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특별경매 (2)2021.09.20.
서정선이 슬쩍 내 쪽을 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1번 그림을 띄웠다.
“1번 작품은 전명자 화가의 ‘나비’입니다. 시작가는 천이백만 원, 호가는 오십만 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당당하게 손짓을 하며 서정선이 외쳤다.
“천이백만 원. 85번 고객님 천이백오십, 천삼백, 천삼백오십.”
서정선의 호흡에 맞춰서 나는 계속 가격을 올렸다. 빠르게 가격이 올라가서 숨 한번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어느새 가격은 천오백까지 갔다.
“85번 고객님 천오백.”
빠르게 경매장을 훑어보던 서정선의 시선이 한쪽에서 멈췄다.
“천오백오십 없으십니까?”
한쪽에 있던 여자 고객이 11번 패들을 든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오백오십이 나온 줄 알고, 잘못하면 호가를 올릴 뻔했다. 그냥 기계처럼 호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장 흐름을 읽어야 하는구나. 나의 시선은 서정선을 따라 11번 고객에게 향했다. 11번 고객은 서정선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패들을 들었다.
“11번 고객님 천오백오십!”
서정선의 시선이 곧바로 85번 남자 고객에게 향했다.
“천육백 없으십니까?”
모두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사실 85번 남자 고객에게 하는 말이었다. 망설이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푹 떨어트렸고, 서정선은 11번 여자 고객을 보면서 낙찰봉을 두드렸다.
“11번 고객님, 천오백오십에 낙찰되셨습니다.”
11번 고객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치는 반면, 85번 고객은 울상을 지었다. 안타까웠지만 그런 감정을 세세히 느낄 마음의 여유 따윈 없었다. 서정선이 곧바로 2번 작품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2번은 선영주 화가의 ‘선(善)’입니다.”
나는 바로 2번 선영주 화가의 단색화 그림을 화면에 띄웠다.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으로 그려진 단색화입니다. 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선영주 화가의 특성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시작가는 이천만 원입니다. 오십만 원씩 올라가겠습니다.”
이번에도 호가가 오십만 원이라서 다행이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두 번째 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빠르게 경매는 진행되어 어느새 13번까지 되었다.
“13번은 이기환의 ‘인내’입니다. 특유의 절제된 톤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작가는 오천만 원입니다. 호가는 삼백만 원씩 하겠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오천. 14번 고객님 오천삼백, 오천오백, 오천팔백, 육천!”
삼백만원 호가라면 오천삼백 뒤에 오천육백이 오는 것이 맞지만, 10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삼백, 오백, 팔백, 천으로 올린다. 서정선의 호흡에 따라 호가를 정신없이 올렸다.
“육천삼백, 육천오백, 63번 고객님 육천팔백, 14번 고객님 칠천.”
63번 남자 고객과 14번 남자 고객의 경합이 벌어졌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현장석 뒤편에 있었다.
“칠천삼백, 칠천오백, 칠천팔백, 팔천.”
조금 있으면 일억이다. 경매장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만 가 있을 때였다. 앞쪽에 있는 여자 고객이 소심하게 38번 패들을 들었지만, 두 사람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서정선은 보지 못했다. 경매사가 놓치는 이런 부분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내 옆에 앉은 김 책임이 할 일이다. 그는 당연히 보고 있을……. 뭐야. 안 보고 있잖아.
“팔천삼백, 팔천오백, 팔천팔백.”
38번 고객이 계속 패들을 들었지만 서정선도 김 책임도 놓쳤다. 나는 한손으로는 가액을 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김 책임을 두드렸다. 뭐하는 거냐며 김 책임이 내게 인상을 쓰자, 나는 턱짓으로 앞에 앉은 고객의 존재를 전했다. 그제야 알아들은 그는 빠르게 이 사실을 서정선에게 손짓으로 알렸고, 서정선은 마치 처음부터 셋이 경합한 듯 자연스럽게 38번 고객을 끼워넣었다.
“38번 고객님 구천. 구천삼백, 구천오백. 일억.”
