되니까 걱정하지 마.”
“네!”
그제야 나는 웃을 수 있었고, 서정선은 그런 나를 놀렸다.
“지감 씨, 지금 보니까 ‘넵무새’이네.”
“아…… 죄송합니다. 따라가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어서…….”
“뭘 또 죄송하기까지야. 가장 중요한 건 호가야. 보통 호가 폭이 정해져 있지만 경매사 재량으로, 또 고객들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거 알지?”
“네. 알죠.”
드물지만 고객 중에서 호가가 아닌 다른 액수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매사가 사천을 불렀다고 치면 삼천구백오십만 원은 안 되냐고 하는 경우다. 경합이 벌어졌을 때는 이럴 수가 없고, 자연히 도태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경매사가 이런 상황을 받아주기도 한다. 반대로 경매사가 천만 원씩 호가하다가 재량으로 이천만 원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한 변수들 때문에 경매 현장에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손에 익도록 연습 많이 하겠습니다.”
“그래. 연습 좀 하고 나랑 맞춰 보자. 김 책임하고 셋이서도 맞춰 보고.”
“감사합니다.”
대견하다는 듯 서정선은 어깨를 툭툭 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프로그램을 마주하니 경매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절로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백 책임이 휙 고개를 돌려 안 본 것처럼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왜 저러는 거지? 갸우뚱하는데 장희정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지감 씨, 졸리지 않아요?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아…… 네.”
갑작스런 제안에 놀랐지만, 나는 순순히 장희정을 따라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보조 경매사 된 거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메이져 경매 때는 선배님도 다시 하실 거죠?”
“……모르겠어요. 지난번에 너무 놀라서…….”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팀장님이 아예 안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진 말라고 하셔서 노력하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아요.”
“그렇군요.”
음료를 마시면서도 장희정은 힐긋힐긋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불러낸 듯한데,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눈치다. 물어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게……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백 책임님이요. 재작년까지만 해도 보조 경매사였어요.”
“아……. 기억나요!”
골동상이었을 때 몇 번쯤, 백 책임이 보조 경매사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을 엄청 잘하셨어요. 팀장님이 경매사로 세우고 싶어할 만큼요. 그래서 한 번은 규모가 작은 특별경매에서 경매사로 섰죠. 그런데…….”
“그런데요?”
“3번째 작품에서 호가 폭을 틀리면서 당황하시더니, 패닉 상태가 되었어요…….”
“…….”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경매사가 패닉이 되어버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다. 장희정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이어나갔다.
“어쩔 수 없이 백 책임님을 자리에서 내리고 팀장님이 올라가셔서 경매를 이어가셨죠.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백 책임님게는 트라우마겠네요.”
“맞아요.”
왜 백 책임이 나를 보다 고개를 돌렸는지 알 것 같았다. 보조 경매사를 하기로 한 나를 보면서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백 책임님이 날카로워진 것이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그렇군요…….”
“예전에는 이해를 못했어요. 사람은 실수할 수는 있는 거지만, 거기에 매여 있으면 안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내가 실수하고 나서, 백 책임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겠더라구요,”
장희정은 보조 경매사로 실수를 한 것이지만, 백 책임은 경매사로 섰기에 책임져야 할 규모가 더욱 컸다. 경매를 통째로 망쳐버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책임이 높은 만큼, 잘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컸을 터였다.
“지감 씨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백 책임님 앞에서는 좀 더 조심하는 것이 서로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지감 씨가 지금 뭘 잘못했다는 건 아니구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구요.”
장희정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 퇴근하고 지하철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금을 맞은 직장인 치고 너무 시무룩한 거 아니에요?”
돌아보니 다영이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난다.
“시무룩할 수도 있지. 불타는 금요일이 아니라 불 태우고 싶은 금요일도 있기 마련이거든. 어린 너는 모르겠지마안.”
“고작 두 살 많으면서 되게 어른인 척하는 것 봐.”
“당연하지. 너보다 많이 먹은 밥그릇이 몇 개인데.”
못 말리겠다는 듯 다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나이 많은 분, 불 태우고 싶은 금요일을 기념해서 맥주나 한잔해요.”
“그래. 가자아.”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비워냈다.
“캬아!”
“크으으!”
다영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퇴근 후 맥주는 역시 다네요.”
“그치. 달지.”
“아 참. 경환 씨는 면접 잘 봤어요?”
“응. 잘 봤어. 다행히도 내가 정리해 놓은 자료에 있는 질문을 받아서, 어렵지는 않았대. 될진 모르겠지만.”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경환이 면접 본다는 이야기는 다영에게 따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주인탁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며칠 동안 쫓기듯 살았기 때문이다.
“채령이한테 들었어?”
“네. 지난주에 채령이네 작업실 놀러갔었거든요.”
“채령이? 많이 가까워졌나 보다?”
어깨를 으쓱 올린 다영이 자랑하듯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친화력이 좋잖아요.”
“글쎄다. 작업실 놀라가겠다는 말 하고 반년 지나서 간 사람이 친화력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놀리자 다영은 미간을 구겼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구요! 그럼 오빠는 가본 적 있어요?”
“없지.”
“거봐요.”
‘너랑 나랑 같냐? 나는 경환이랑 관계도 있고, 채령이가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안 간 거거든.“
“그런 걸 바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해요.”
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 맞아. 바빠서 못 갔어. 채령이 요새 어떤 그림 그리는지 궁금하다. 어때?”