“지금부터 호가를 천만 원으로 올리겠습니다. 일억 천, 일억 이천, 일억 삼천. 일억 사천 없으십니까?”
63번 고객은 패들을 들지 못했다. 서정선이 38번 고객을 가리키면서 낙찰봉을 두드렸다.
“38번 고객님 일억 삼천에 낙찰되셨습니다.”
38번 고객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치열한 경합을 벌인 만큼 박수가 쏟아졌고, 고객은 수줍은 인사를 보냈다. 모두 그 고객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옆을 확인했다. 서정선은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다리가 불안하게 떨렸고, 김 책임은 큰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경매가 얼마나 살 떨리는 일인지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다.
* 경매를 마치고 텅 빈 사무실로 돌아온 서정선은 화를 애써 누르면서 말했다.
“김 책임. 오늘 왜 그렇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경합이 붙은 뒤편에 눈이 가서 그만…….”
고개를 푹 숙인 김 책임이 어쩔 줄 몰라 했고, 나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봤다. 이를 악문 서정선의 모습은, 차라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무서웠다.
“김 책임, 내가 분명히 말했지? 경매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네. 제가 경솔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김 책임을 믿고 경매에 집중하겠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 꼭 지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정선은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김 책임은 휘청거리면서 자기 자리도 아닌 곳에 주저앉았다.
“하아…….”
“괜찮으세요?”
“아니. 만약 아까 그대로 못 보고 지나쳤다가 다른 사람에게 낙찰되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낙찰봉으로 두드리고 패들 번호와 가격을 말해버리면 그대로 낙찰이 확정된다. 높은 가격에 응찰했는데도 낙찰받지 못한다면 고객은 불쾌해질 것이고, 회사는 난감해진다. 김 책임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탕비실로 가서 물을 가져다 건넸다.
“물 좀 드세요.”
“고마워.”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김 책임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감 씨가 잘 봤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고마워, 지감 씨.”
“운이 좋았어요.”
“다음부터는 정말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십년감수했네. 내가 내일 밥 살게. 뭐 먹고 싶어?”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제가 실수하면 김 책임님이 도와주실 거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생긋 웃는 나를 보며 김 책임은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돼?”
“네. 물어보세요.”
“이 관장이랑 너, 특별한 관계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현성 미술관 이수지 관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지난번 이수지가 프리뷰에 와서 오해한 모양이다. 나는 웃으면서 부러 가볍게 말했다.
“특별한 관계 전혀 아니에요. 그저 고객이에요. 이 관장님도 저를 골동상, 경매사 직원으로만 생각하시구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수지는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다. 설명을 했는데도 김 책임은 의심의 끈을 쉬이 놓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이야?”
“그럼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직 너한테까지 말이 안 갔구나. 하긴, 소문의 당사자니까.”
“무슨 소문이요?”
“너. 이 관장이랑 연인 관계라고 소문 났어.”
“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
“이 관장이 주인탁과 관련된 학회, 학술지, 학교 다 돈줄 막았잖아. 주인탁하고 관계 끊었다고 나오면 그제야 돈 풀어주고.”
보조 경매사 준비에 골몰하다 보니, 주인탁이 행패부리는 것을 이수지가 목격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조치를 취했을 줄은 몰랐다.
“전혀 몰랐어요. 선배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대일 신문사에 아는 기자가 있거든.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아는 거 있냐고 전화가 왔어. 아는 것이 없으니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인 거죠?”
제발 모르는 채로 조용하게 넘어가기를 바란다.
“아직은…… 그렇지.”
“아직은, 이라뇨?”
“그 기자가 하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서, 소문이 금방 날 것 같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예상치 못한 소득이 아니라 피해였다. 얼굴이 하얘진 나를 김 책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봤다.
“괜찮아?”
“아니요. 안 괜찮아요.”
소문이지만 이수지의 남자가 된 것이 불쾌할뿐더러, 이것이 몰고 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 찻잔을 내려놓으며 주인탁이 말했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습니까.”
“작가님을 만나고 가다가 교수님 생각이 나서요.”