“재밌었어요. 현대적인 풍속화를 그리더라구요.”
“현대적인 풍속화?”
“네. 그런 거 있잖아요. 21세기지만 조선시대 같은 생각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요.”
어떤 그림을 그리는 건지 궁금해졌다.
“자세히 좀 말해봐.”
“미안하지만 채령이가 이 이상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말 못해요.”
“내가 아무나야?”
“네. 아무나 맞거든요. 궁금하면 직접 찾아가서 보세요.”
“쳇. 치사해.”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싱긋 웃은 다영이 물끄러미 나를 봤다. 괜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장난을 쳤다.
“왜? 봐도 봐도 잘 생겼어?”
“그런 장난으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구요. 보조 경매사 때문에 그러는 거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 나 시선 집중되는 거 무서워하는 거…….”
“쉽진 않겠지만 보조 경매사잖아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경매사를 보고 있지, 보조 경매사는 관심에 없어요.”
“그렇지. 근데 백 책임님 이야기 들으니까 실수할까 봐 더 긴장돼.”
간단하게 나는 장희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팀장님한테 공포증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백 책임님 이야기 들으니까,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 되네. 나 때문에 진 회장님이 어렵게 결정하신 경매를 망쳐버릴까 봐 겁이 나.”
지그시 나를 보다 다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 공포는 누구나 느껴요. 말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면 이야기하세요.”
“잘……할 수 있을까.”
“오빠는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잘 못한다고 해도, 다음번에는 잘할 거예요.”
다영의 따스한 미소에, 불안한 마음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노트북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서정선과 김 책임이 들어왔다. 나를 보고 서정선이 빙그레 웃었다.
“되게 빨리 왔다. 긴장했어?”
“네. 긴장했습니다. 경매 현장을 곧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네요.”
눈 깜작할 사이에 경매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지난 주말에 시선이 쏠리면 긴장을 많이 한다는 말을 서정선에게 전했다. 그때도 서정선은 걱정할 것 없다면서 나를 다독였다.
“긴장할 것 없어. 나도 김 책임도 옆에 있잖아. 연습하고 들어가면 훨씬 편할 거야.”
김 책임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는 번호판 적을 분도 없는데, 꼭 있어야 해요?”
“쓰읍! 호흡을 같이 맞춰 봐야 할 것 아니야. 그냥 마네킹처럼 있기라도 해.”
“네에. 알겠습니다.”
서정선은 정말 경매를 하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서서 시작했고, 나는 거기에 맞춰서 호가 폭을 조정했다. 연습하는 1번에서 10번까지 해봤지만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턱을 괸 김 책임이 따분한 듯 하품을 했다.
“잘하네. 연습할 필요도 없겠구만. 괜히 일찍 왔다. 피곤해.”
“제가 긴장을 좀 많이 하는 편이여서요.”
“지감 씨가? 이 관장한테 대할 때 보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놀라는 김 책임을 보면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책임님은 긴장 하나도 안 하시는 것 같아 부럽네요.”
“이제는 몸에 익어서 말이야.”
서정선이 그런 김 책임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김 책임, 그렇게 오만해지는 날을 경계해야 하는 거 알지?”
“조심하겠습니다.”
“경매는 한 순간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돼. 명심해, 김 책임.”
“명심하겠습니다.”
김 책임이 납작 엎드리자 서정선은 할 말이 남아있음에도 접었다.
“연습은 이만하고,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 있으니까 각자 쉬어.”
“네.”
“예.”
서정선이 나가자 김 책임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또 거기 가시려나 보네.”
“거기요?”
“아. 지감 씨 모르는구나. 팀장님 경매일에는 항상 플라워가든에 가서 아이리시 커피를 드시거든.”
“플라워가든이면 차로 10분 정도 가야 하잖아요. 주변에 아이리시 커피를 파는 곳이 없나요?”
근처에 가까운 카페들도 많은데 왜 굳이 거기까지 가서 아이리시 커피를 드실까?
“아니. 일종의 징크스야. 경매사들은 다 그런 징크스가 있거든. 그걸 꼭 해야 그날 경매가 잘 풀리는 거지. 나만 해도 있어.”
“뭔데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김 책임이 작게 속삭였다.
“빨간색 팬티 입기.”
“아…….”
“지감 씨니까 알려준 거야.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네.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한테도 저런 징크스가 생길지 궁금해졌다. * 노트북을 켠 채 경매대 옆 의자에 앉아 경매장을 바라봤다. 10분 전에만 해도 현장석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 300석 되는 좌석이 어느새 80% 이상 채워졌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나댔지만, 나는 노트북을 보면서 이따 어떤 식으로 호가를 올릴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경매 시작 2분 전, 서정선은 경매대에 당당한 모습으로 섰다. 나와 김 책임을 보면서 작지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잘해 봅시다!”
“네!”
“넵.”
4시가 되자 서정선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진 컬렉션 경매에는 한국 근현대 미술품, 해외 미술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진 컬렉션은 진 회장의 성을 딴 이름이었다.
“진영대 컬렉터가 높은 안목으로 수집된 작품들이 이 자리를 통해 더 빛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서정선이 슬쩍 내 쪽을 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1번 그림을 띄웠다.
“1번 작품은 전명자 화가의 ‘나비’입니다. 시작가는 천이백만 원, 호가는 오십만 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