강정휘는 웃으면서 주인탁의 얼굴을 살폈다. 지난번 프리뷰에 가서 한지감에게 모욕을 주려다가 주인탁은 되레 크게 당했다. 그럼에도 이곳에 발걸음을 한 것은, 학계에서 그의 영향력이 아직 건재하리라 믿고 싶기 때문이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움찔한 주인탁이 이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학회에 참여해야 해서 정신이 없네요.”
학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현성 재단의 돈이 끊길까 우려한 학회에서는 그의 이름을 서둘러 빼버렸다. 하지만 학자의 자존심상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바쁘시군요. 이거 제가 괜히 방해한 것 아닌가 싶네요.”
“강 대표 만날 시간은 있어요.”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그를 보면서 예사롭지 않은 강정휘의 촉이 발동했다. 주인탁의 집에서 나온 그녀는 바로 강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특별경매 어제 했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진 회장의 소장품을 한지감이 전부 위탁해낸 것과 다름이 없기에, 강민수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졌다. 이를 빨리 알아차린 강정휘는 그를 칭찬했다.
“민수 씨가 또 많은 공을 세웠겠네요.”
[공까지는 아니고, 총 8점을 제 고객들이 낙찰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공까지는 아니라면서도 강민수의 목소리에는 방금과 달리 힘이 들어갔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어머, 8점이나 했어요? 그게 바로 공이죠!”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슬쩍 강정휘는 자신이 알고 싶은 이야기를 던졌다.
“저번에 프리뷰 때 무슨 교수인가 하는 사람이 왔다고 그랬잖아요. 그 이후에 뭐 들은 이야기 없어요?”
[그게…… 안타깝게도 그 교수님이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난감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니에요? 언론은 금방 잠잠해지지 않나?”
[언론도 언론이지만 이수지 관장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이수지 관장이요?”
[네. 지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글쎄 이수지가 주인탁에게 가는 돈줄을 다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그랬군요.”
강정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주인탁은 지금 끈 떨어진 연이라는 소리다. 열불이 나는 것을 눈을 질끈 감으며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제가 지난번에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는데요.]
“…….”
강정휘는 빨리 전화를 끊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양 교수의 쌍룡검 원고, 주인탁 교수에게 제가 흘렸습니다.]
예상외의 말에 강정휘가 눈을 번쩍 떴다.
“민수 씨, 주인탁 교수님과 아는 사이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저 한국대 나왔잖아요. 역사학과 조교 중에 후배가 있어서요. 아까 말씀드린 지인이 바로 이 후배입니다.]
상황이 커지도록 만든 사람이 강민수라니.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아, 강정휘는 새삼 흥미가 솟았다.
“어머. 그랬군요. 역시 한국대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아요.”
[이 정도면 기본이죠오.]
기본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심취해 있었다. 이런 인간이 지방대 출신에게 밀렸으니 얼마나 배알이 꼴렸을지 눈에 선했다. 그 자존심을 건드린다면 한지감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인재가 고작 한지감 따위에게 밀리다니, 마음이 좋지 않네요.”
[……스스로 증명해 내야죠. 그런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걸요.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보여줄 겁니다.]
여태까지 강민수가 취한 방법들은 정정당당과는 매우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실력으로 보여주겠다고? 강정휘는 코웃음이 나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그래야죠. 내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말해요.”
* 옥상으로 들어선 나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
“왔어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강민수가 나를 봤다.
“네. 무슨 일이죠?”
5분 전에 갑자기 강민수에게서, 옥상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만나서 말하겠다고만 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동기 사이에 이렇게 따로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도 있죠.”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요?”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면서 강민수의 표정이 싸해졌다.
“한지감 씨는 계속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네요.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아만다 우 유작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수지 관장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다 들었어요.”
“그거야 지감 씨와 관계를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둘러댄 거겠죠.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아니면 열등감 때문에 파악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뭐. 열등감?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너한테 열등감이 있다고? 화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그래요, 한번 싸워 봅시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애들처럼 주먹질이나 할 수 없으니 6월 메이저 경매 위탁을 갖고 싸워보죠.”